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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隨書 列傳

                             
                             隨書 列傳 (수서 열전)
           
수(隋)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정사(正史). 85권. 636년(태종 10) 당(唐)나라에서 장손무기(長孫無忌), 위징(魏徵) 등이 태종(太宗)의 명을 받아 제기(帝紀) 5권, 열전(列傳) 50권, 지(志) 30권으로 나누어 편찬하였다.
隋書卷八十一
列傳第四十六
東夷: 高麗·百濟·新羅·靺鞨·流求·倭國.
高麗 (고려:고구려)
<高麗>之先, 出自<夫餘>. <夫餘王>嘗得<河伯>女, 因閉於室內, 爲日光隨而照之, 感而遂孕, 生一大卵, 有一男子破殼而出, 名曰<朱蒙>. <夫餘>之臣以<朱蒙>非人所生, 咸請殺之, 王不聽. 及壯, 因從獵, 所獲居多, 又請殺之. 其母以告<朱蒙>, <朱蒙>棄<夫餘>東南走. 遇一大水, 深不可越. <朱蒙>曰: [我是河伯外孫, 日之子也. 今有難, 而追兵且及, 如何得渡?] 於是魚鼈積而成橋, <朱蒙>遂渡. 追騎不得濟而還.

'고려'는 선조가 '부여'에서 나왔다. '부여왕'이 일찍이 '하백'의 딸을 얻어 실내에 가두어 놓았는데, 햇빛이 따라와 이를 비추니, 감화되어 아이를 배었다. 큰 알 하나를 낳았는데. 한 남자 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오니, 이름을 '주몽'이라 하였다. '부여'의 신하들이 '주몽'을 보통 사람처럼 태어나지 않았다 하여 모두 이를 죽이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장성하여 사냥을 따라 갔는데, 많은 짐승을 잡았다. 또 죽이고자 청하니 그 어미가 '주몽'에게 알리어 '주몽'이 '부여'를 버리고 동남으로 달아났다. 한 큰 물을 만나 깊어 가히 건널수가 없었다. '주몽'이 말하길 나는 하백의 외손이고 태양의 아들이다. 이제 어려움이 있어 병사들이 장차 이르려고 하니 어찌 하면 건널 수 있겠는가? 하니 이때 물고기와 자라가 포개어 다리를 만드니 '주몽'이 건널수 있었다. 기병이 가까이 왔으나 건널 수가 없어 돌아갔다.

<朱蒙>建國, 自號<高句麗>, 以<高>爲氏. <朱蒙>死, 子<閭達>嗣. 至其孫<莫來>興兵, 遂幷<夫餘>. 至裔孫<位宮>, 以<魏><正始>中入寇<西安平>, < 丘儉>拒破之. <位宮>玄孫之子曰<昭列帝>, 爲<慕容氏>所破, 遂入<丸都>, 焚其宮室, 大掠而還. <昭列帝>後爲<百濟>所殺. 其曾孫<璉>, 遣使<後魏>. <璉>六世孫<湯>,/$[湯], 本書《高祖紀》上作[陽].$/ 在<周>遣使朝貢, <武帝>拜<湯>上開府·<遼東郡公>·<遼東王>. <高祖>受禪, <湯>復遣使詣闕, 進授大將軍, 改封<高麗王>. 歲遣使貢不絶.

'주몽'이 나라를 세우니 '고구려'라 하여, '고'씨로 성을 삼았다. '주몽'이 죽자 아들 '여달'이 대를 잇고, 그 손자 '막래'에 이르러 병사를 일으켜 '부여'를 아울렀다. 그 후손 '위궁'대에 이르러 '위''정시'중에 '서안평'을 침략하니, '관구검'이 이를 깨뜨렸다. '위궁'의 현손(손자의 손자)의 아들은 '소열제'인데 '모용씨'에게 깨졌다. '환도'에 들어가 궁실을 불사르고 크게 노략질 한 후에 돌아 갔다. '소열제'는 후에 '백제'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그 증손 '련'은 '후위'에 사신을 보내었다. '련'의 육세손 '탕'은 '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자, '무제'가 '탕'에게 상개부 요동군공 요동왕을 내렸다. '고조'가 즉위하자 '탕'이 다시 사신을 보내어 궐에 이르러 대장군을 수여 받고 '고려왕'으로 봉함을 받았다. 해마다 조공이 끊이질 않았다.

其國東西二千里, 南北千餘里. 都於<平壤城>, 亦曰<長安城>, 東西六里, 隨山屈曲, 南臨<浿水>. 復有<國內城>·<漢城>,  其都會之所, 其國中呼爲[三京]. 與<新羅>每相侵奪, 戰爭不息. 官有太大兄, 次大兄, 次小兄, 次對盧, 次意侯奢,/$[侯],《周書》《異域傳》作[俟].$/ 次烏拙, 次太大使者, 次大使者, 次小使者, 次褥奢, 次 屬, 次仙人, 凡十二等. 復有內評·外評·五部褥薩. 人皆皮冠, 使人加揷鳥羽. 貴者冠用紫羅, 飾以金銀. 服大袖衫, 大口袴, 素皮帶, 黃革 . 婦人裙 加 . 兵器與中國略同. 每春秋校獵, 王親臨之. 人稅布五匹, 穀五石. 遊人則三年一稅, 十人共細布一匹. 租戶一石, 次七斗, 下五斗. 反逆者縛之於柱,  而斬之, 籍沒其家. 盜則償十倍. 用刑旣峻, 罕有犯者. 樂有五絃·琴·箏·  ·橫吹·簫·鼓之屬, 吹蘆以和曲. 每年初, 聚戱於<浿水>之上, 王乘腰輿, 列羽儀以觀之. 事畢, 王以衣服入水, 分左右爲二部, 以水石相 擲,  呼馳逐, 再三而止. 俗好 踞, 潔淨自喜, 以趨走爲敬, 拜則曳一脚, 立各反拱, 行必搖手. 性多詭伏. 父子同川而浴, 共室而寢. 婦人淫奔, 俗多遊女. 有婚嫁者, 取男女相悅, 然卽爲之, 男家送猪酒而已, 無財聘之禮. 或有受財者, 人共恥之. 死者殯於屋內, 經三年, 擇吉日而葬. 居父母及夫之喪, 服皆三年, 兄弟三月. 初終哭泣, 葬則鼓 作樂以送之. 埋訖, 悉取死者生時服玩車馬置於墓側, 會葬者爭取而去. 敬鬼神, 多淫祠.

그 나라의 동서는 이천리이고 남북은 천여리 이며, 도읍은 '평양성'으로 또한 '장안성'이라 부른다. 동서가 육리이고 산을 따라 굽어 있으며, 남쪽으로는 '패수'에 접한다. 다시 '국내성'과 '한성'이 있는데, 이 두 도읍은 번화한 곳으로 그 나라에서는 '삼경'이라 부른다. '신라'와 매양 서로 침략하니 전쟁이 끊이질 않았다. 관직은 태대형, 대형, 소형, 대로, 의후사, 오절, 태대사자, 대사자, 소사자, 욕사, 예속, 선인등 십이등급이다. 다시 내평, 외평, 오부욕살이 있다. 사람들은 모두 가죽관을 쓰고, 벼슬아치들은 새 깃털을 꽂는다. 귀한자는 관을 자줏빛 비단으로 하고 금은으로 꾸민다. 옷은 소매가 큰 윗도리에 구멍이 큰 바지를 입고, 흰색으로 허리띠를 매고, 황색 가죽으로 신발을 신는다. 부인은 치마저고리에 선을 두른다. 병기는 중국과 같으며 매양 봄 가을로 사냥을 가르치는데, 왕이 친히 이를 내려 본다. 인세로는 베 오필, 곡물 오석이고 떠돌아 다니는 사람은 삼년에 한번 세를 내는데, 열사람이 모아서 세포 한필이다. 조세는 호당 일석이고 다음은 칠두, 다음은 오두이다. 반역한 자는 기둥에 묶어서 불살은 후에 목을 베고 그 가족도 모두 죽인다. 도적질하면, 열배로 갚고, 형벌이 엄하여 범하는 자가 드물다. 악기에는 오현·금·쟁·필률·횡취·소·고가 있고 노를 불어서 화답한다. 매년 초에 '패수'위에 모여서 왕이 수레위에서  대열을 지켜본다. 일을 마치면, 왕이 옷을 물속에 넣고 좌우로 두부로 나누어, 물에서 돌을 던지면서  떠들썩하게 고함치며 쫓고 쫓기기를 세 번한 후에 그친다. 풍속에 걸터 앉는 것을 좋아하고 깨끗함을 즐기며, 달음질 치는 것을 공격하며, 다리하나를 뻗어 절을 하고, 서있을 때는 두팔을 깍지끼고, 움질일때는 반드시 팔을 흔든다. 성품에 거짓으로 복속함이 많다. 부자가 같은 내에서 목욕을 하고, 같은 방에서 잠을 잔다. 부인은 음란하여 풍속에 노는 여자들이 많다. 결혼은 남녀가 서로 좋아해야 하고 그런후에야 결혼을 한다. 남자집에서 돼지고기와 술을 보내고, 재물없이 찾아가는 것이 예이다. 혹 재물을 받는 자는 사람들이 함께 이를 부끄러워 한다. 죽은 자는 집안에서 염을 하고 삼년후에 길일을 택하여 장사지낸다. 부모나 지아비의 상에는 복을 삼년간 입고 형제는 삼개월을 지낸다. 처음부터 끝까지 슬피 우는데, 장사를 지내때에 북치고 음악을 하여 춤추며 이를 보낸다.  이에 이르러 시신을 묻는데 모두 죽은자가 살아있을때의 옷이나 수레 말등을 묘의 곁에 두는데 장사지내는데 모였던 자들이 다투어 취한후에 간다. 귀신을 공경하고 음사가 많다.

<開皇>初, 頻有使入朝. 及平<陳>之後, <湯>大懼, 治兵積穀, 爲守拒之策. 十七年, 上賜<湯>璽書曰:
'개황'초에 빈번히 사신이 입조하였다. '진'의 평정이후 '탕'이 크게 두려워 하여 병사와 곡식을 준비하여 수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십칠년 임금이 '탕'에서 서를 내려 말하길
朕受天命, 愛育率土, 委王海隅, 宣揚朝化, 欲使圓首方足各遂其心. 王每遣使人, 歲常朝貢, 雖稱藩附, 誠節未盡. 王旣人臣, 須同朕德, 而乃驅逼<靺鞨>, 固禁<契丹>. 諸藩頓 , 爲我臣妾, 忿善人之慕義, 何毒害之情深乎? 太府工人, 其數不少, 王必須之, 自可聞奏. 昔年潛行財貨, 利動小人, 私將弩手逃竄下國. 豈非修理兵器, 意欲不臧, 恐有外聞, 故爲盜竊? 時命使者, 撫慰王藩, 本欲問彼人情, 敎彼政術. 王乃坐之空館, 嚴加防守, 使其閉目塞耳, 永無聞見. 有何陰惡, 弗欲人知, 禁制官司, 畏其訪察? 又數遣馬騎, 殺害邊人, 屢騁姦謀, 動作邪說, 心在不賓.

짐은 천명을 받들어 기르기를 좋아하고 선비를 이끌었다. 왕을 바다 한쪽에 위임하니 베풀어 조정에 화되어 천지의 도를 쫓는 마음을 얻고자 한다. 왕은 매양 사신을 보내어 해마다 조공하니 비록 변방이라 칭한다 하더라도 정성에는 다함이 없다. 왕은 이미 남의 신하로, 모름지기 짐의 덕과 한가지로 하여, 이에 '말갈'을 내몰고, '거란'에 대비하여야 한다. 여러 변방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나의 신하가 되는데, 선한사람들이 따르는 것을 분히 여기니 어찌 해치고자 하는 마음이 깊은가? 태부의 공인이 그 수가 적지 않으니, 왕은 반드시 아뢰어 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난해 비밀히 재화를 가지고, 소인이 이를 따라 움직여 사사로이 활쏘는 자가 하국으로 숨게 하니 어찌 병기를 고치어 올바르지 못한 뜻을 품고 밖의 소문을 두려워하니 도둑질을 하는 것이 아닌가?. 이제 사자에게 명을 내리어, 왕과 신하를 위무하고, 본래 사람의 뜻을 묻고자 하고, 정치와 기술을 가르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왕은 공허한 객사에 앉아 엄히 방비하고, 눈과 귀를 막고, 영원히 듣고, 보려 하지 않으니, 가히 악함이 있어 사람들이 아는 것을 막고, 관리를 제도함을 막아 살피는 것을 두려워 하는가? 또 수차례 기병을 보내어 변방을 약탈하고, 모략을 꾀하고 간사한 말을 퍼트리며, 마음이 온당치 못하다.
朕於蒼生悉如赤子, 賜王土宇, 授王官爵, 深恩殊澤, 彰著遐邇. 王專懷不信, 恒自猜疑, 常遣使人密 消息, 純臣之義豈若是也? 蓋當由朕訓導不明, 王之愆違, 一已寬恕, 今日以後, 必須改革. 守藩臣之節, 奉朝正之典, 自化爾藩, 勿 他國, 則長享富貴, 實稱朕心. 彼之一方, 雖地狹人少, 然普天之下, 皆爲朕臣. 今若黜王, 不可虛置, 終須更選官屬, 就彼安撫. 王若 心易行, 率由憲章, 卽是朕之良臣, 何勞別遣才彦也? 昔帝王作法, 仁信爲先, 有善必賞, 有惡必罰, 四海之內, 具聞朕旨. 王若無罪, 朕忽加兵, 自餘藩國謂朕何也! 王必虛心納朕此意, 愼勿疑惑, 更懷異圖.
짐은 모든 생명에 적자처럼 대하고, 왕에게 땅과 집을 주고, 관직과 작위를 주어 깊은 은혜로 윤택하게 하니 멀고 가까운 곳에서 분명하게 들어났다. 왕은 오로지 믿음을 품지 못하여 항상 시샘하고 의심하여 사신을 몰래 보내어 관찰하니, 순수한 신하의 뜻이 이와 같은 것인가? 이는 대개 짐의 가르침이 밝지 않아 왕이 죄를 어긴 것이니 한번 용서를 한다. 금일 이후로는 반드시 개혁하여 번신의 절도를 지키고, 조정의 법을 받들며, 스스로 신하가 되어 다른 나라를 거스리지 말면 곧 오래도록 부귀를 누릴 것이니 실로 짐의 마음이니라. 다른 나라들은 비록 땅이 좁고 사람이 적지만 널리 하늘아래에 있는 짐의 신하이니, 이제 만약 왕이 물리친다면, 가히 버려 둘수가 없어 끝내는 다시 관속을 뽑아 이들을 편안히 위무해야 한다. 왕이 맘을 씻고 바꾸어 법에 따르면 곧 짐의 좋은 신하아니 어찌 좋은 선비를 뽑아 보낼 필요가 있겠는가? 옛 제왕들이 법을 일으킬 때 어짐과 믿음을 먼저 하고 선함에는 받드시 상을 주고 악함에는 반드시 벌을 주니 사해의 안쪽이 짐의 뜻을 듣고자 한다. 만약 왕이 죄가 없는데도 짐이 홀연 병사를 낸다면 나머지 번국들이 짐을 어찌 여기겠는가? 왕은 반드시 마음을 비우고 짐의 이 뜻을 받들어 의심하지 말고, 다른 생각을 하지 말도록 하라.
往者<陳叔寶>代在<江>陰, 殘害人庶, 驚動我烽候, 抄掠我邊境. 朕前後誡 , 經歷十年, 彼則恃<長江>之外, 聚一隅之衆,  狂驕傲, 不從朕言. 故命將出師, 除彼凶逆, 來往不盈旬月, 兵騎不過數千. 歷代逋寇, 一朝淸蕩, 遐邇乂安, 人神胥悅. 聞王歎恨, 獨致悲傷, 黜陟幽明, 有司是職, 罪王不爲<陳>滅, 賞王不爲<陳>存, 樂禍好亂, 何爲爾也? 王謂<遼水>之廣何如<長江>? <高麗>之人多少<陳國>? 朕若不存含育, 責王前愆, 命一將軍, 何待多力! 慇懃曉示, 許王自新耳. 宜得朕懷, 自求多福.

옛날에 "진숙보"란 자가 대를 이어 "강음"에 있으면서 사람들을 죽이니 놀라 움직이니 내가 경계하자 내 변방을 노략질 하였다. 짐이 앞서 경계하고 뒤에서 위로하니 십년에 이르러 저들이 "장강"의 바깥임을 믿고 무리들을 모아 교만해져 미쳐 날뛰어 짐의 말을 따르지 않으니, 장수들에게 명하여 저들을 베니 가고 오는데 달이 차지 않았고 병사는 수천을 넘지 않았다. 도둑들이 번갈아 달아나고 하루 아침에 깨끗이 쓸어 멀고 가까운곳을 베어 편안히 하니 사람과 귀신이 모두 기뻐하였다. 이제 왕이 한함을 탄식하고 홀로 슬퍼하고 상심하는 것을 들으니 내쫓고 올려 서는 것은 관리가 맡아 할 일이다. 왕을 죄 준대도 "진"처럼 멸망시키지는 않을 것이요, 왕을 상 준대도 "진"처럼 두지는 못할 일이다. 그런데 화를 즐겨하고 어지러운 것을 좋아하다니 이 무슨 까닭인가?  왕이 일컷길 "요수"의 넓음이 "장강"만 한가? "고려" 사람의 많고 적음이 "진국"만 한가? 짐이 만일 백성을 기를 생각을 하지 않고, 왕의 전날 잘못만 책한다면 한 장군에 명하면 될 것인데 어찌 많은 힘이 필요하겠는가?. 짐이 이렇듯 은근하게 타일러서 왕이 마음을 새롭게 하기를 기다리는 것이니, 왕은 마땅히 짐의 마음을 알아서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도록 하라 했다
<湯>得書惶恐, 將奉表陳謝, 會病卒. 子<元>嗣立. <高祖>使使拜<元>爲上開府·儀同三司, 襲爵<遼東郡公>, 賜衣一襲. <元>奉表謝恩, 幷賀祥瑞, 因請封王. <高祖>優冊<元>爲王.

"탕"이 서를 받고 두려워 하여, 표를 받들어 사죄하고, 병이 들어 죽었다. 아들 "원"이 이어 섰다. "고조"가 사신을 보내어 "원"을 상개부 의동삼사로 삼고, 요동군공을 봉하고, 옷을 하사하였다. "원"이 표를 받들어 은혜에 감사하고, 이 일을 치하하고, 아울러 왕으로 봉해주기를 청하였다. "고조"가 이에 "원'을 왕으로 봉하였다.
明年, <元>率<靺鞨>之衆萬餘騎寇<遼西>, <營州>總管<韋沖>擊走之. <高祖>聞而大怒, 命<漢王><諒>爲元帥, 總水陸討之, 下詔黜其爵位. 時 運不繼, 六軍乏食, 師出<臨 關>, 復遇疾疫, 王師不振. 及次<遼水>, <元>亦惶懼, 遣使謝罪, 上表稱[<遼東>糞土臣<元>]云云. 上於是罷兵, 待之如初, <元>亦歲遣朝貢.

다음해 "원'이 "말갈" 만여기병을 이끌고, "요서"를 침범하자, "영주"총관 "위충"이 맞서니 도망하였다. "고종"이 이를 듣고, 크게 노하여 "한왕" "량"을 원사로 명하여 수군과 육군으로 정벌하고 그 작위를 취소하였다. 이때에 흉년이 들어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하여 여섯군이 밥을 굶고, "임해관"에 이르렀을 때 질병이 돌아 왕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였다. "요수"에 이르자, "원"이 역시 두려워 하여 사신을 보내어 죄를 빌며, 표를 보내기를 "요동"의 똥같은 신 "원"이라 말하였다. 임금이 이에 병사를 그치고, 처음과 같이 하니, "원"이 해마다 조공하였다.
<煬帝>嗣位, 天下全盛, <高昌王>·<突厥><啓人可汗> 親詣闕貢獻, 於是徵<元>入朝. <元>懼, 藩禮頗闕. <大業>七年, 帝將討元之罪, 車駕渡<遼水>, 上營於<遼東城>, 分道出師, 各頓兵於其城下. <高麗>率兵出拒, 戰多不利, 於是皆 城固守. 帝令諸軍攻之, 又 諸將: [<高麗>若降者, 卽宜撫納, 不得縱兵.] 城將陷, 賊輒言請降, 諸將奉旨不敢赴機, 先令馳奏. 比報至, 賊守禦亦備, 隨出拒戰. 如此者再三, 帝不悟. 由是食盡師老, 轉輸不繼, 諸軍多敗績, 於是班師. 是行也, 唯於<遼水>西拔賊<武 邏>, 置<遼東郡>及<通定鎭>而還.

"양제"가 즉위하자 천하의 전성기다. "고창왕", "돌궐"의 "계인가한"이 함께 대궐에 이르러 공물을 받쳤다. 이에 "원"도 입조하라 하였는데, "원"이 두려워하여 대궐의 예를 어기었다. "대업"칠년 제가 장차 "원"의 죄를 벌하려고 하여, 수레에 올라 "요수"를 건너, "요동성"에서 길을 나누어 나아가자 각각 병사들이 그 성아래에 모였다. "고려"도 병사를 이끌고 방어 하였는데, 전쟁에 불리하자, 성을 둘러싸고 굳게 지키었다. 제가 여러 군에 공격하길 명하고, 장수들에게 말하길 "고려"가 만약 항복하려고 하면, 곧 어루만져 병사를 이끌고 얻으려 하지 말라 하였다. 성이 장차 함락되려 하자 적은 거짓 항복을 청하고, 장수들은 표를 받들어 감히 나아가지 못하고, 먼저 아뢰었다. 이 보고가 이르르자. 적은 다시 준비하여 수비하였다. 이와 같음을 여러번 했으나, 제가 깨닫지 못하였다. 식량이 다되고, 병사들이 쇠하여 지고, 보급이 이어지지 못하며, 군사들이 많이 손상되어, 반밖에 안 남았다. 이렇게 하여 요수의 서쪽인 "무려라"만 빼앗고, "요동군" "통영진"을 설치하고 돌아왔다.
九年, 帝復親征之, 乃 諸軍以便宜從事. 諸將分道攻城, 賊勢日蹙. 會<楊玄感>作亂, 反書至, 帝大懼, 卽日六軍 還. 兵部侍郞<斛斯政>亡入<高麗>, <高麗>具知事實, 悉銳來追, 殿軍多敗. 十年, 又發天下兵, 會盜賊蜂起, 人多流亡, 所在阻絶, 軍多失期. 至<遼水>, <高麗>亦困弊, 遣使乞降, 囚送<斛斯政>以贖罪. 帝許之, 頓於<懷遠鎭>, 受其降款. 仍以 囚軍實歸. 至京師, 以<高麗>使者親告於太廟, 因拘留之. 仍徵<元>入朝, <元>竟不至. 帝 諸軍嚴裝, 更圖後擧, 會天下大亂, 遂不克復行.

구년 제가 다시 친히 정벌하여 군사들에게 명하니 마땅히 따랗다. 여러 장수들이 길을 나누어 성을 공격하니 적의 기세가 사그라진 듯 했다. "양현감"이 난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이르자 제가 크게 두려워 하여 그날 여섯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병부시랑 "곡사정"이 "고려"에 항복하니, "고려"가 이 사실을 알고, 모든 군대로 뒤 쫓으니, 제의 군대가 많이 패하였다. 십년 또 병사를 일으켰으나 도적들이 일어나 사람들이 흩어지고 길이 끊어져 군사들을 많이 잃어 버렸다. "요수"에 이르렀는데 "고려" 또한 곤궁하여, 사신을 보내어 항복을 청하며, 죄인 "곡사정"을 보내면서 죄를 속죄하였다. 제가 이를 허락하여, "회원진"에서 그 항복을 받았다. 인하여 포로를 돌려 보내었다. 서울에 이르러 "고려"가 사신을 보내어 조정에 고하니 이에 잡아두어 머물게 하고, "원"을 입조하라 불렀지만, "원"은 끝내 가지 않았다. 제께서 군사들을 독려하여 엄히 다시 일어날 것을 꾀하자 천하에 큰 난이 일어가 다시 가지 못하였다.

百濟 (백제 )
<百濟>之先, 出自<高麗國>. 其國王有一侍婢, 忽懷孕, 王欲殺之. 婢云: [有物狀如 子, 來感於我, 故有娠也.] 王捨之. 後遂生一男, 棄之  , 久而不死, 以爲神, 命養之, 名曰<東明>. 及長, <高麗>王忌之, <東明>懼, 逃至<淹水>, <夫餘>人共奉之. <東明>之後, 有<仇台>者, 篤於仁信, 始立其國于<帶方>故地. <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 漸以昌盛, 爲東夷强國. 初以百家濟海, 因號<百濟>. 歷十餘代, 代臣中國, 前史載之詳矣. <開皇>初, 其王<餘昌>遣使貢方物, 拜<昌>爲上開府·<帶方郡公>·<百濟王>.

'백제'의 선조는 '고려국'에서 나왔다. 그 나라의 왕에게 여자시종이 한명 있었는데, 갑자기 아이를 배니 왕이 이를 죽이고자 하였다. 여자종이 말하길, 달걀같은 상태의 형상이 있었는데, 나에게 와서 고로 임신하게 되었다. 왕이 이를 내버려 두니, 후에 남자아이를 하나 낳으니, 뒷간 구석에 이를 버렸으나, 오래도록 죽지 않고, 신령스러움이 아이를 길르니, 이름이 '동명'이었다. 자라남에, '고려'왕이 이를 꺼리자, 동명이 두려워하여, 달아나 '엄수'에 이르르니, '부여'사람들이 함께 이를 받들었다. '동명'의 후손중에 '구태'가 있는데, 인자하고, 믿음이 있어 처음 나라를 '대방'의 옛땅에 세웠다. '한''요동 태수 공손도'의 여자를 처로 하고, 점점 창성해지더니,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 처음 백개의 집이 바다를 건너지 인하여 '백제'라 불렀다. 십여대를 지나면서 중국의 신하가 되었는데, 앞의 역사는 자세하지 않다. '개황'초에 그 왕 '여창'이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받치자, '창'을 상개부 '대방군공 백제왕'을 내리었다.
其國東西四百五十里, 南北九百餘里, 南接<新羅>, 北拒<高麗>. 其都曰<居拔城>. 官有十六品: 長曰左平,/$《通典》一八五作[左率].$/ 次大率, 次恩率, 次德率, 次 率, 次奈率, 次將德, 服紫帶; 次施德,  帶; 次固德, 赤帶; 次李德,/$《北史》《百濟傳》作[季德].$/ 靑帶; 次對德以下, 皆黃帶; 次文督,/$《北史》《百濟傳》, [皆黃帶]在[次文督]下.$/ 次武督, 次佐軍, 次振武, 次剋虞, 皆用白帶. 其冠制 同, 唯奈率以上飾以銀花. 長史三年一交代. 畿內爲五部, 部有五巷, 士人居焉. 五方各有方領一人, 方佐貳之. 方有十郡, 郡有將. 其人雜有<新羅>·<高麗>·<倭>等,/$[倭]原作[ ]. 按: 古從[委]和從[妥]的字, 有時可以通用. 如[ ]或作[ ], [ ]或作[綏]. [ ]應是[倭]字的別體. 本書《煬帝紀》上作[倭]. 本卷和他處作[ ]者, 今一律改爲[倭].$/ 亦有中國人. 其衣服與<高麗>略同. 婦人不加粉黛, 女 髮垂後, 已出嫁則分爲兩道, 盤於頭上. 俗尙騎射, 讀書史, 能吏事, 亦知醫藥·蓍龜·占相之術. 以兩手據地爲敬. 有僧尼, 多寺塔. 有鼓角·  ·箏· · ·笛之樂, 投壺·圍 ·樗蒲·握 ·弄珠之戱. 行<宋>《元嘉曆》, 以建寅月爲歲首. 國中大姓有八族, <沙氏>·<燕氏>·<協氏>·<解氏>·<貞氏>·<國氏>·<木氏>·< 氏>./$[ ]原作[苗], 據《通典》一八五改.$/ 婚娶之禮, 略同於華. 喪制如<高麗>. 有五穀·牛·猪· , 多不火食. 厥田下濕, 人皆山居. 有巨栗. 每以四仲之月, 王祭天及五帝之神. 立其始祖<仇台>廟於國城, 歲四祠之. 國西南人島居者十五所, 皆有城邑.

그 나라는 동서가 사백오십리이고 남북이 구백여리이다. 남쪽은 신라에 접하고, 북쪽으로는 '고려'를 막고 있다. 그 도읍을 '거발성'이라 한다. 관직에는 십육품이 있는데, 최고는 좌평이라 하고, 다음은 대솔, 은솔, 덕솔, 우솔, 내솔, 장덕인데, 자색 띠를 메고, 다음은 시덕으로 검은색띠를 다음은 고덕으로 붉은띠를 다음은 이덕으로 청색띠 다음은 대덕이하로, 모두 황색띠를 하는데, 문독 무독 좌군, 진무, 극우는 백색띠를 맨다. 관은 모두 같은데, 오직 내솔 이상은 은으로 꽃을 만들어 꾸민다. 장사는 삼년에 한번씩 교대로 한다. 경기(수도에서 5백리 안)에는 다섯 개의 부가 있고, 부에는 다섯 개의 항이 있어, 사람들이 거한다. 오방에는 각각 방령이 한명씩 있고, 방좌가 두명이 있다. 방에는 열 개의 군이 있고, 군에는 장이 있다. 사람들은 신라, 고려, 왜등과 섞여 사는데, 중국인들도 있다. 의복은 '고려'와 같음이 있다. 부인은 화장을 하지 않고, 여자들은 머리를 뒤로 드리우고, 시집을 하면, 가리마를 타서 머리위에서, 묶는다. 풍속에 기사를 숭상하며, 글과 역사를 읽고, 벼슬아치가 있다. 또한 의약을 알고, 거북점과 점치는 법을 알고 있다. 두손을 땅에 대는 것으로 공경함을 표시하고, 승려와 비구니가 있고, 절과 탑이 많다. 고각·공후·쟁·우·호·적의 등의 악기가 있고, 투호·위기·저포·악삭·농주 등의 놀이가 있다. 송의 '원가력'을 사용하여 인월을 세수로 삼는다. 나라에 큰 성씨인 여덟족속이 있는데, 사씨, 연씨, 협씨, 해씨, 정씨, 국씨, 목씨, 백씨 이다.결혼하는 예의는 중국과 같고, 상을 당한 제도는 고려와 같다. 오곡과 소, 돼지, 닭이 있으며, 화식을 많이 하지는 않는다. 밭 아래는 습하여 사람들은 모두 산에 거한다. 큰 밤이 나오고, 매 사중월 마다 왕이 하늘과 오제의 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그 시조 '구태'의 사당을 나라의 성에 지어 해마다 네 번 절한다. 나라의 서쪽과 남쪽의 사람들은 열다섯개의 섬에 거하는데, 모두 성읍이 있다.
平<陳>之歲, 有一戰船漂至海東<?牟羅國>, 其船得還, 經于<百濟>, <昌>資送之甚厚, 幷遣使奉表賀平<陳>. <高祖>善之, 下詔曰: [<百濟王>旣聞平<陳>, 遠令奉表, 往復至難, 若逢風浪, 便致傷損. <百濟王>心迹淳至, 朕已委知. 相去雖遠, 事同言面, 何必數遣使來相體悉. 自今以後, 不須年別入貢, 朕亦不遣使往, 王宜知之.] 使者舞蹈而去.

'진'이 세상을 평정한 해에 전선 한척이 떠돌다 바다의 동쪽 '담모라국'에 이르렀는데, 거기에서 배를 얻어 돌아왔는데, 백제를 거치자, '창'이 재물을 후이 보내오며, 아울러 사신을 보내어, 표를 받들고 '진'이 평정함을 축하였다. '고조'가 이를 착하게 여기어, 조서를 내려 말하길, 백제왕이 이미 '진'이 평정했음을 듣고, 먼 곳에서 표를 받들었다. 오고감에 어려움이 있고, 만약 풍랑을 만나면, 다치기도 할 것이다. 백제왕의 마음이 순박함은 이미 짐이 알고 있다. 서로 가는데 멀어 어려움이 있으나, 꾀하는 일이 같고, 말하는 것도 같으니, 어찌 반드시 수차례 사신을 보낼 필요가 있겠는가. 스스로 이 후부터는 모름지기 해마다 입공하지 않아도 되니, 짐도 역시 사신을 보내지 않을 것이니 왕이 마땅히 이를 알 지어다. 하니, 사신이 춤을 추고, 돌아 갔다.
<開皇>十八年, <昌>使其長史<王辯那>來獻方物, 屬興<遼東>之役, 遣使奉表, 請爲軍導. 帝下詔曰: [往歲爲<高麗>不供職貢, 無人臣禮, 故命將討之. <高元>君臣恐懼, 畏服歸罪, 朕已赦之, 不可致伐.] 厚其使而遣之. <高麗>頗知其事, 以兵侵掠其境.

'개황' 십팔년에 '창'이 사신 장사 '왕변나'를 보내어 방물을 받치고, "요동"에서의 전쟁을 일으킨 것에 대해 사신을 보내어 표를 받들고, 군대를 이끌기를 청하였다. 제께서 조서를 내려 말하길, 지난해에 "고려"가 신하로써 공손하지 않고, 신하로써 예가 없어, 이를 벌하게 되었다. "고원"이 두려워하여 복종하여 죄를 돌이키니, 짐이 이를 용서하였다. 정벌하진 않을 것이다. 하고 신하를 후이 대하고 이를 보내었다. "고려"가 이일을 알고 병사로 변방을 침범하였다.
<昌>死, 子<餘宣>立, 死, 子<餘璋>立.
"창"이 죽고 아들 "여선"이 섰다. "여선"이 죽고, 아들 "여장"이 섰다.
<大業>三年, <璋>遣使者<燕文進>朝貢. 其年, 又遣使者<王孝 >入獻, 請討<高麗>. <煬帝>許之, 令 <高麗>動靜. 然<璋>內與<高麗>通和, 挾詐以窺中國. 七年, 帝親征<高麗>, <璋>使其臣<國智牟>來請軍期. 帝大悅, 厚加賞錫, 遣尙書起部郞<席律>詣<百濟>, 與相知. 明年, 六軍渡<遼>, <璋>亦嚴兵於境, 聲言助軍, 實持兩端. 尋與<新羅>有隙, 每相戰爭. 十年, 復遣使朝貢. 後天下亂, 使命遂絶.

"대업" 삼년, "장"이 사신 "연문진"을 보내어 조공을 하였다. 그해 또 사신 "왕효린"을 보내어 입조하고, "고려"를 벌할 것을 청하였다. "탕제"가 이를 허락하여 "고려"의 동정을 살피기를 명하였다. 그리하여 "장"이 "고려"와 화통하며 협작하여 중국에 엿보았다. 칠년 제가 "고려"를 친히 정벌하자 "장"이 신하 "국지모"를 보내어 군약을 청하였다. 제가 크게 기뻐하고, 후이 상을 내리었다. 상서기부랑 "석률"을 보내어 "백제"에 이르러 서로 앎으로 무리가 되었다. 다음해 여섯군이 "요"를 건너고, "장"이 역시 군사를 변방에 두고 돕겠다 하였으나 실제는 양단책이었다. "신라"와 사이가 있음에 매양 전쟁을 하였다. 십년 다시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후에 천하에 난이 있자 사신이 끊어졌다.
其南海行三月, 有< 牟羅國>, 南北千餘里, 東西數百里, 土多 鹿, 附庸於<百濟>. <百濟>自西行三日, 至<貊國>云.

그 남쪽 바다로 삼개월을 가면, "?모라국"이 있는데, 남북이 천여리이고, 동서가 수백리이다. 땅에는 노루와 사슴이 많고, 백제에 의지한다. "백제"에서 서쪽으로 삼일을 가면 "맥국"에 이른다.

新羅國 (신라국)
<新羅國>, 在<高麗>東南, 居<漢>時<樂浪>之地, 或稱<斯羅>. <魏>將< 丘儉>討<高麗>, 破之, 奔<沃沮>. 其後復歸故國, 留者遂爲<新羅>焉. 故其人雜有華夏·<高麗>·<百濟>之屬, 兼有<沃沮>·<不耐>·<韓>·< >之地. 其王本<百濟>人, 自海逃入<新羅>, 遂王其國. 傳祚至<金眞平>, <開皇>十四年, 遣使貢方物. <高祖>拜<眞平>爲上開府·<樂浪郡公>·<新羅王>. 其先附庸於<百濟>, 後因<百濟>征<高麗>, <高麗>人不堪戎役, 相率歸之, 遂致强盛, 因襲<百濟>附庸於<迦羅國>./$《通典》一八五作[因襲<加羅>·<任那>諸國滅之.] 據《三國史記》, 有<金官>·<古寧>諸<加邪國>, 均爲<新羅>所倂, 疑[於]字是[諸]字之訛.$/

"신라국"은 "고려"의 동남쪽에 있고, "한"나라 때의 "낙랑"땅이다. 혹은 "사라"라고 한다. "위"나라 장수 "관구검"이 고려를 정벌하고, 깨지자 "옥저"로 달아났다. 그 후에 다시 옛땅에 돌아왔는데 남아있는 자들이 "신라"가 되었다. 옛부터 그 사람들은 "화하"와 "고려", "백제"에 섞여 있었는데 "옥저", "불내",, "한", "예"의 땅에 겸해 있는 것이다. 그 왕은 본래 "백제"사람으로 바다를 건너 도망와 "신라"에 이르러 그나라의 왕이 되었다. 전하여 "김진평"에 이르러, "개황" 십사년에 사신을 보내와 방물을 받쳤다. "고조"가 "진평"을 상개부 낙랑군공 신라왕을 내리었다. 먼저 "백제"에 의지하다가 후에 "백제"가 "고려"를 정벌하자 "고려"인들이 그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고, 서로가 돌아갔는데, 후에 강성해저서 백제를 습격하자 "가라국"에 의지하였다.
其官有十七等:  其一曰伊罰干, 貴如相國;  次伊尺干, 次迎干, 次破彌干, 次大阿尺干, 次阿尺干, 次乙吉干, 次沙 干, 次及伏干, 次大奈摩干, 次奈摩, 次大舍, 次小舍, 次吉土,/$《三國史記》三八作[吉士].$/ 次大烏, 次小烏, 次造位. 外有郡縣. 其文字·甲兵同於中國. 選人壯健者悉入軍, 烽·戍·邏俱有屯管部伍./$《通典》一八五, [管]作[營].$/ 風俗·刑政·衣服, 略與<高麗>·<百濟>同. 每正月旦相賀, 王設宴會, 班賚 官. 其日拜日月神. 至八月十五日, 設樂, 令官人射, 賞以馬布. 其有大事, 則聚 官詳議而定之. 服色尙素. 婦人 髮繞頭, 以雜綵及珠爲飾. 婚嫁之禮, 唯酒食而已, 輕重隨貧富. 新婚之夕, 女先拜舅姑, 次卽拜夫. 死有棺斂, 葬起墳陵. 王及父母妻子喪, 持服一年. 田甚良沃, 水陸兼種. 其五穀·果菜·鳥獸物産, 略與華同. <大業>以來, 歲遣朝貢. <新羅>地多山險, 雖與<百濟>構隙, <百濟>亦不能圖之.

그 관직에는 십칠등급이 있는데, 첫째를 이벌간이라 하는데 재상과 같은 것이고, 다음은 이척간, 영간, 파미간, 대아척간, 아척간, 을길간, 사돌간, 급복간, 대나마간, 나마, 대사, 소사, 길토, 대오, 소오, 조위 이다. 밖으로는 군현이 있고, 문자와 병사는 중국과 같다. 씩씩하고 건강한 자로 군사를 가려 뽑고, 봉화와 수비책으로 순시하고 관부에 진을 치고 있다. 풍속과 형벌 의복은 고려와 백제와 같은이 있다. 매양 정월 초하루에는 서로 축하하고, 왕은 주연을 베풀며, 벼슬아치들을 위로한다. 그날은 일월신에게 절한다. 팔월십오일에는 음악을 하고, 관인들은 활을쏘는데 상으로 말과 포를 준다. 큰 일이 생기면 벼슬아치들이 모여 의논하여 정한다. 복색은 흰색을 숭상하고 부인들은 머리카락을 땋아 머리에 두르고, 비단과 구슬로 꾸민다. 혼인의 예는 술과 음식을 베푸는데, 크고 작음에는 빈부의 차이가 있다. 신혼첫날밤에 여자가 먼저 시아비와 시어미에 먼저 절하고 난후에 지아비에게 절한다. 죽으면, 염하여 관에 넣고, 장사지내는데는 봉분을 한다. 왕이나 부모 처자의 상에는 일년간 복을 입는다. 밭은 좋아, 물과 뭍의 씨를 모두 뿌릴수 있다. 오곡과 과실, 채소, 새나 짐승 물산등은 중국과 같다. "대업"때에 와서 해마다 조공을 하였다. 신라땅은 산이 많고 험하여 비록 "백제"와 사이가 벌어졌어도, "백제"는 제도하질 못하였다.

靺鞨 (말갈)
<靺鞨>, 在<高麗>之北, 邑落俱有酋長, 不相總一. 凡有七種: 其一號<粟末部>,/$原作[栗未], 據《冊府》九五六·《新唐書》[黑水渤海靺鞨傳]·《通鑑》<武德>四年<胡>注改. 下同.$/ 與高麗相接, 勝兵數千, 多驍武, 每寇<高麗>中. 其二曰<伯 部>, 在<粟末>之北, 勝兵七千. 其三曰<安車骨部>, 在<伯 >東北. 其四曰<拂涅部>, 在<伯 >東. 其五曰<號室部>, 在<拂涅>東. 其六曰<黑水部>, 在<安車骨>西北. 其七曰<白山部>, 在<粟末>東南. 勝兵 不過三千, 而<黑水部>尤爲勁健. 自<拂涅>以東, 矢皆石鏃, 卽古之<肅愼氏>也. 所居多依山水, 渠帥曰大莫弗瞞 , 東夷中爲强國. 有<徒太山>者, 俗甚敬畏, 上有熊 豹狼, 皆不害人, 人亦不敢殺. 地卑濕, 築土如堤, 鑿穴以居, 開口向上, 以梯出入. 相與偶耕, 土多粟麥 . 水氣鹹, 生鹽於木皮之上. 其畜多猪. 嚼米爲酒, 飮之亦醉. 婦人服布, 男子衣猪狗皮. 俗以溺洗手面, 於諸夷最爲不潔. 其俗淫而妬, 其妻外 , 人有告其夫者, 夫輒殺妻, 殺而後悔, 必殺告者, 由是姦 之事終不發揚. 人皆射獵爲業, 角弓長三尺, 箭長尺有二寸. 常以七八月造毒藥, 傅矢以射禽獸, 中者立死.
"말갈"은 "고려"의 북쪽에 있다. 읍락에는 추장이 있고, 서로 하나로 통합되지 못하였다. 무릇 일곱 종족이 있는데, "속말부"는 고려와 서로 접해있고, 병사는 수천이고, 날래고 굳세며 매양 "고려"를 침략한다. "백돌부"는 "속말"의 북쪽에 있는데, 병사 칠천이다. "안차골부"는 "백돌"의 동북쪽에 있고, "불열부"는 "백돌"의 동쪽에 있다. "호실부"는 "불열"의 동쪽에 있고, "흑수부"는 "안차골"의 서북쪽에 있다. "백산부"는 "속말"의 동남쪽에 있다. 병사는 모두 합쳐 3천을 넘지 않고, "흑수부"는 특히 강하다. "불열"의 동쪽은 모두 돌화살촉을 쓰는데, 즉 옛날 "숙신씨"이다. 거하는 곳은 산과 물에 의지하고 거수는 대막불만돌이라 부르는데 동이중에서 강국이다. "도태산"이라는 것이 있어 풍속에서 두렵고 공경하는데, 꼭대기에 곰과 표범 이리등이 있어 모두 사람을 해치지 않고, 사람도 역시 감히 죽이지 못한다. 땅은 낮고, 습하여 흙은 높게 쌓고 구멍을 뚫어 거한며, 위쪽으로 구멍을 내어 사디리로 출입을 한다. 서로 밭을 갈아 조와 보리 기자을 가꾸고, 물에 염분이 있어 소금을 나뭇가지 위에서 얻는다. 가축에는 돼지가 많고 쌀을 씹어 술을 빗고, 이를 마시면 취하게 된다. 부인은 베로 옷을 입고, 남자는 돼지나 개가죽으로 옷을 입는다. 풍속에 물에 빠져서 손과 얼굴을 씻는데 여러 이족중에서 가장 불결하다. 풍속이 음란함과 시세움이 있어 그 처가 간음을 하면 사람들이 그 남편에게 고하면 남편이 처를 죽이고 죽인 것을 후회하면 그 알린자도 죽인다. 음탕하고 간사함은 끝까지 그냥 잊지 않는다. 사람들은 모두 사냥을 업으로 하고, 각궁은 길이가 삼척이고 화살은 길이가 일척 이촌이다. 항시 칠팔월에 독약을 만들어 화살에 발라 사냥을 하고 보통사람은 선채로 죽는다.
<開皇>初, 相率遣使貢獻. <高祖>詔其使曰: [朕聞彼土人庶多能勇捷, 今來相見, 實副朕懷. 朕視爾等如子, 爾等宜敬朕如父.] 對曰: [臣等僻處一方, 道路悠遠, 聞內國有聖人, 故來朝拜. 旣蒙勞賜, 親奉聖顔, 下情不勝歡喜, 願得長爲奴僕也.] 其國西北與<契丹>相接, 每相劫掠. 後因其使來, <高祖>誡之曰: [我憐念<契丹>與爾無異, 宜各守土境, 豈不安樂? 何爲輒相攻擊, 甚乖我意!] 使者謝罪. <高祖>因厚勞之, 令宴飮於前. 使者與其徒皆起舞, 其曲折多戰鬪之容. 上顧謂侍臣曰: [天地間乃有此物, 常作用兵意, 何其甚也!] 然其國與<隋>懸隔, 唯<粟末>·<白山>爲近.

"개황"초에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받치고, "고조"가 그사신에게 고하여 말하길, 짐이 듣기를 서 사람들은 용감하여 전쟁에 능하다 하니 이제 와서 서로 보는군나. 짐을 따르기를 생각하니 짐은 당신을 아들로 여길것이니 당신등은 마땅히 짐을 아버지로써 공경해야 할 것이다. 이에 대답하여 말하길 신등은 한쪽 구석 후미진 곳에 잇으니 도로가 멀지만 내국에 성인이 있음을 들어 고로 조알아고 절하러 왔습니다. 이제 성은을 입어 친히 성안을 받드니 정을 내리니 이보다 기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원하옵기오는 노비로 삼아 주시옵소서. 하였다. 그 나라는 서북은 "거란"과 접해 있고 매양 서로 위혀밯여 노략질 하였다. 후에 이로 인해 사신을 보내니 "고조"가 경계하여 말하길 나는 거란과 함께 당신들을 다름없이 어여삐 여기고 있으니 마땅히 각각 지경을 지켜지어 안락함을 지키지 아니하는가? 항상 서로 공격하여 짐의 뜻을 어기는가! 사신을 죄를 빌었다. "고조"가 인하여 그 노고를 후이하고 연회를 열었다. 사자가 모두 무리지어 춤을 추는데 그 꺽어짐이 전쟁하는 모습과 같았다. 임금을 보고 신하가 말하길 천지간에는 이와 같은 것도 있습니다 항상 병의를 품고 있으니 어찌 심하지 않겠습니까. 연후에 그나라는 "수"와 멀어지게 되고, 오직 "속말"과 "백산"만이 가까웠다.

<煬帝>初與<高麗>戰, 頻敗其衆, 渠帥<度地稽>率其部來降. 拜爲右光祿大夫, 居之<柳城>, 與邊人來往. 悅中國風俗, 請被冠帶, 帝嘉之, 賜以錦綺而褒寵之. 及<遼東>之役, <度地稽>率其徒以從, 每有戰功, 賞賜優厚. 十三年, 從帝幸<江都>, 尋放歸<柳城>. 在塗遇<李密>之亂, <密>遣兵邀之, 前後十餘戰, 僅而得免. 至<高陽>, 復沒於<王須拔>. 未幾, 遁歸<羅藝>.

"양제"초에 "고려"와 전쟁을 하는데, 빈번히 그 무리가 깨지자, 거수 "도지계"가 그 부락을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였다. 우광록대부에 봉하였다. "유성"에 거하니 변방인들과 왕래하였다. 중국의 풍속에 따르며, 옷과 관과 대를 청하자 제가 이를 기뻐하며 비단옷을 내리었다. "요동"의 전투에 이르자 "도지계"가 그 무리를 이끌고 와서 매양 전공이 있어 후하게 상을 내리었다. 십삼년 제를 쫓아 "강도"로 나아갔다가 "유성"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이밀"의 난이 있어, "밀"이 병사를 보내어 맞닥트려 전후 십여회의 전투를 하고 겨우 면하였다. "고양"에 이르러 "왕수발"에 의해 다시 몰살당하였다. 말년에 "라예"로 도망갔다.
 倭國 (왜국)
<倭國>, 在<百濟>·<新羅>東南, 水陸三千里, 於大海之中依山島而居. <魏>時, 譯通中國. 三十餘國, 皆自稱王. 夷人不知里數, 但計以日. 其國境東西五月行, 南北三月行, 各至於海. 其地勢東高西下. 都於<邪靡堆>, 則《魏志》所謂<邪馬臺>者也. 古云去<樂浪郡>境及<帶方郡> 一萬二千里, 在<會稽>之東, 與< 耳>相近. <漢><光武>時, 遣使入朝, 自稱大夫. <安帝>時, 又遣使朝貢, 謂之<倭奴國>. <桓>·<靈>之間, 其國大亂, 遞相攻伐, 歷年無主. 有女子名<卑彌呼>, 能以鬼道惑衆, 於是國人共立爲王. 有男弟, 佐<卑彌>理國. 其王有侍婢千人, 罕有見其面者, 唯有男子二人給王飮食, 通傳言語. 其王有宮室樓觀, 城柵皆持兵守衛, 爲法甚嚴. 自<魏>至于<齊>·<梁>, 代與中國相通.

왜국은 백제와 신라의 동남쪽에 있다. 수륙으로 삼천리 이다. 큰 바다 가운데의 섬에 의거하여 산다. '위'나라 때에 중국와 통하였다. 삼십여개의 나라가 있는데, 모두 왕이라 칭하였다. 이족들은 리의 개념을 알지 못하니 단지 일수로 계산한다. 그 나라는 동서가 5개월이 걸리고 남북은 삼개월이 걸리며, 각각 바다에 이른다. 그 땅은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다, 도읍은 "사미퇴"이니 곧 "위지"에서는 곧 "사마대"라고 한다. 옛말에 이르기를 "낙랑군"이나 "대방군"에서 일만 이천리요 "회계"의 동쪽에 있어, "담이"와 서로 가깝다. "한 광무"때에 사신을 보내어 입조하고 스스로 대부를 칭하였다. '안제'때에 또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치고 '왜노국'이라 하였다. '환''영'사이에 그나라에 큰 난이 일어나 서로 공격하니, 해를 지내도 주인이 없었다. '비미호'라는 여자가 잇어 능히 신비한 능력으로 무리를 현혹하니 그 나라 사람들이 함께 왕으로 삼았다. 남자 동생이 있어 '비미'를 도와 나라를 다스렸다. 그 왕은 시녀가 천명이나 있는데, 그 얼굴을 본 사람은 드물고, 오직 남자 두명만이 왕에게 음식을 나르고, 말을 전한다. 그 왕의 궁실에는 누각이 있고 성책에는 지키는 병사들이 있다. 법은 심히 엄하고 스스로 '위''제''양'에 이르기까지 대를 이어 중국과 통하였다.
<開皇>二十年, <倭王>姓<阿每>, 字<多利思比孤>,/$[比]原作[北], 據《北史》[倭國傳]·《通典》一八五·《通鑑》<大業>四年改. 下同.$/ 號阿輩 彌, 遣使詣闕. 上令所司訪其風俗. 使者言倭王以天爲兄, 以日爲弟, 天未明時出聽政, 跏趺坐, 日出便停理務, 云委我弟. <高祖>曰: [此太無義理.] 於是訓令改之. 王妻號 彌, 後宮有女六七百人. 名太子爲利歌彌多弗利. 無城郭. 內官有十二等: 一曰大德, 次小德, 次大仁, 次小仁, 次大義, 次小義, 次大禮, 次小禮, 次大智, 次小智, 次大信, 次小信, 員無定數. 有軍尼一百二十人, 猶中國牧宰. 八十戶置一伊尼翼, 如今里長也. 十伊尼翼屬一軍尼. 其服飾, 男子衣裙 , 其袖微小, 履如 形, 漆其上, 繫之於脚. 人庶多跣足. 不得用金銀爲飾. 故時衣橫幅, 結束相連而無縫. 頭亦無冠, 但垂髮於兩耳上. 至<隋>, 其王始制冠, 以錦綵爲之, 以金銀鏤花爲飾. 婦人束髮於後, 亦衣裙 , 裳皆有 .  竹爲梳, 編草爲薦, 雜皮爲表, 緣以文皮. 有弓·矢·刀· ·弩· ·斧, 漆皮爲甲, 骨爲矢鏑. 雖有兵, 無征戰. 其王朝會, 必陳設儀仗, 奏其國樂. 戶可十萬.

'개황' 이십년 '왜왕'의 성은 '아매'이고 이름은 "다리사비고"이며, '아배계미'라 부르는데, 사신을 보내어 궐에 이르렀다. 임금이 그 벼슬아치에게 풍속을 물었다. 사신이란 자가 왜왕은 하늘을 형으로 삼고, 태양을 아우로 삼으며, 새벽에 나타나 정사를 듣고, 가부좌 하여 해가 뜨면 일에 힘쓰고 아우에게 이른다고 말하자 "고조"가 말하길 이것은 크게 의리가 없다 하고 이 훈계를 고치라 명하였다. 왕의 처는 '계미'라 부르고, 후궁은 여자가 육칠백명이 있다. 태자의 이름은 "이가미다불리"라 부른다. 성곽은 없고, 내궁은 열두개가 있는데, 대덕, 소덕 대인 소인 대의 소의 대례 소레 대지 소지 대신 소신이 있어, 수효는 정해져 있지 않다.  일백이십명의 '군니'가 있는데 중국의 '목재'과 같다. 팔십오에 하나의 '이니익'을 두는데, 이장과 같은 것이다. 열 개의 '이니익'은 하나의 '군니'에 속해 있다.
其俗殺人强盜及姦皆死, 盜者計贓酬物, 無財者沒身爲奴. 自餘輕重, 或流或杖. 每訊究獄訟, 不承引者, 以木壓膝, 或張强弓, 以弦鋸其項. 或置小石於沸湯中, 令所競者探之, 云理曲者卽手爛. 或置蛇甕中, 令取之, 云曲者卽 手矣. 人頗恬靜, 罕爭訟, 少盜賊. 樂有五弦·琴·笛. 男女多 臂點面文身, 沒水捕魚. 無文字, 唯刻木結繩. 敬佛法, 於<百濟>求得佛經, 始有文字. 知卜筮, 尤信巫覡. 每至正月一日, 必射戱飮酒, 其餘節略與華同. 好 博·握 ·樗蒲之戱. 氣候溫暖, 草木冬靑, 土地膏 , 水多陸少. 以小環   項, 令入水浦魚, 日得百餘頭. 俗無盤俎, 藉以 葉, 食用手 之. 性質直, 有雅風. 女多男少, 婚嫁不取同姓, 男女相悅者卽爲婚. 婦入夫家, 必先跨犬,/$《北史》[倭國傳], [犬]作[火].$/ 乃與夫相見. 婦人不淫妬. 死者斂以棺槨, 親賓就屍歌舞, 妻子兄弟以白布製服. 貴人三年殯於外, 庶人卜日而 . 及葬, 置屍船上, 陸地牽之, 或以小輿. 有<阿蘇山>, 其石無故火起接天者, 俗以爲異, 因行禱祭. 有如意寶珠, 其色靑, 大如 卵, 夜則有光, 云魚眼精也. <新羅>·<百濟>皆以<倭>爲大國, 多珍物,  敬仰之, 恒通使往來.

그 풍속에 살인하고 강도하고 간음하면 모두 죽이고, 도둑질하거나 물건을 숨기면, 재물로써 갚고 재물이 없는자는 노비로써 팔린다. 나머지는 경중을 가리어 혹 쫓아내기도 하고 곤장으로 다스리기도 한다. 매양 옥에 갇히면 공경함이 없는 자는 나무로 무릅을 무르고, 혹 강궁을 쓰서 현으로 그 목을 조이기도 한다. 혹은 작은 돌을 달구어서 그 가운데로 지나게 하여 이를 찾게 하는데 죄 있는 자는 손을 댄다고 한다. 혹은 뱀굴 가운데에 두는데 이를 취하여 죄있는 자는 곧 손을 물리게 된다. 사람들은 단청하여 송사함이 드물고, 도적이 적다. 악기에는 오현과 가야, 축 이 있고 남녀가 모두 팔과 얼굴에 문신을 한다. 물속에 들어가 물고기를 잡는다. 문자가 없어 오직 나무에 새기거나 매듭을 짓는다. 불법을 공경하여 "백제"에서 불경을 가져다 쓰고, 이때부터 문자가 있었다. 점을 칠줄 알고 특히 박수무당을 특히 믿는다. 매양 정월 일일 받드시 활을 쏘고 술을 마시며 나머지는 중국과 비슷하다. 기박, 악포, 저박 같은 창이 있다. 기후는 온난하여 초목이 겨울에도 푸르다. 흙은 비옥하고 물이 많고 육지가 적다. 작은 작살 같은 것으로 물속에 들어가 물고기를 잡고 하루에 백여마리나 잡는다. 풍속에 접시가 없어 나뭇잎으로 깔고 맨손으로 밥을 먹는다. 성질은 곧고 우아함이 있다. 여자들이 많고 남자들이 적어 혼인함에 같은 성을 취하지 않는다. 남녀가 서로 좋으면 곧 혼인을하고 부인은 남변집에 들어가는데 받드시 개가 사타구니로 들어간게 한다. 그런 후에 남편을 볼 수가 잇다. 부인은 음란하거나 투기하지 않고, 죽은자는검소하게 관과 곽을 하는데 친한 사람들이 시체를 따르면서 노래하고 춤춘다. 처자나 형제는 하얀 포로 옷을 짓는다. 귀인은 삼년동안 염하여 밖에 두고 보통사람은 길일을 택하여 땅에 묻는다. 장사를 지내는데는 시체를 배위에 두고 육지에서 끌어 당기는데, 혹 작은 수레를 쓰기도 한다. "아소산"이 있는데, 돌이 없고 옛부터 불이 하늘까지 일어난다고 한다. 풍속에 기이하다 하여 제사를 지낸다. 보배나 구슬같은 것이 있어 색깔이 푸르고 크기가 계란만 한데 밤에는 빛을 내어 혹 어안정이라 한다. "신라", "백제"가 모두 "왜"를 대국으로 삼는데 진기한 물건이 많고, 아울러 이를 공경하니 항상 왕래가 있었다.
<大業>三年, 其王<多利思比孤>遣使朝貢. 使者曰: [聞海西菩薩天子重興佛法, 故遣朝拜, 兼沙門數十人來學佛法.] 其國書曰[日出處天子致書日沒處天子無恙]云云. 帝覽之不悅, 謂鴻 卿曰: [蠻夷書有無禮者, 勿復以聞.] 明年, 上遣文林郞<裴淸>使於<倭國>./$應作[裴世淸], <唐>人避諱, 省[世]字.$/ 度<百濟>, 行至<竹島>, 南望< 羅國>, 經<都斯麻國>, 逈在大海中. 又東至<一支國>, 又至<竹斯國>, 又東至<秦王國>, 其人同於華夏, 以爲<夷洲>, 疑不能明也. 又經十餘國, 達於海岸. 自<竹斯國>以東, 皆附庸於<倭>. <倭王>遣小德<阿輩臺>, 從數百人, 設儀仗, 鳴鼓角來迎. 後十日, 又遣大禮<哥多毗>, 從二百餘騎郊勞. 旣至彼都, 其王與<淸>相見, 大悅, 曰: [我聞海西有<大隋>, 禮義之國, 故遣朝貢. 我夷人, 僻在海隅, 不聞禮義, 是以稽留境內, 不卽相見. 今故淸道飾館, 以待大使, 冀聞大國惟新之化.] <淸>答曰:[皇帝德 二儀, 澤流四海, 以王慕化, 故遣行人來此宣諭.] 旣而引<淸>就館. 其後<淸>遣人謂其王曰: [朝命旣達, 請卽戒塗.] 於是設宴享以遣<淸>, 復令使者隨<淸>來貢方物. 此後遂絶.

"대업" 삼년에 그 왕 "다리사비고"가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하고 사신이 말하길 바다서쪽의 보살천자께서 불법을 중히 일으켰다고 들으니 고로 조알하러 왔습니다. 겸하여 승려 수십명이 불법을 배우러 왔습니다 하니 그 나라의 서에 일컷길 태양이 일어나는 곳의 천자가가 서를 태양이 가라앉는 곳의 천자에게 근심이 없다 등등을 운운하니 제가 살펴보고 기뻐하지 않자, 신하가 일컷길 만이의 서에는 예가 없는 자가 있다. 다시는 가르침을 받지 말라 하였다. 다음해 문림랑 "배청"을 "왜국"에 보내니 "백제"를 건너 "죽도"로 가서 남쪽에 "?라국"에 이르고, 곧바로 "도사마국"에 이르러 멀리 큰 바다에 있었다. 또 동쪽으로 "일지국"에 이르고 또 "죽사국"에 이르고, 또 동쪽으로 "진왕국"에 이르러 그 나라사람들은 화하와 같으니, "이주"로 삼으니 능히 밝힐 수는 없었다. 또 십여국을 따라서 해안에 이르렀다. "죽사국"의 동쪽이니 모두 "왜"에 의지해 있다. "왜왕"은 소덕 "아배대"를 보내니 소백명이 따르며, 의장을 베풀며 북치고 피리불며 맞아들였다. 십일후에 또 대례 "가다비"를 보내니 이백여 기병으로 성밖에 까지 나왔다. 이에 도읍에 이르러 그왕이 "청"을 보고 크게 기뻐하며 말하길, 나는 바다 서쪽에 "대수"가 있음을 듣고, 예의의 나라이니 고로 조공을 보낸다. 나는 이인으로 후미진 바다에 있어 예의를 듣지 못하여 경내에 머를러 있어 가까이 보질 못하였다. 이제 길을 닦고 관을 꾸미어 대사신을 모시니 대국의 새로운 생각으로 화되길 바란다. "청"이 대답하여 말하길 황제의 덕이 두 풍속을 아우르니 사해를 고루 윤택하게 하니 옹이 모화되어 고로 사람을 보내어 베풀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이윽고, "청"이 객관으로 나가고 그 후에 "청"이 사람을 보내어 왕에게 말하길 조정의 명은 이미 수행하였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길 청한다 하니 이게 옳다하여 잔치를 베풀고 다시 "청"에게 방물을 보내어 사신을 보내었다. 이 후로 끊어졌다.


隋書卷八十四
列傳第四十九
北狄: 鐵勒·奚·契丹<室韋>.
鐵勒 (철륵:흉노의 후손)
<鐵勒>之先, <匈奴>之苗裔也, 種類最多. 自<西海>之東, 依據山谷, 往往不絶. <獨洛河>北有<僕骨>·<同羅>·<韋紇>·<拔也古>·<覆羅> 號俟斤, <蒙陳>·<吐如紇>·<斯結>·<渾>·<斛薛>等諸姓, 勝兵可二萬. <伊吾>以西, <焉耆>之北, 傍<白山>, 則有<契弊>·<薄落職>·<乙 >·<蘇婆>·<那曷>·<烏 >·/$《北史.鐵勒傳》作[烏護].$/<紇骨>·<也 >·<於尼 >等,/$《北史.鐵勒傳》作[於尼護].$/ 勝兵可二萬. <金山>西南有<薛延陀>·< 勒兒>·<十槃>·<達契>等, 一萬餘兵. <康國>北, 傍<阿得水>, 則有<訶 >·<曷 >·/$《北史.鐵勒傳》作[曷截].$/<撥忽>·<比干>·/$或作[比千].《北史.鐵勒傳》作[比干].$/<具海>·<曷比悉>·<何嵯蘇>·<拔也未渴達>等,/$《北史.鐵勒傳》作[拔也末謁達].$/ 有三萬許兵. <得 海>東西有<蘇路 >·<三索咽>·<蔑促>·/$《北史.鐵勒傳》作[ 促].$/<隆忽>等諸姓,/$《北史.鐵勒傳》作[薩忽].$/ 八千餘. <拂 >東則有<恩屈>·<阿蘭>·<北褥九離>·<伏 昏>等, 近二萬人. <北海>南則<都波>等. 雖姓氏各別, 總謂爲<鐵勒>.  無君長, 分屬東·西兩<突厥>. 居無恒所, 隨水草流移. 人性凶忍, 善於騎射, 貪 尤甚, 以寇抄爲生. 近西邊者, 頗爲藝植, 多牛羊而少馬. 自<突厥>有國, 東西征討, 皆資其用, 以制北荒.

"철륵"은 "흉노"의 묘예의 후손으로 무리가 가장 많다. "서해"의 동쪽에서 산과 계곡에 의지해 있으며, 가도 가도 끊나지 않았다. "독락하"북쪽에 "복골"·"동라"·"위흘"·"발야고"·"복라"등이 무리지어 있는데 <몽진>·<토여흘>·<사결>·<혼>·<곡설>등의 씨족으로 병사가 가히 이만이다. "이오"의 서쪽, "언예"의 북쪽 "백산" 옆에는 <계폐>·<박락직>·<을질>·<소파>·<나갈>·<오환>·<흘골>·<야질>·<어니환>등이 있어 병사 이만이다. "금산"의 서남쪽에는 <설연타>·<질륵아>·<십반>·<달계>가 있어 병사 일만여 정도이다. "강국"의 북쪽 "아득수"수 옆에는 <가질>·<갈찰>·<발홀>·<비간>·<구해>·<갈비실>·<하차소>·<발야미갈달>등이 있어 병사 삼만여 정도이다. "득억해" 동서쪽에는 <소로갈>·<삼색인>·<멸촉>·<융홀>등의 여러 씨족들이 있는데 병사 팔천정도이다. "불름"의 동쪽에는 <은굴>·<아란>·<북욕구리>·<복올혼>등이 있는데 이만에 가깝고, "북해"의 남쪽에는 "도파"가 있다. 비록 그 성씨는 각기 다르더라도 모두 "철륵"이라 하니 군장이 없고 동서 양 "돌궐"에 나누어 속해있다. 일정하게 거하는 곳이 없고, 물과 풀을 따라 옮겨 다닌다. 품성이 흉악하고, 잔인하며 기사에 능하고 탐욕이 강하여 태어나면서 도둑질을 한다. 서쪽 변방에 가까운 자들은 자못 심을 줄을 알고 소나 양이 많고 말이 적다. "돌궐"이라는 나라가 동서로 정벌을 하니 모두 그 비용을 대느라 황폐해 졌다.

<開皇>末, <晉王><廣>北征, 納<啓民>,/$原脫[啓]字, 據《北史.鐵勒傳》補.$/ 大破<步迦可汗>, <鐵勒>於是分散. <大業>元年, <突厥><處羅可汗>擊<鐵勒>諸部, 厚稅 其物, 又猜忌<薛延陀>等, 恐爲變, 遂集其魁帥數百人, 盡誅之. 由是一時反叛, 拒<處羅>, 遂立<俟利發俟斤契弊歌楞>爲<易勿眞莫何可汗>, 居<貪汗山>. 復立<薛延陀>內俟斤字<也 >爲小可汗. <處羅可汗>旣敗, <莫何可汗>始大. <莫何>勇毅絶倫, 甚得衆心, 爲 國所憚, <伊吾>·<高昌>·<焉耆>諸國悉附之.

"개황"말에 "진왕 광"이 북쪽을 정벌하여, "거민"을 얻고, "보가가한"을 크게 깨뜨리니, 이에 "철륵"이 나뉘어 흩어졌다. "대업" 원년 "돌궐"의 "처라가한"이 "철륵"의 여러 부들을 공격하여, 그 세를 무겁게 매기니 또 "설연타"등이 이를 꺼리자 두려워 하여 그 수장들 수백명을 주살하였다. 이로부터 배반하더니, "처라"가 일어서 "사리발사근계폐가릉"이 서니 "역물진막하가한"이다. "탐한산"에 거하였다. "설연타"가 다시 돌아와 무리지어 "야질"이 서니 일명 "소가한"이다. "처라가한"이 이미 부서지고, "막하가한"이 커지게 되었다. "막하"는 용맹하고 인륜을 끊어 그 무리의 마음을 사로 잡아 이웃나라를 협박하니 <이오>·<고창>·<언기>의 여러 나라가 모두 이를 따랐다.
其俗大抵與<突厥>同, 唯丈夫婚畢, 便就妻家, 待産乳男女, 然後歸舍, 死者埋殯之, 此其異也. <大業>三年, 遣使貢方物, 自是不絶云.

그 풍속은 크게 "돌궐"과 같다. 오직 장부가 혼인을 하면 처가에 이르러 남녀아이를 낳은후에야 집으로 돌아간다. 죽으면, 염하여 시체를 묻는다. 이것만 다르다. "대업" 삼년에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치고, 끊이질 않았다.

奚 (해:고막해)
<奚>本曰<庫莫奚>, <東部胡>之種也. 爲<慕容氏>所破, 遺落者竄匿<松>·<漠>之間. 其俗甚爲不潔, 而善射獵, 好爲寇 . 初臣於<突厥>, 後稍强盛, 分爲五部: 一曰<辱紇王>,/$[王],《周書.庫莫奚傳》·《北史.奚傳》·《通典》二  作[主].$/ 二曰<莫賀弗>, 三曰<契箇>, 四曰<木昆>, 五曰<室得>. 每部俟斤一人爲其帥. 隨逐水草, 頗同<突厥>. 有<阿會氏>, 五部中爲盛, 諸部皆歸之. 每與<契丹>相攻擊, 虜獲財畜, 因而得賞. 死者以葦薄 屍, 懸之樹上. 自<突厥>稱藩之後, 亦遣使入朝, 或通或絶, 最爲無信. <大業>時, 歲遣使貢方物.

"해"는 본래 "고막해"라 불리었는데, "동부호"의 종류이다. "모용씨"에게 깨져 "송, 막"사이에 숨어 살았다. 그 풍속은 심히 깨끗하지 못하고, 사냥에 능하고 노략질을 좋아한다. 처음에는 "돌궐"의 신하였는데, 후에 점점 강해지더니, 오부로 나뉘었다. <욕흘왕>, <막하불>, <계개>, <목곤>, <실득> 각 부의 무리는 한 사람의 장수가 통솔한다. 물과 풀을 쫓아다니니 자못 "돌궐"과 한가지 이다. "아회씨"가 있어 오부중에서 가장 성하여 여러부들이 모두 따랐다. 항시 "거란"과 서로 공격하여 포로와 재물을 쌓아, 상을 받았다. 죽으면, 갈대로 주검을 싸아 나무위에 매달아 둔다. 스스로 "돌궐"의 변방이라 하고 역시 사신을 보내어 입조하니 혹 통하기도 하고, 끊기기도 하여 가장 믿음이 없었다. "대업"때에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받쳤다.

契丹 (거란)

<契丹>之先, 與<庫莫奚>異種而同類,  爲<慕容氏>所破, 俱竄於<松>·<漠>之間. 其後稍大, 居<黃龍>之北數百里. 其俗頗與<靺鞨>同. 好爲寇盜. 父母死而悲哭者, 以爲不壯, 但以其屍置於山樹之上, 經三年之後, 乃收其骨而焚之. 因 而祝曰: [冬月時, 向陽食. 若我射獵時, 使我多得猪鹿.] 其無禮頑 , 於諸夷最甚.

거란의 선조는 '고막해'와 종은 다르지만 류는 같다. 함께 '모용씨'에 깨지고, 함께 "송, 막"의 사이에 숨어 있었다. 그 후에 점점 강성해 지서니 '황룡'의 북쪽 수백리에 거하였다. 그 풍속은 자못 "말갈"과 같음이 있다. 도적질을 좋아하고, 부모가 죽으면, 슬피우는 것을 씩씩하지 않다고 여겨 다만, 그 주검을 나무위에 올려 놓고 삼년이 지난후에 그 뼈를 거두어, 불사른다. 그러함에 제사를 지내며 기원하길 겨울에 좋은 음식을 구할수 있게 하고, 만약 내가 사냥을 나가면 돼지와 사슴을 많이 얻을수 있게 해주십시오 한다. 예가 없어 어리석고, 완고하니 여러 이족중에서 가장 심하다.
當<後魏>時, 爲<高麗>所侵, 部落萬餘口求內附, 止于<白 河>. 其後爲<突厥>所逼, 又以萬家寄於<高麗>. <開皇>四年, 率諸莫賀弗來謁. 五年, 悉其衆款塞, <高祖>納之, 聽居其故地. 六年, 其諸部相攻擊, 久不止, 又與<突厥>相侵, <高祖>使使責讓之. 其國遣使詣闕, 頓 謝罪. 其後<契丹>別部<出伏>等背<高麗>, 率衆內附. <高祖>納之, 安置於<渴奚那 >之北. <開皇>末, 其別部四千餘家背<突厥>來降. 上方與<突厥>和好, 重失遠人之心, 悉令給糧還本,  <突厥>撫納之. 固辭不去. 部落漸衆, 遂北徙逐水草, 當<遼西>正北二百里, 依<託紇臣水>而居. 東西亘五百里, 南北三百里, 分爲十部. 兵多者三千, 少者千餘, 逐寒暑, 隨水草畜牧. 有征伐, 則酋帥相與議之, 興兵動衆合符契. <突厥><沙鉢略可汗>遣吐屯<潘 >統之.
후위때에 이르러, '고려'에 침입을 당하여 부락 만여구가 내지로 들어오구, "백비하"에서 멈추었다. 그 후 '돌궐'이 핍박하니 또 만여가가 고려에 붙었다. '개황'4년 여러 막하불이 알현하였고, 오년에 남김없이 그 무리들이 변방에 오니, "고조"가 이를 받아들이고, 그 옛땅에 거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육년 그 여러 부락이 서로 공격하기를 오랫동안 그치지를 않고, 또 '돌궐'이 침범하자  '고조'가 사신을 보내어 그 어김을 책망하였다. 그나라들이 대궐에 이르러, 머리를 조아리면 사죄하였다. 그 후에 '거란'의 별부 '출복'등이 '고려'를 배신하고 무리르 이끌고, 들어오니 '고조'가 이를 허락하고, '갈해나힐'의 북쪽에 두었다. '개황' 말에 그 별부 사천여가가 '돌궐'을 배신하고 항복하였다. 위에서 "돌궐"을 좋아하여 멀이있는 사람의 마음을 잃을까 모두 양식을 보태어 돌려보내어, "돌궐"을 위로하고 어루만졌다. 한결같이 떠나지 않겠다 하니 부락이 점점 흩어져 북쪽으로 물과 풍을 따라 가버리니 "요서"북쪽 이백리에 "탁흘신수"에 의지해 거하였다. 동서가 오백리이고 남북이 "삼백리이니 나뉘어 십부이다. 병사는 많은자는 삼천이고 적은자는 천여명이고, 추위와 더위를 따르며 물과 풀을 쫓아 가축을 끼웠다. 정벌한때는 곧 추장이 서로 의논하여 약속을 하여 병사를 일으켜 무리를 움직인다. "돌궐"의 "사발략가한"이 토둔 "반질"을 보내어 다스렸다.

室韋 (실위)
<室韋>, <契丹>之類也./$[室韋]原缺, 據《北史.室韋傳》補.$/ 其南者爲<契丹>, 在北者號<室韋>, 分爲五部, 不相總一, 所謂<南室韋>·<北室韋>·<鉢室韋>·<深末 室韋>·<太室韋>.  無君長, 人民貧弱, <突厥>常以三吐屯總領之.

"실위"는 "거란"의 류로 그 남쪽에 있는 사람들을 "거란"이라 부르고, 북쪽에 있는 자를 "실위"라 부른다. 나누어 오부가 있는데, 서로 하나로 통합하지 못하여, 소위 남실위·북실위·발실위·심말달실위·태실위가 있다. 아우르는 군장이 없고, 사람들은 가난하고 약하니, "돌궐"이 항시 토둔 셋으로 그 영토를 다스린다.

南室韋 (남실위)

<南室韋>在<契丹>北三千里, 土地卑濕, 至夏則移向西北<貸勃>·<欠對>二山, 多草木, 饒禽獸, 又多蚊 , 人皆巢居, 以避其患. 漸分爲二十五部, 每部有餘莫弗瞞 , 猶酋長也. 死則子弟代立, 嗣絶則擇賢豪而立之. 其俗丈夫皆被髮, 婦人槃髮, 衣服與<契丹>同. 乘牛車,   爲屋, 如<突厥> 車之狀. 渡水則束薪爲 , 或以皮爲舟者. 馬則織草爲 , 結繩爲 . 寢則屈爲屋, 以  覆上, 移則載行. 以猪皮爲席, 編木爲藉. 婦女皆抱膝而坐. 氣候多寒, 田收甚薄, 無羊, 少馬, 多猪牛. 造酒食 , 與<靺鞨>同俗. 婚嫁之法, 二家相許, 壻輒盜婦將去, 然後送牛馬爲 , 更將歸家. 待有娠, 乃相隨還舍. 婦人不再嫁, 以爲死人之妻難以共居. 部落共爲大棚, 人死則置屍其上. 居喪三年, 年唯四哭. 其國無鐵, 取給於<高麗>. 多貂.

"남실위"는 "거란"의 북쪽 삼천리에 있고 땅은 낮고 습하다. 여름에는 곧 서북쪽의 "대발", "흠대" 두 산으로 향하여 나아가니 풀과 나무가 많아 짐승들이 넉넉하고, 또 모기와 파리가 많아, 사람들은 모두 집에 거하여, 그 고통을 피한다. 점점 나누어저 25부 되었고, 각 부에는 여막불만돌이라는 것이 있는데, 추장과 같은 것이다. 죽으면 곧 자제가 대를 이어 서고, 대가 끊기면 어질고 호인인 사람을 가리고 세운다. 풍속에 장부는 모두 머리칼을 흩트리고, 부인은 머리를 감아 올린다. 의복은 '거란'과 같다. 소가 끄는 수레에 거적으로 실을 지으니, "돌궐"의 것과 비슷한 모양이다. 물을 건널때는 섶나무를 엮어 건너고, 혹 가죽으로 배를 만드는 자도 있다. 말에는 풀로 짠 깔개를 깔고, 줄을 엮어 고삐를 만든다. 잠을 잘때는 집에 거적을 뒤집어 씌이고, 이동할 때는 걷어내고, 간다. 자리는 돼지 가죽으로 하는데, 나무를 엮어 깔개로 쓴다. 여자들은 모두 무릅을 가슴에 대고 앉는다. 기후는 많이 추워, 밭에서 거두어 들이는 것이 적다. 양은 없고 말은 적고, 돼지와 소가 많다. 쌀로 술을 빗어 마시니, "말갈"의 풍속과 같다. 결혼하는 법은 두 집안이 서로 허락을 하면, 사위되는 자가 부인을 훔쳐 가고, 그 후에 소나 말을 보내어, 장가를 간다. 다시 부인의 집으로 돌아와 아이를 벨때까지 기다리다 이에 집으로 돌아온다. 부인은 두 번 시집가지 않고, 죽은 사람의 처는 함께 머문다. 부락에는 큰 누각을 함께 만들어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그 위에 둔다. 삼년상을 치루고, 일년에 오직 네 번만 운다. 나라에 철이 나오지 않아 고려에서 가져다 쓰며 담비가 많다.
北室韋 (북실위)

<南室韋>北行十一日至<北室韋>, 分爲九部落, 繞<吐紇山>而居. 其部落渠帥號乞引莫賀 , 每部有莫何弗三人以貳之. 氣候最寒, 雪深沒馬. 冬則入山, 居土穴中, 牛畜多凍死. 饒 鹿, 射獵爲務, 食肉衣皮. 鑿氷, 沒水中而網射魚鼈. 地多積雪, 懼陷坑穽, 騎木而行. 俗皆捕貂爲業, 冠以狐 , 衣以魚皮.

"남실위"에서 북으로 십일을 가면 "북실위"에 이른다. 나누어 아홉 부락이 있고, '토흘산' 주위에서 거한다. 그 부락에는 거수를 걸인막하돌 이라 부르고 각 부에는 총 막하불이 6명이 있다. 기후는 가장 춥고, 눈이 말의 높이 만큼 온다. 겨울에는 산에 들어가 동굴에서 거하고, 소들이 많이 얼어 죽는다. 노루와 사슴이 많아 활로 사냥하는데 힘써 고기는 먹고, 가죽은 옷으로 입는다. 얼음을 뚫고 물속에 들어가 그물로 물고기와 자라를 잡는다. 땅에는 눈이 많이 쌓여 구멍에 빠질까 무서워 나무를 타며 이동한다. 풍속은 모두 담비를 사로잡는 것을 일로 삼고, 머리에는 여우나 오소리를 뒤집어 쓰고, 물고기 가죽으로 옷을 해 입는다.
鉢室韋 (발실위)

又北行千里, 至<鉢室韋>, 依<胡布山>而住, 人衆多<北室韋>, 不知爲幾部落. 用樺皮蓋屋, 其餘同<北室韋>.
또 북쪽으로 천리를 가면 "발실위"에 이르는데, "호포산'을 의지하여 살고, 사람들이 "북실위"에 많이 모여 있어 그 부락을 알지 못한다. 자작나무 껍질로 집을 짓고, 그 나머지는 "북실위"와 같다.
深末 室韋  (심말달실위)

從<鉢室韋>西南四日行, 至<深末 室韋>, 因水爲號也. 冬月穴居, 以避太陰之氣.
발실위에서 서남쪽으로 사일을 가면 "심말달실위"에 이르는데, 물에 의지하기에 이렇게 부르는 것이다. 겨울에는 동굴에 거하고, 보름달을 피한다.
大室韋 (대실위)

又西北數千里, 至<大室韋>, 徑路險阻, 語言不通. 尤多貂及靑鼠.
또 서북으로 수천리에 "대실위"가 있느데, 길이 험하고 말이 통하지 않는다. 담비와 푸른쥐가 특히 많다.

<北室韋>時遣使貢獻, 餘無至者.
"북실위"는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받치지만 나머지는 이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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