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330~360여년 동안 ‘조선인’으로 살고 있는 박씨 집성촌이 3곳이나 있어 큰 관심거리가 되고 있다.
이들은 허베이성 칭룽셴(청룡현), 랴오닝성 가이셴(개현)과 번시셴(번계현) 등 만족(만주족) 자치현에 둥지를 틀고 있다. 맑은 물이 흐르는 산골에서 농사를 짓는 이들은 박씨끼리는 결혼하지 않는 풍습을 지키고 있다. 언어는 완전히 잃어버렸으나 집마다 족보를 고이 간직하고 있다. 중국화하긴 했으나 물김치와 된장이 이어지고 개고기와 매운 맛도 즐긴다. 만족과 한족에 둘러싸여 혈통도 만·한족과 섞여 있으나 조선인이란 의식은 핏속에 녹아 있다. 지난 12월 중순 세 마을을 찾아 이들이 사는 모습을 살펴봤다.
△ △ 허베이성 조선족 박씨촌 칭룽현의 최고령자인 박만우(79)씨가 방안에서 ‘조선’(朝鮮)이라고 적힌 공민증을 꺼내보이며 웃고 있다.
◇ 칭룽셴 박씨촌=마을을 가로지르는 ‘팔도하’라는 개울 위에 오리가 떠다니고 처마밑에는 옥수수가 바나나 송이처럼 매달려 있었다. 최고령인 박만우(79)씨는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주름진 얼굴이 활짝 펴졌다. 가마솥에 고구마를 삶던 일손을 멈춘 그는 방안으로 들기를 청한 뒤 질화로를 끌어당겨 손 녹이기를 권했다. 그가 자랑스레 꺼낸 공민증(주민등록증)의 민족란에는 ‘조선’(朝鮮)이란 글자가 뚜렷이 새겨져 있었다. 그는 “큰 조카가 항미원조(한국전쟁)에 참가했다”면서 김일성 전 북한 주석의 이름을 기억해냈다. 숨진 형 박만순씨는 마을의 ‘정신적 지주’로 남아 있다. 그는 민족탄압 정책이 서슬퍼렇던 1957년 10여명과 함께 성 정부를 찾아가 조선족임을 주장했다고 한다. 칭룽셴에는 다장쯔샹(大杖子鄕) 등 7개 향·진에 150~200명의 조선족이 흩어져 살고 있다고 마을 사람들은 전했다.
◇ 가이셴 박가구촌=투명한 시냇물이 흐르는 산골에 자리하고 있다. 산자락에 둘러싸여 한겨울에도 포근한 이곳은 산사과와 산포도 산지로 유명하다. 읍내에서 출발하는 ‘박가구촌’행 버스가 자주 다닌다.
△ 랴오닝성 가이현의 조선족 박가구촌의 앞산 무덤에 박씨 조상들의 묘비가 지나간 세월을 말해주고 있다. 뒤쪽으로 말안장처럼 오목하게 들어간 안쯔산에는 박씨 선조들이 숨어 산 전설이 전해오는 동굴이 있다.
이장격인 박영상(60)씨는 조상들의 산소가 모여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야산엔 ‘박○○의 묘’라고 적힌 묘석이 여러 개 서 있다. 멀리 보이는 말안장 모양의 안쯔산 동굴에는 신라 출신 조상들이 숨어지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박가구촌이란 마을 이름을 놓고 이웃동네 만주족 싱(邢)씨들과 소송을 벌여 이긴 적도 있다고 했다. 박씨 선조의 역사가 새겨진 비석과 돌절구도 보존되고 있고, 과수원 옆에는 마을을 수호하는 삼신당이 있다. 예전에는 사당이 있었으나 내전으로 없어졌다. 가을에는 조상의 제사를 지낸다. 박영해(40)씨는 “아이들이 조선어를 배우길 원한다”고 말했다. 이곳의 화강암은 베이징 인민대회당의 건물에 사용될 정도로 질이 좋다. 이곳에는 40호에 200명 가량의 박씨가 살고 있다.
이장격인 박영상(60)씨는 조상들의 산소가 모여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야산엔 ‘박○○의 묘’라고 적힌 묘석이 여러 개 서 있다. 멀리 보이는 말안장 모양의 안쯔산 동굴에는 신라 출신 조상들이 숨어지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박가구촌이란 마을 이름을 놓고 이웃동네 만주족 싱(邢)씨들과 소송을 벌여 이긴 적도 있다고 했다. 박씨 선조의 역사가 새겨진 비석과 돌절구도 보존되고 있고, 과수원 옆에는 마을을 수호하는 삼신당이 있다. 예전에는 사당이 있었으나 내전으로 없어졌다. 가을에는 조상의 제사를 지낸다. 박영해(40)씨는 “아이들이 조선어를 배우길 원한다”고 말했다. 이곳의 화강암은 베이징 인민대회당의 건물에 사용될 정도로 질이 좋다. 이곳에는 40호에 200명 가량의 박씨가 살고 있다.
◇ 번시셴 박보촌=눈덮힌 마을 한가운데로 탕허가 흐르고 있다. 최고령자로 이곳에 정착한 지 11대째라는 박문창(84)씨는 깔끔하게 정돈된 방안으로 안내했다. 손자와 함께 사는 그는 장롱 속에 보관하고 있던 빨간색 표지의 족보를 꺼내보였다. 표지에는 ‘박씨종보’라고 붓글씨로 써 있었다. 시내를 굽어보는 관먼산 중턱에는 선조들이 숨어 살았다는 전설이 얽힌 동굴이 있다. 박명신(50)씨는 “3년전 작은 아버지인 박문우(당시 76살)씨가 족보를 정리하다 피를 토하고 숨졌다”며 효행과 예절을 강조하는 가훈이 실린 족보를 보여줬다. 이곳은 성 정부가 83년 ‘문명촌’으로 지정할 정도로 윤택했다. 유아원도 있었고 어린이날엔 한복을 입혔다. 청조 말에는 큰 공장이 운영돼 여기서 발행한 수표가 선양 일대에서 유가증권으로 통용될 정도였다. 반일 해방전쟁 출신 당 간부와 황포군관학교 출신 중장 등 인재도 많이 배출됐다. 교육을 중시해 박보공립소학교를 세웠으며 여대생도 많았다고 한다. 지금은 낙후된 농촌인 이곳에는 70호에 210명 가량의 박씨가 살고 있다.
칭룽셴 가이셴 번시셴/하성봉 특파원 sbha@hani.co.kr
■선조들 유래는
중국내 박씨촌의 선조들은 언제 어디서 왔나
중국내 박씨촌의 선조들은 언제 어디서 왔나
이들은 일제 치하에서 동북3성으로 이주한 조선인들과 확연히 다르다. 현재 중국과 한국에 거주하는 200여만명에 이르는 조선족의 이주 역사는 150년 전인 19세기 중엽까지 거슬러올라갈 뿐이다. 이에 비해 박씨촌 사람들의 선조는 17세기 명말·청초에 이주했을 것으로 본다. 랴오닝성 가이셴과 번시셴에는 이보다 700~800년 전인 당나라 때 신라 유민이 난을 피해 동굴에 숨어 살았다는 전설이 있으나 근거는 미약하다. 두 지역의 동굴에서 발견된 도자기·그릇 등 유물은 그보다 후대인 금나라 시대 것으로 나타났다.
만리장성 북쪽 칭룽셴의 박씨들은 청나라 8기군 소속 조선 군인의 후예로 밝혀졌다. 후금의 누르하치가 본토를 공격할 때인 1619년 강홍립이 명군을 지원하기 위해 1만여명의 조선군을 이끌고 투입됐으나 사르후전투에서 명군이 패해 전투도 못하고 5천명 가량이 투항했다. 이들은 8기군 안의 조선좌령에 편입됐는데 이 가운데 박씨는 베이징 정복(1644)에 동원된 뒤 1669년 칭룽셴에 자리잡았다. 청나라는 평화가 찾아들자 이주정책을 겸해 이들에게 만리장성 위쪽의 황무지 경작권을 부여했다.
랴오닝성 가이셴과 번시셴의 박씨 선조는 청나라로 붙잡혀간 포로 가운데 농사를 짖던 조선인으로 고증되고 있다. 청나라는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 때 조선을 침략해 수만명의 포로를 끌고 갔다. 이들은 8기군(군인)과 장정(농군), 작방(수공업자) 등으로 나뉘어 배치됐다. 가이셴과 번시셴의 박씨 선조들은 농군으로 배치된 사람들이다. 가이셴의 박씨 선조 박의부는 누르하치의 양식을 거두는 ‘독황량’(督皇糧)이었다. 번시셴은 박씨 선조 5명 가운데 박일과 박이만 남았고 박일이 농군의 관리자격인 ‘장두’였다는 기록이 있다. 칭룽셴 가이셴 번시셴/하성봉 특파원
■발굴 의미는
중국내 박씨 집성촌 ‘발굴’은 황유복(59·사진 왼쪽) 베이징 중앙민족대 교수의 학문적 호기심에서 시작됐다. 황 교수는 1982년 인구조사 결과 허베이성 칭룽셴에 수백명의 조선족이 있는 것을 알고 현지를 찾았다. 주민들은 조선 민요가 담긴 테이프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나 조선족이란 민족의식은 살아 있었다. 이들의 증언과 문헌연구 결과 1619년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에 대항하기 위해 명·조선군 연합작전에 참가한 조선 군인의 후손임이 드러났다. 이런 사실은 84년 11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제1회 세계조선민족대회에 처음 공개됐다.
중국내 박씨 집성촌 ‘발굴’은 황유복(59·사진 왼쪽) 베이징 중앙민족대 교수의 학문적 호기심에서 시작됐다. 황 교수는 1982년 인구조사 결과 허베이성 칭룽셴에 수백명의 조선족이 있는 것을 알고 현지를 찾았다. 주민들은 조선 민요가 담긴 테이프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나 조선족이란 민족의식은 살아 있었다. 이들의 증언과 문헌연구 결과 1619년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에 대항하기 위해 명·조선군 연합작전에 참가한 조선 군인의 후손임이 드러났다. 이런 사실은 84년 11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제1회 세계조선민족대회에 처음 공개됐다.
이후 박창욱(74·오른쪽) 연변대 교수가 연구를 더 진전시켰다. 그는 박씨촌이 칭룽셴외에 랴오닝성 가이셴과 번시셴에도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86년 연구생 4명과 세 지역을 답사한 결과 모두 1619년 이후 수십년 동안 이주한 조선인의 후손임이 밝혀졌다. 이런 내용은 87년 12월 발행된 <조선족연구논총>(연변대학출판사) 1권에 상세히 기록돼 있다. 몇해 전에는 국가민족사무위원회의 인가를 받아 <중국통사> 머리말에도 올랐다. 중국내 조선족의 이주 역사가 200년 가량 앞당겨진 셈이다. 그는 “이는 중국의 소수민족(54개) 보호정책의 공로”라고 평가했다. 80년대 들어 중국 당국이 호적정리에 나서면서, 좌익사상과 문화혁명(1966~76)에 짓눌려 만·한족으로 신분을 위장했던 조선족에게도 “광명이 찾아왔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다민족의 틈에서 민족의 고유성을 보존하려면 집거하는 곳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박씨촌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한족과 만족에 없는 박씨라는 성이 이들을 더욱 뭉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팔기만주씨족통보>에는 청나라 8기군에 소속된 43개 성씨의 조선인이 기록돼 있으나 이 가운데 박씨만이 지금까지 내려온다. 칭룽셴에서는 숨질 때 “우리는 조선인이다”라는 유언을 대대로 남겨온 것으로 전해졌다. 박 교수가 방문했을 때 어떤 이는 “한국에 묘지를 사겠다”고 했고 “남북이 한민족인데 왜 통일 못하나”라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베이징/하성봉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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