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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조선시대 갑옷 복원품 원 출처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보기힘든 자료라 일단 올리고 본다. 우리나라 갑옷 자료란게 워낙 흔치 않다보니. 하긴 뭐 유물이 좀처럼 있어야지 뭐... -ㅆ-;; [ 기수와 궁수 ] 조선 초기에 쌔고샜다던 병과 기수(騎手:기마병)와 궁수(弓手)의 무장이다. 왼쪽의 기수가 활줄을 잘못건게 눈에 거슬리지만... 뭐 넘어가지. -_- 궁수는 뭐 워낙 한민족이 활에 심취한 겨레다 보니 그렇다치고 ^^ 기병은 조선초에 워낙 집약해 정착,농업국가로서는 드물게 보병보다 많았다고 한다. 조선초 전성기에는 2~3십만 단위로 병력을 증강시켜 양성하기도 한다. 그리고 실제로 기수의 경우는 무장이 저것보다 빵빵하다고. 편곤에 기창(騎槍)에 방패에 환도까지 찼다니 뭐... [ 조총수와 초관 ] 왼쪽은 임난후 조선 중후기의 주력보.. 더보기
갑주 - [송(宋)나라에서 청(淸)나라까지] 안녹산의 난을 시작으로 여러 절도사들의 난립이 계속되면서 당나라는 패망하고 송(宋)이 건국되었다. 이때의 송은 당나라가 주변 민족과의 난잡한 교류로 망했다고 보고, 철저하게 제한된 국외무역을 중심으로 내치에 힘쓰려 했다. 이것은 여러나라들의 중원 유입을 막아야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졌고, 그것은 송나라 특유의 방어식 국방정책으로 실현되었다. 이것으로 송나라때 중국의 갑주는 절정에 달했다고 본인은 생각한다. 맨 위의 것은 무경총요라는 사서에 나오는 송나라의 갑주 "보인갑"으로, 갑엽을 가죽끈과 갑정으로 엮은 개갑이며, 거의 전신을 덮어 중국의 풀플레이트아머라고 비할수 있을정도며, 방호력도 최상이다. 단점이라면 거의 20킬로는 나가는 무게가 흠. 특이한 것은, 송대의 중국식 갑주가 우리나라 문화에 어느정도 영향.. 더보기
갑주 - [한(漢)나라부터 당(唐)나라까지] 진의 멸망이후 중국은 유방이 세운 한(漢)이 어언 2백여년 간을 통치하게된다. 한나라는 초기에 기마민족 흉노의 침공을 받고 사실상 흉노에게 굴복하는 치욕을 겪는데,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한무제가 즉위한 후 흉노에 항전하면서 기병의 효율성을 깨닫게 된다. 전국시대를 호령하던 전차의 시대는 이로써 막을 내리는데, 이 과정 후 한나라의 갑주는 다분히 북방계 갑주의 특징을 이어받은 모습을 보인다. 위는 한나라 멸망이 다가온 삼국시대 당시의 갑주다. 삼국지 연의의 영향을 받은 많은 사람들의 경우 실망을 금치 못할 것 같다 -ㅅ- 기본적으로 한대와 차이가 없다. 여담이지만 삼국지에 나오는 무기류는 작가 나관중이 삼국지를 집필하던 시대인 원,명때의 무구 들이다.(관우는 언월도는 명나라때나 생겨난다) 후한의 멸망후 사.. 더보기
갑주 - [하(夏)나라부터 진(秦)까지] 은(殷), 주(周)이전의 고대국가 하나라때 쯤의 갑주라고 한다. 사실 하나라의 존재는 유물이 아직 밝혀진 바없으나 중국의 어거지 역사공정으로 인해 억지로 역사에 편입되었다. -ㅅ- 아마 하나라가 없었다면, 위의 갑주는 은나라 이전 연맹국가 시대의 것으로 보인다. 고대 남방의 보편적인 복식으로, 위아래 구분이 없고 통으로 된 일체형의 복장이다. 지금의 중국 갑주와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며, 남방풍의 색채가 아주 이국적으로 보인다. 은나라의갑주다. 상(商)나라 라고도 한다. 실질적인 유적의 발견으로 따지자면 중국 최초의 왕조다. 연맹국가 시대 이전과의 차이를 보자면, 북방의 영향으로 바지를 입기 시작했고 저고리와 바지로 복식이 나뉘었다는 것이다. 위의 인물은 제후나 왕인듯한데, 아직까지 갑주는 의장용의 성격이.. 더보기
동북공정 바이러스 급속 확산 인터넷 통해 중국인 역사 왜곡 ‘세뇌화’… “고구려 중국사” 확대 재생산 단계로 넘어가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의 역사를 중국사로 편입하려는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이 학자들의 ‘담론 차원’을 넘어 인민에 대한 ‘세뇌화 차원’으로 옮겨가고 있다. 2002년부터 지난해 2월까지 5년간의 동북공정 사업기간이 ‘부팅’ 단계였다면 지금은 ‘바이러스 실행파일’이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컴퓨터의 e메일 주소록을 뒤져 무차별적으로 바이러스 첨부 e메일을 전송해 컴퓨터를 감염시키는 ‘님다 바이러스(nimda virus)’처럼. 중국 학계가 논증, 분석을 통해 생산한 동북공정 이론이 지방정부와 박물관, 인터넷 사이트 등에서 일반인에게 확산되고 있다. ‘세뇌화 후폭풍’도 예고된다. ▲ 중국 포털사이트 톈진구이빈왕에 실린 .. 더보기
地名辭典 중국의 지명사전 - 감숙성(甘肅省) - 감주(甘州):감숙성의 북서부에 있는 도시. 성내에서 드물게 볼 수 있는 곳으로 감숙, 신강성간의 관로 연변에 따라서 발달되었으며 상업이 번창하다. 명승고적 가운데 굉인사(宏仁寺)라고 부르는 큰 절은 유명하다. 거연(居延): 감숙성 북서부에 있는 염호(鹽湖). 옛날에는 거연택(居延澤) 또는 거연해(居延海)라 하였다. 모양은 초생달과 같았으며 처음에는 하나의 호수였으나 현재는 동서 2호로 나뉘어져 있다. 이 지역은 중국의 북서변을 자르는 사막지대이나, 예로부터 북방 민족의 근거지로 통하는 요로여서 흉노에 대한 전진거점이 되었다. 이능(李陵)이 흉노와 사투를 벌여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기련산(祁連山): 일명 남산(南山)이라고도 불리우는 천하의 명산이다. 위치는 감숙성 .. 더보기
隨書 列傳 隨書 列傳 (수서 열전) 수(隋)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정사(正史). 85권. 636년(태종 10) 당(唐)나라에서 장손무기(長孫無忌), 위징(魏徵) 등이 태종(太宗)의 명을 받아 제기(帝紀) 5권, 열전(列傳) 50권, 지(志) 30권으로 나누어 편찬하였다. 隋書卷八十一 列傳第四十六 東夷: 高麗·百濟·新羅·靺鞨·流求·倭國. 高麗 (고려:고구려) 之先, 出自. 嘗得女, 因閉於室內, 爲日光隨而照之, 感而遂孕, 生一大卵, 有一男子破殼而出, 名曰. 之臣以非人所生, 咸請殺之, 王不聽. 及壯, 因從獵, 所獲居多, 又請殺之. 其母以告, 棄東南走. 遇一大水, 深不可越. 曰: [我是河伯外孫, 日之子也. 今有難, 而追兵且及, 如何得渡?] 於是魚鼈積而成橋, 遂渡. 追騎不得濟而還. '고려'는 선조가 '부여'에서 나왔다. '부.. 더보기
廣開土好太王碑 釋文 및 飜譯 (광개토호태왕 비문) 광개토대왕비는 1880년경 중국 길림성 集安에서 발견되었으며, 1927년경 2층으로 碑閣이 만들어졌다. 사진 속의 광개토대왕비는 1927년 이전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비각은 1980년대에 새로 만든 것이다. 광개토대왕비는 장수왕 2년(414년)에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아들 장수왕이 건립했다. 높이 6.39m, 너비 1.5m, 두께 1.53m의 四面石碑(사면석비)이다. 일명 「好太王碑(호태왕비)」라고도 한다. 받침돌이 없이 碑身만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필체는 隸書體에 가까운 고구려 특유의 웅혼한 필체로 14∼15cm 정도 크기의 글자가 4면에 총 44행 (제1면 11행, 제2면 10행, 제3면 14행, 제4면 9행), 1775字가 새겨져 있다. 이 가운데 현재 알아볼 수 있는 글자.. 더보기
南齊書 列傳 南齊書 列傳 (남제서 열전) 중국 남조(南朝) 제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책. 양(梁)의 소자현(蕭子顯)이 썼다. 현행본은 기(紀) 8권, 지(志) 11권, 열전(列傳) 40권으로 되어 있다. 소실된 부분이 있다. 南齊書卷五十八 列傳第三十九 東南夷: 高麗國·百濟國·加羅國·倭國. 高麗國(고려국 :고구려) , 西與接界. 末, 爲使持節·散騎常侍·都督二州諸軍事·車騎大將軍·開府儀同三司. 元年, 進號驃騎大將軍./$按《高帝紀》繫此事於二年四月.$/ 三年, 遣使貢獻, 乘舶汎海, 使驛常通, 亦使, 然彊盛不受制. '동이'의 '고려국'은 서쪽으로 '위노'와 경계하고 있다. '송'말에 '고려왕 낙랑공 고련'을 사지절 산기상시 도독 영 평이주 제군사 거기대장군 개부의동삼사로 삼았다. '태조''건원' 원년 표기대장군으로 승진하였다. .. 더보기
南史 列傳 南史 列傳 (남사 열전) 남조(南朝), 즉 남송(南宋)·제(齊)·양(梁)·진(陳) 왕조의 역사서. 당나라 이연수(李延壽) 편찬. 본기(本紀) 10권, 열전(列傳) 70권으로 되었으나, 지(志)와 표(表)가 결여되어 있다. 南史卷七十九 列傳第六十九 東夷: 高句麗·百濟·新羅·倭國·文身·大漢·扶桑. 高句麗(고구려) , 在之東千里, 其先所出, 事詳《北史》. 地方可二千里, 中有, 所出. ·世, 南與·東與·北與接. 其王都於下,/$[丸都]各本作[九都], 據《梁書》改. 按《三國志.魏志》·《梁書》無[山]字.$/ 地多大山深谷, 無原澤, 百姓依之以居, 食澗水. 雖土著, 無良田, 故其俗節食, 好修宮室. 於所居之左立大屋,/$[立大屋]各本倒作[大立屋], 據《三國志.魏志》·《梁書》乙.$/ 祭鬼神, 又祠零星·社稷. 人性凶急, 喜寇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