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왕<'한국의 왕' 홈페이지에서 발췌>
1. 고구려에는 모두 28명의 왕이 재위하였다. 고구려를 세운 인물은 부여에서 이주한 주몽으로서 토착세력과 연합하면서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그러나, 계루부를 중심으로 집권력을 확립시키면서 강력한 일원적 정치제도를 정비해 나간 것은 태조왕에 이르러서이다. 또한, 태조왕 이후로 고구려는 대외적으로 영역을 확대시켜 동해안과 두만강 유역까지 진출을 시도하였고 서쪽으로는 한군현과 대결하였다. 또한, 대외적인 팽창과 함께 사회가 분화되고 왕위의 부자계승도 확립되었다.
4세기에 들어, 미천왕은 낙랑군과 대방군을 무찔렀으며 소수림왕대에는 중앙집권적 지배체제 확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소수림왕은 율령을 반포하고 태학을 세우며 불교를 공인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명설화를 바탕으로 고구려의 건국설화인 주몽설화를 정립해 왕실의 존엄성과 정통성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 때에 이룩된 통치체제를 토대로 고구려는 대외적인 팽창을 계속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6세기 이후 양원왕의 즉위를 둘러싼 귀족들의 대립을 시작으로 귀족연립적인 정권이 등장하였고, 수나라가 중국대륙을 통일하면서부터 고구려와 중국의 통일왕조간의 전쟁이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오랜 전쟁으로 국력이 쇠약해진 상태에서, 오래도록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연개소문의 사후 벌어진 내분까지 겹치면서 나당연합군에게 패하여 멸망하고 만다.
2. 고구려의 왕위 계보도
(제 1대) 동명성왕(東明聖王)B.C 58~B.C 19
동명성왕으로 불리는 고구려의 시조는 고주몽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그의 생애를 알 수 있는 이야기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일연의 『삼국유사』, 이규보의 「동명왕편」에서 전하고 있다.
어느 날 부여의 금와왕은 태백산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한 여인을 만나게 되었다. 그 여인은 이렇게 말하였다.
“저는 하백(河伯)의 딸로 이름은 유화(柳花)라고 합니다. 어느 날, 여러 아우들과 함께 나와 놀고 있었는데, 한 남자가 나타나서 자기는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하면서 저를 웅심산 밑 압록강가에 있는 집으로 유인하여 정을 통해 놓고는 가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제가 중매 없이 혼인한 것을 꾸짖어 이 곳 우발수에 귀양보냈습니다.”
이 말은 들은 금와왕은 이를 이상하게 여겨 그 여인을 데리고 와 깊숙한 방에 가두어 두었다. 그러나 햇빛이 그녀의 몸을 따라다지면서 비추더니 곧 임신을 하였고 얼마 뒤에 알을 하나 낳았는데, 그 알의 크기가 닷 되들이 바가지만 하였다. 금와왕은 이를 괴이하게 여겨 그 알을 개와 돼지에게 주었다. 그러나, 개와 돼지가 이를 먹지 않았다. 그러자, 다시 이 알을 길 한가운데에 버렸더니 소와 말이 그 알을 피하였다. 그리하여 또한 들판에 그 알을 버리자 새들이 모여 들어와 그 알을 품고 날개로 덮어 주었다. 금와왕이 그 알을 깨어 버려고 하였으나 깨지지 않자, 하는 수 없이 그 알을 여인에게 도로 가져다 주었다. 여인이 그 알을 따뜻하게 덮어주자 마침내 한 사내아이가 껍질을 깨고 알속에서 나왔는데, 매우 영특하고 준수하게 생긴 아이였다.
사내 아이가 일곱 살이 되었을 때에 남들보다 재능이 뛰어났으며 활을 잘 쏘아 쏘는 것마다 백발백중이었다. 부여 사람들이 그 아이를 주몽이라 불렀는데, 이는 활 잘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금와왕에게는 일곱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들 모두의 재능에 주몽보도 뛰어나지 못하였다. 큰아들의 이름은 대소(帶素)였는데, 그가 어느 날 금와왕에게 “주몽은 알에서 태어난 아이이니 매우 불길한 놈입니다. 그가 더 강해지기 전에 죽여버립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금와왕은 활을 잘 쏘고 사냥을 잘한다는 이유를 들어 주몽을 죽인다면 백성들이 그를 비웃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래서, 주몽에게 말을 돌보는 마구간지기를 하도록 시켰다.
주몽은 마구간지기를 하면서, 좋은 말은 먹이를 적게 먹여 여위게 만들고 나쁜 말은 잘 먹여 살찌게 만들었다. 그러자, 이를 모르는 금와왕은 살찐 말만을 골라 타고 주몽에게 여윈 말을 주었다. 또, 금와왕은 사냥에 나가서 주몽이 활을 잘 쏘므로 화살을 적게 주었다. 그러나, 주몽은 활을 잘 쏘아 적은 화살로도 짐승을 많이 잡았다. 그러자, 왕자들 뿐 아니라 신하들도 주몽을 죽이고자 하였다.
이 사실은 안 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은 주몽에게 멀리 달아나 나라를 세우라고 타일러 말하였다. 주몽은 어머니의 말을 따라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 등 세 사람을 데리고 부여에서 달아나기로 하였다. 떠나기 전날 밤에 주몽은 임신중이던 그의 아내에게 반 토막의 칼을 신표로 주면서 장치 사내아이가 태어나거든 자신을 찾아오게 하라는 말을 남겼다.
달아나던 주몽의 일행이 엄체수(淹遞水)에 이르렀을 때, 그곳에 다리가 없어 건너지 못하였는데, 대소의 군사들이 주몽을 뒤쫓아오고 있었다. 그러자, 주몽이 “나는 천제의 손자요,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 도망가는데 뒤쫓는 자가 거의 이 곳에 당도했으니 어찌해야 하겠느냐?”고 큰 소리로 외쳤다.
주몽의 외침이 끝나자, 강물에서 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이들이 건널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주몽 일행이 무사히 강을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들은 다시 강물 속으로 들어가 버렸고, 이들을 뒤쫓던 무리들은 결국 주몽을 잡지 못한 채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금와왕의 압박에서 벗어난 주몽 일행은 졸본부여의 영토인 모둔곡(毛屯谷)이라는 험한 요새에 터를 잡고 그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세력이 어느 정도 커진 이후에 주몽은 담판을 짓기 위해 졸본부여의 왕을 찾아갔다. 졸본부여왕 연타발(延陀勃)은 이미 대세가 주몽에게로 기운 것을 알고는 자신의 딸을 주몽에게 주며 사위로 삼고 나라를 주몽에게 넘겨 주었다.
주몽 일행은 모둔곡에서 베옷 입은 사람과 장삼옷 입은 사람과 마름옷 입은 사람을 만나 이름을 물으니 그들은 각각 재사(再思), 무골(武骨), 묵거(默居)라 대답하였다. 그러자 주몽은 이들에게 극씨(克氏), 중실씨(仲室氏), 소실씨(少室氏)라는 성을 주고 함께 나라를 세우자며 졸본천으로 데리고 갔다. 졸본 땅은 기름지고 아름다우면서 험한 곳이었기 때문에 그곳에 도읍을 정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아직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어 비류수 상류에 집을 짓고 살면서 나라이름을 고구려(高句麗)라 하였고 고(高)를 성씨로 삼았다. 이 때, 주몽의 나이 22세로, 한 효원제 건소 2년(기원전 37년)이었다.
즉위한지 4년째에 주몽은 성을 쌓고 궁궐을 지었다. 그리고 즉위 6년에 오이와 부분노를 시켜 태백산의 동남쪽에 있는 행인국을 정복하도록 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즉위 10년인 기원전 28년에는 북옥저 지방을 병합하고, 즉위 14년에는 주몽의 생모인 유화부인이 동부여에서 사망하였다. 주몽은 친어머니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부여에 사신을 파견하여 조의를 표하였다. 즉위 19년인 기원전 19년에 동부여에서 유리왕자가 어머니와 함께 고구려로 탈출해 왔다. 그러자, 주몽은 졸본에서 태어난 비류와 온조를 제치고 유리를 태자로 책봉하였다. 그리하여, 비류와 온조는 고구려를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 백제를 세웠다. 그리고 그 해 9월에 주몽은 갑자기 세상을 뜨게 되니 이 때의 나이 40세였으며 장지는 용산(龍山)이었다.
(제 2대) 유리(명)왕(榴璃, ?~18)
주몽이 부여에서 달아날 때, 아내 예씨의 태중에 있던 아기가 바로 유리이다. 이 때 주몽은 신표로서 반토막의 칼을 아내에게 주며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자신을 찾아오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따라서, 아버지 없는 유복자와 같은 처지에서 태어나 성장하였다.
금와왕의 아들 대소는 여러 차례 유리와 그의 어머니를 죽이려 하였으나 유화의 간곡한 부탁으로 금와왕이 이들의 목숨만은 살려 두었다. 유화부인은 금와왕과 대소의 눈길을 피해 유리를 돌보았다고 한다.
유리는 아버지 주몽을 닮아 영리할 뿐 아니라, 활을 잘 쏘고 말도 잘 탔다고 한다. 유리 모자를 돌봐주던 유화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신변에 위협을 느낀 유리모자는 주몽을 찾아가기로 결심하고 부여를 떠나 고생 끝에 졸본성에 도착하게 된다. 그리고 주몽이 남기고 간 반 토막의 칼을 내밀어 자신을 증명하였다.
이렇게 급작스럽게 유리가 등장하자, 주몽과 소서노 사이의 두 아들 비류와 온조 사이에 왕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유리가 결국 태자로 책봉되고 이후 얼마 후 주몽이 세상을 떠나자 고주몽의 유언에 따라 유리가 그 뒤를 이어 고구려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러자, 이에 반기를 들었던 비류와 온조는 무리를 이끌고 고구려를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 백제를 세우게 된다.
유리왕은 즉위 11년인 기원전 9년에 국경을 자주 넘어오는 선비족을 대대적으로 토벌하기 시작하였다. 본래, 선비족은 험한 산속에 숨어 있으면서 유리하면 나와 약탈을 일삼고 불리하면 들어가는 게릴라 전법을 구사하였다.
유리왕은 부분노 장군과 함께 선비족을 그들의 은신처 부근에서 싸움을 건 후, 패한 체하면 달아나는 전법으로 유인해 내어 크게 싸워 이겼다. 그리고 이로써 선비족을 복속시킬 수 있었다. 이 전투가 끝나고 왕은 부분노의 공을 높이 사며 선비가 살던 땅을 식읍으로 주었으나 부분노는 이를 사양하였다. 그러자 유리왕은 부분노에게 황금 30근과 좋은말 11필을 내렸다.
유리왕은 재위 22년에 수도를 국내성으로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았으며, 31년에는 중국의 신나라를 세운 왕망과 전쟁을 벌였다. 또한, 그 다음해에는 부여의 공격을 받았으나 왕자 무휼이 이를 물리치자 그 공을 인정해 무휼을 태자로 책봉하였다.
33년에는 주몽이 데리고 온 오이와 마리라는 장수를 보내어 서쪽 지방에 있던 양맥(梁貊)을 정벌해 멸망시켰으며 한나라 현도군에 속해있던 고구려현을 습격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즉위 37년 4월 왕자 여진이 물에 빠져 죽고 같은 해 10월 두곡(豆谷)이라는 곳에서 왕이 사망하니, 두곡의 동쪽 언덕에 장사지냈다.
(제 3대) 대무신왕(大武神, 4~44)
유리왕의 셋째 아들로 어머니는 다물도주 송양의 딸 송씨이다. 이름은 무휼인데, 유리왕 33년인 14년에 태자로 책봉되었는데, 이 때 나의 11세였다.
해명태자가 유리왕의 명으로 자결했을 때 무휼은 6살이었는데, 이 때 이미 조리있게 말을 잘 하였으며 10살에는 귀신같은 전술로 부여군을 섬멸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무휼이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장하며 인품이 뛰어난 데다가 지략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하여 해명태자가 죽자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유리왕이 세상을 떠난 18년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대무신왕은 즉위 기간동안, 할아버지 주몽의 원수와도 같은 부여의 대소와 전쟁하여 이를 꺽어 동부여 땅을 병합하였다. 또한, 후한 요동태수의 침공을 격퇴하였고 최리(崔理)의 낙랑국을 호동왕자의 활약에 힘입어 공격하는 등 주변 부족국가를 병합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그리고, 후한의 광무제에게 정식으로 사신을 보내어 국제무대에서 처음으로 고구려가 국가로서 인정받게 하였다. 대내적으로는 을두지(乙豆智), 송옥구(松屋句)와 같은 인재를 등용하여 좌우보체제(左右輔體制)로 국정을 운영하여 중앙집권적 통치체제의 기초를 다졌다.
이같은 업적을 남긴 대무신왕은 즉위 27년인 44년 10월에 세상을 떠났으며 대수촌원(大獸村原)에 장사지냈다.
(제 4대) 민중왕(閔中, ?~48)
민중왕의 생애와 업적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약간의 기록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민중왕은 대무신왕의 동생으로 이름은 해색주(解色朱)이다.
37년에 대무신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이를 빼앗자 대무신왕 44년에 후한의 광무제가 이를 정벌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는데 이 전쟁에서 왕이 죽었다. 이 때, 태자인 해우의 나이가 어려 아직 사를 맡기 어려웠으므로 부족장들이 모여 동생인 해색주를 왕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 달리 삼국유사에는 민중왕이 대무신왕의 아들이고 모본왕의 동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민중왕은 즉위 4년째 되던 해에 민중원이라는 곳으로 사냥을 나가 커다란 석굴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죽으며 이곳에서 장사를 지내달라고 하였는데, 그로부터 민중왕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같은 해 10월에 잠지락부(蠶支落部)의 대가(大家, 大加)인 대승(戴升) 등 1만여 가(家)가 한나라가 지배하던 낙랑군으로 도피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재위 5년인 48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그가 유언하였던 민중원의 석굴에 장사지냈다.
(제 5대) 모본왕(慕本, ?~53)
대무신왕의 첫째 부인에게서 태어난 아들로 이름은 해우(解憂), 또는 해애루(解愛婁)로 기록되어 있다. 호동왕자가 자결한 직후인 32년 12월에 태자로 책봉되었으나, 대무신왕이 죽은 44년에 나이가 어려 왕위를 이을 수 없다고 하여 숙부인 민중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민중왕이 재위 5년만에 죽자 비로소 왕의 자리를 이었다.
즉위 2년째 봄에 군사를 파견하여 한나라의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을 습격하였다. 한나라 북평은 지금의 북경으로 바로 하북지방이며, 상곡은 북평 바로 위이다. 또한 태원은 태행산 서쪽에 있는 산서성의 치소가 있는 곳이며, 이곳에서 낙하가 발원한다. 여기까지 모본왕이 습격해 들어갔다면 이는 대단한 업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왕은 요동태수 채동(蔡?)이 은의와 신의로써 왕을 대접하자 화친하였다. 그 해 3월에 태풍이 불어 나무가 뽑히고 4월에는 우박이 내렸는데, 8월에 왕이 사자를 보내어 국내의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였다고 한다. 이 때 모본왕의 나이는 기껏해야 20세 미만이었으니 이러한 사실만으로 볼 때 초창기 모본왕은 매우 현명한 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모본왕에 대해서는 이와 정반대의 기록이 함께 전해진다. 재위 4년째인 51년의 내용은 이러하다.
“왕은 날로 포악해져 늘 사람을 깔고 앉거나 베개로 베고 누웠는데, 만약 그 사람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가차없이 죽이고, 신하로서 간하는 자가 있으면 활을 당겨 쏘아 죽였다.”
결국, 이 기록에서와 같이 모본왕은 성품이 어질지 못하고 국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아 백성들의 원망을 샀으며 재위 6년인 53년에 시종이었던 두로(杜魯)에게 살해당하였다고 한다. 모본왕은 죽은 후 모본 언덕에 묻혔으며 태조왕이 다음 왕위를 이었다. 또한, 기록에 의하면 유리왕부터 모본왕까지 성씨를 해씨라 했고 출신 부족이 소노부였다. 반면, 태조왕은 성씨가 고씨이며 출신 부족을 계루부라고 전한다. 따라서, 다음의 태조왕대부터 왕위가 소노부에서 계루부로 넘어간 것으로 보고 있다.
(제 6대) 태조대왕(國祖, 47~165)
태조대왕의 이름은 궁(宮)이었으며 아명은 어수(於漱)였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유리왕(琉璃王)의 아들인 재사(再思)와 부여 출신 어머니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후한서(後漢書)』 태어나면서 곧 눈을 뜨고 사람을 보았다고 한다. 53년에 모본왕(慕本王)이 살해된 후 연로한 아버지 재사가 왕위를 사양하여 불과 7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태조대왕은 활발한 영토확장전쟁을 벌였다. 56년(태조대왕 4년) 동옥저를 정복하여 동으로는 동해, 남으로는 살수(薩水)에 이르기까지 영역을 확장하였다. 68년(태조대왕 16년)에는 갈사국(曷思國)을 병합하고, 72년(태조대왕 20년)에는 조나(藻那)를 공격하여 왕을 사로잡고, 74년(태조대왕 22년)에는 주나(朱那)를 공격하여 왕자 을음(乙音)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98년(태조대왕 46년)에는 책성(柵城)을 순수(巡狩)하였고, 102년(태조대왕 50년)에는 책성을 안무(安撫)하였고, 114년(태조대왕 62년)에는 남해(南海)지방을 순행하여 새로 병합된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넓혔다.
한편 대외관계에 있어서 후한(後漢)에 대하여 적극적인 공세를 펼쳤다. 즉, 55년(태조대왕 3년) 요서지역에 10성을 쌓아 후한의 침공에 대비하였다. 105년(태조대왕532년)에는 후한의 요동군(遼東郡)을, 111년(태조대왕 59년) 118년(태조대왕 67년)에는 예맥(濊貊)과 함께 현도군(玄?郡) 및 낙랑군(樂浪郡)의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121년(태조대왕 69년) 후한의 유주자사(幽州刺史) 풍환(馮煥), 현도태수 요광(姚光), 요동태수 채풍(蔡諷)의 침공을 받았으나, 오히려 요동, 현도를 공격하고 현도군 소속의 후성(候城)을 불태우기도 하였다. 4월에는 요동의 선비족(鮮卑族)과 함께 요동군의 요대현(遼隊縣)을 공격하여 태수 채풍을 죽였다.
12월과 이듬해인 122년(태조대왕 70년)에는 마한, 예맥과 더불어 현도군, 요동군을 공격하였다. 146년(태조대왕 94년)에는 요동군의 신안거향(新安居鄕)과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하여 대방현령(帶方縣令)을 죽이고 낙랑태수(樂浪太守)의 처자를 생포하는 등, 후한과 낙랑과의 교통로를 위협하기도 하였다. 한편 68년(태조대왕 16년)에는 투항한 갈사왕(曷思王)의 손자 도두(都頭)를 우태(于台)로 삼고, 74년(태조대왕 22년)에는 주나의 왕자 을음을 고추가(古鄒加)에 임명하는 등, 주변 소국의 지배세력을 왕권아래에 편제하였다.
121년(태조대왕 69년) 후한 유주자사의 침입을 물리치면서 권력을 장악한 동생 수성(遂成)이 왕위를 노리자 결국 좌보(左輔) 고복장(高福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46년 수성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별궁에서 은거하다가, 165년 119세로 죽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후한서』에는 121년에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제 7대) 차대왕(次大, 71~165)
차대왕의 이름은 수성(遂成)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태조대왕(太祖大王)의 동생(『후한서(後漢書)』에는 아들로 전한다)으로 전한다. 차대왕은 용감하지만 인자함이 적은 성품인 것으로 전해진다.
수성은 121년(태조대왕 69년)에 후한(後漢)의 유주자사(幽州刺史) 풍환(馮煥) 등의 침공을 격파한 공으로 군사와 국정 전반에 관한 업무를 장악하였다. 이후 더욱 그 세력이 커져 측근세력들과 더불어 왕위를 노리다가 마침내 146년 태조대왕의 양위를 받아 76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후한서』에는 121년에 즉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위 후 147년(차대왕 2년)에 측근세력이었던 관나부(貫那部) 패자(沛者) 미유(彌儒), 환나부(桓那部) 우태(于台) 어지류(瘀支留), 비류나부(沸流那部) 조의(早衣) 양신(陽神) 등을 각각 좌보(左輔)촵중외대부(中畏大夫)에 임명하였다. 한편 태조대왕의 측근세력인 우보(右輔) 고복장(高福章)과 태조대왕의 아들인 막근(莫勤)촵막덕(莫德)을 제거하였다. 나아가 자신의 동생인 백고(伯固)를 축출하는 등 왕권의 강화를 도모하였다. 그러나 재위기간 중에 천재지변이 계속되고 사회불안이 계속되는 가운데 165년 연나부((椽那部) 조의(早衣) 명림답부(明臨答夫)에게 시해당하였다.
(제 8대) 신대왕(新大, 89~179)
신대왕의 이름은 백고(伯固) 혹은 백구(伯句)였다. 신대왕의 가계에 대해서는 태조대왕의 동생, 태조대왕의 아들, 차대왕의 아들이라는 등 여러 설이 있다. 그는 성품이 영특하고 인자하였다고 전해진다.
형인 차대왕의 탄압으로 산골에 은거하고 있다가, 차대왕이 명림답부(明臨答夫)에 의하여 살해된 뒤 즉위하였다. 그러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태조대왕과 차대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즉위한 이듬해인 166년(신대왕 2년) 대사면령을 내려 차대왕의 태자 추안(鄒安)을 양국군(讓國君)에 봉하고 식읍(食邑)을 내려주는 등 세력의 통합에 힘을 기울였다.
한편 고구려 최고관직이던 좌보(左輔)와 우보(右輔)를 개편하여 국상(國相)이라는 관직을 설치하고 명림답부를 임명하여 귀족세력들을 조정하고 통제하려 하였다. 그리고 176년(신대왕 12년) 왕자 남무(男武)를 태자로 책봉하여 왕위의 부자상속제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한(後漢)과는 즉위 초기에는 평화정책을 추구하다가 점차 충돌이 거듭되었다. 169년(신대왕 5년)과 172년(신대왕 8년)에 후한의 현도태수(玄?太守) 경림(耿臨)의 침입을 받기도 하였지만, 여러 차례에 걸쳐 요동군을 공격하였다. 또 169년(신대왕 5년)에는 대가(大加) 우거(優居)와 주부(主簿) 연인(然人)을 파견하여 당시 요동촵요서지역의 신흥세력으로 등장하던 공손탁(公孫度)을 도와 부산적(富山賊)을 공격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공손탁이 독립세력으로 등장한 것은 190년 이후이기 때문에 후대의 사실이 신대왕 때의 사건으로 잘못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179년 91세로 죽고 고국곡(故國谷)에 장사하였다고 전해진다.
(제 9대) 고국천왕(故國川, ?~197)
고국천왕의 이름은 남무(男武)이며 국양왕(國襄王) 혹은 국양왕(國壤王)이라고도 한다. 신대왕(新大王)의 둘째 아들로 176년(신대왕 12년) 태자로 책봉되었고, 신대왕이 죽은 뒤 국인(國人)의 지지를 받아 즉위하였다.
고국천왕은 키가 9척이나 되고 위엄을 갖춘 외모에 가마솥을 들만큼 힘이 장사였다고 한다. 또한 잘 듣고 판단하며 관용과 용맹을 떨쳤다고 기록되어 왕으로서의 자질이 충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80년(고국천왕 2년) 연나부(椽那部) 우소(于素)의 딸을 왕비로 맞았다. 184년(고국천왕 6년) 후한 요동태수의 침입을 격퇴시켰다.
190년(고국천왕 12년)∼191년(고국천왕 13년)에 걸친 연나부의 좌가려(左可慮)와 어비류(於卑留)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194년(고국천왕 16년) 진대법(賑貸法)을 실시하여 농민 생활을 안정시켰다. 그리고 지속적인 개혁을 통한 왕권의 강화를 이루기 위해 191년(고국천왕 13년) 파격적으로 한미한 집안 출신인 을파소(乙巴素)를 국상(國相)으로 임명하기도 하였다.
(제 10대) 산상왕(山上, ?)
산상왕의 이름은 연우(延優) 혹은 이이모(伊夷模)이다. 신대왕의 아들이며 고국천왕의 동생으로 우씨왕후(于氏王后)와 귀족세력의 추대를 받아 고국천왕에 이어 즉위하였다.
왕비는 형수였던 우씨왕후였다. 소후(小后)는 관노부(灌奴部) 주촌통(酒村桶) 출신의 여인으로, 209년(산상왕 13년) 그녀와의 사이에서 태자 교체(郊?, 뒤의 동천왕)를 낳았다.
산상왕이 즉위한 197년(산상왕 1년) 형인 발기(發岐)가 왕위계승에 불만을 품고 소노부(消奴部) 세력과 더불어 궁성을 포위하기도 하였을 뿐만 아니라 후에는 요동지방에서 세력을 떨치던 공손씨(公孫氏)의 군대를 이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산상왕의 동생인 계수(須)가 물리쳤다.
공손씨와는 이후로도 계속 긴장관계가 유지되었고 공손씨의 영역인 현도군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한편, 198년(산상왕 2년) 환도성(丸都城)을 쌓고 209년(산상왕 13년) 이곳으로 천도하였다고 하는데 천도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227년 5월에 죽어 산상릉(山上陵)에 장사하였다.
(제 11대) 동천왕(東川, ?~248)
동천왕은 동양왕(東襄王)이라고도 하였다. 동천왕의 이름은 우위거(憂位居), 위궁(位宮)이라고 불렸는데 위궁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능히 사물을 보아서 선조인 태조왕(太祖王) 궁(宮)을 닮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산상왕(山上王)의 아들로 어머니는 관노부(灌奴部) 주통촌(酒桶村) 출신의 주통부인(酒桶婦人)이었다. 어렸을 때의 이름은 체(郊)였다. 성품은 관대하고 인자하였다고 한다.
213년(산상왕 17년) 태자로 책봉된 후 산상왕이 죽자 즉위하였다. 재위기간 전반기에는 요동지방에서 세력을 구축한 공손씨(公孫氏)와 대립이 계속되었다. 234년(동천왕 8년) 이래 오(吳)나라와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공손씨의 배후에 있던 위(魏)나라와 외교관계를 강화하였다.
238년(동천왕 12년)위나를 도와 공손씨세력을 멸망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기대와는 달리위나라와 국경을 접하게 되면서 위와 긴장이 높아진다.
고구려는 242년(동천왕 16년)에 위에 대한 선제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위는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丘儉)으로 하여금 244년(동천왕 18년)과 245년(동천왕 19년)에 두 차례에 걸쳐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초기에는 고구려가 유리하였으나 위의 4각형 진법(陳法)에 걸려 대패하였다.
결국 수도인 환도성(丸都城)은 함락당하여 파괴되었고 동천왕은 남옥저(南沃沮)를 거쳐 북옥저(北沃沮) 방면으로 패주하였다. 이때 밀우(密友), 유유(紐由) 유옥구(劉屋句) 등의 활약으로 상황을 반전시키며 위군을 낙랑방면으로 몰아냈다. 그러나 위의 침입으로 환도성은 왕이 거처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고 247년(동천왕 21년) 평양성(平壤城, 평북 강계지방으로 추정)으로 일시 천도하였다고 전해진다.
한편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된 245년(동천왕 19년)과 248년(동천왕 22년) 신라와의 교섭은 당시 상황으로 보아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248년에 왕이 죽자 왕의 은덕을 사모하여 왕을 따라 죽은 사람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이에 중천왕(中川王)은 따라죽지 말 것을 명하기도 했지만 장례일에 따라 죽은 사람이 많자 나라사람들이 나무로 시신을 덮어주었다고 한다. 현재 평안남도 강동군 마산면에는 동천왕릉으로 전해지는 고구려 봉토분(封土墳)이 있다.
(제 12대) 중천왕(中川, ?~270)
중천왕은 일명 중양왕(中壤王)이라고도 한다. 중천왕의 이름은 연불(然弗)이다. 동천왕(東川王)의 아들로 243년(동천왕 17년)에 태자가 되었고, 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외모가 준수하고 지략이 있었다고 한다. 왕비는 연나부(椽那部) 출신인 연씨(椽氏)이다.
즉위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동생 예물(豫勿) 등이 모반하자 연나부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진압하고 정국을 안정시켰다.
250년(중천왕 3년) 국상(國相)인 명림어수(明臨於漱)로 하여금 군사관계의 일도 아울러 관장하게 하였다. 한편 251년(중천왕 4년) 왕비 연씨와 더불어 왕의 총애를 다투던 관나부(貫那部) 출신인 관나부인(貫那夫人)을 투기가 심하다는 이유로 서해바다에 수장시켜 버렸다.
254년(중천왕 7년) 명림어수가 죽자, 비류나부(沸流那部) 출신인 음우(陰友)를 국상에 임명하였다. 255년(중천왕 8년) 왕자 약로(藥盧, 뒤의 서천왕)를 태자로 삼았다.
한편 다음해(256년)에는 공주를 연나부 출신 명림홀도(明臨笏都)에게 시집보냈다. 259년(중천왕 12년) 위(魏)나라의 위지해(尉遲楷)가 침략해오자 양맥지곡(梁貊之谷)에서 격파하였다. 재위 23년 만에 죽자 중천지원(中川之原)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제 13대) 서천왕(西川, ?~292)
서천왕은 서양왕(西壤王)이라고도 전한다. 서천왕의 이름은 약로(藥盧), 약우(若友)로 불렸다 중천왕(中川王)의 둘째 아들로 255년(중천왕 8년)에 태자로 책봉된 후 부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성품이 총명하고 인자하여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왕비는 서부(西部) 대사자(大使者) 우수(于漱)의 딸인 우씨왕후이다.
271년(서천왕 2년) 국상(國相) 음우(陰友)가 죽자 그의 아들 상루(尙婁)를 국상으로 임명하는 등 기존의 정치질서를 인정하였다. 273년(서천왕 4년)에는 기근이 들자 창고를 열어 백성을 구제하였다.
고구려 동북쪽에 있던 숙신(肅愼)을 통제하기 위해서 276년(서천왕 7년)과 288년(서천왕 19년)에 신성(新城)에 행차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간섭이 강화되자 숙신(肅愼)은 280년(서천왕 11년) 고구려의 변경을 침입하고 백성들을 살해하였다.
이에 맞서 서천왕의 동생 달가(達賈)는 숙신을 공격하여 단로성(檀盧城)을 함락시키고 추장을 죽였으며, 숙신인 600여가를 부여 남쪽의 오천(烏川)에 집단이주시켰고 항복한 부락 6, 7개소를 다스렸다.
서천왕은 숙신을 성공적으로 정벌한 후 달가를 안국군(安國君)에 봉하고 군사권을 주어 양맥(梁貊) 및 숙신의 여러 부락을 다스리도록 하였다. 286년(서천왕 17년)에는 왕위를 찬탈하려던 동생인 일우(逸友)와 소발(素勃)을 제압하였다. 292년에 죽었는데 서천지원(西川之原)에 장사하였다고 한다.
한편 서천왕릉은 296년(봉상왕 5년)에 모용씨(慕容氏)의 군대가 고구려를 침입하였을 때 도굴되었다고 한다. 당시의 상황을 『삼국사기(三國史記)』 봉상왕본기에서는 그때 작업하던 자들이 갑자기 죽고 무덤 안에서 음악소리가 울려나와 이를 두려워한 모용씨의 군사들이 고구려로부터 철수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제 14대) 봉상왕(烽上, ?~300)
서천왕의 아들로 이름은 상부(相夫), 또는 삽시루( 矢婁)이다. 부왕인 서천왕이 죽자 왕위를 이었으며 치갈왕(雉葛王)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그는 어려서부터 의심이 많고 교만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왕위에 오른 봉상왕은 곧바로 왕권을 강화하는 데에 크게 힘을 쏟았다. 이를 위해 자신의 왕권에 위협이 될 수 있는 모든 세력들을 제거해 나갔다. 먼저, 숙신을 격파하여 고구려의 영웅으로 추앙받던 숙부인 달가를 죽이고, 자신의 동생인 돌고( 固)를 다음해에 죽였다. 또한, 훗날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돌고의 어린 아들인 을불(乙弗)을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을불은 서천왕의 뒤를 이어 뒷날 미천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자신에게 위협적인 인물을 제거한 봉상왕은 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대규모의 궁궐 증축 사업을 벌였다. 한편, 대외적으로는 중국의 다링강(大凌河)하류 방면에서 일어나 세력을 확장해가던 선비(鮮卑) 모용부의 모용외와 충돌하였다. 그리하여, 293년과 296년 모용외가 군대를 이끌고 침략하였으나, 293년에는 신성태수(新城太守)인 북부소형(北部小兄) 고노자(高奴子)가 이들을 무찔렀고, 296년에는 침략군이 고국원(故國原)에 이르러 서천왕릉을 도굴하려다가 무덤 속에서 음악소리가 들리자 놀라서 스스로 물러갔다고 한다. 그런데 이같은 사실들은 당시 모용외의 세력이 아직 요하(遼河)를 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 사실성 여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던 중, 300년에 왕이 궁실을 수리하려고 백성을 동원하려 하였다. 이 때에 가뭄이 심해 백성들이 몹시 어려운 상황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국상(國相)인 창조리(倉助利)가 이같은 사업이 옳지 않다고 왕에게 간언하였으나, 왕은 오히려 창조리를 죽이고자 하였다. 그러자, 창조리는 다른 신하들과 함께 왕의 폐위시키기 위한 계획을 꾸미게 된다. 결국, 상황을 되돌릴 수 없는 것을 깨닫게 된 봉상왕은 마침내 두 아들과 함께 자살하였고 시신은 봉산원(烽山原)에 묻혔다.
(제 15대) 미천왕(美川, ?~331)
이름은 을불(乙弗)·을불리(乙弗利) 또는 우불(憂弗)이며 호양왕(好壤王)이라고도 한다. 서천왕의 손자이고, 고추가 돌고( 固)의 아들이다. 봉상왕 2년에 왕이 자신의 형인 돌고를 죽이자 을불은 위험을 피해 숨어살면서 고용살이·소금장수 등으로 떠돌았다. 그러던 중, 300년에 국상 창조리(倉助利) 등이 봉상왕을 폐위하고 을불을 왕으로 옹립하였다.
미천왕이 통치하던 시기에는 중국에서 진(晉)나라가 와해되는 혼란스러운 국제정세가 전개되고 있었다. 그러나, 미천왕은 이 같은 주변상황을 이용하여 적극적으로 대외팽창 정책을 추진하여 서방과 남방으로 급속한 팽창을 시도하였다. 그리하여, 302년에 현도군을 공격해 적 8천 여명을 사로잡았고, 311년에는 요동의 서안평을 점령하였다. 또한, 313년과 314년에는 낙랑군과 대방군을 병합하였고, 317년에 다시 현도성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4세기초에 선비족(鮮卑族)의 일파인 모용부(慕容部)가 요동지방으로 점차 세력 확장해 오게 되자 모용부와의 전쟁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따라서 진(晉)나라의 평주자사(平州刺史)인 최비(崔毖)의 권유에 따라 역시 선비족의 일파인 단부(段部)·우문부(宇文部)와 더불어 모용부를 공격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그 뒤 모용부가 요동을 장악하여 국경을 정하게 되자, 모용부와의 긴장관계가 더욱 고조되었다.
319년 고구려의 장군 여노자(如奴子)가 모용부의 군대에 의하여 포로가 되기도 하였으나, 고구려측은 자주 요동을 공격하여 양자는 일진일퇴를 되풀이하였다. 330년 후조(後趙)에 사신을 파견하여 중원세력과의 연결을 통하여 모용부를 견제하고자 노력하였다.
331년 재위 32년 만에 죽자 미천지원(美川之原)에 장사지냈다. 그러나 342년(고국원왕 12)에 전연(前燕)의 군대가 그의 무덤을 파헤치고 시체를 가져가는 일이 벌어졌다. 고국원왕은 그 다음해 전연에 사신을 보내어 진기한 물건 등을 다수 주고 시체를 찾아오게 하였으나 그뒤 시체의 재매장에 관한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제 16대) 고국원왕(故國原, ?~371)
고국원왕은 국원왕(國原王) 또는 국강상왕(國岡上王)이라고도 하며, 한때 '소열제(昭烈帝)’라 칭하기도 하였다. 이름은 사유(斯由) 혹은 유(劉), 교(釗)라고도 하는데, 아버지는 미천왕이고 어머니는 주씨부인(周氏夫人)이다. 미천왕 15년인 314년 정월에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331년 2월 미천왕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고구려는 미천왕대에 이어 요동지역 확보를 위하여 선비족(鮮卑族)의 일파인 모용부(慕容部)의 국가 전연(前燕)과 심각한 대립을 보이고 있었다. 이에, 왕은 336년 동진(東晉)에 외교사절을 파견하고, 338년에는 전연 공격에 실패한 후조(後趙)와 연결을 꾀하였다. 또한, 336년 모용황(慕容)의 즉위에 반대하여 일어난 '모용인(慕容仁)의 난’에 가담하였던 곽충(郭充)과 동수(壽)가 고구려로 도망쳐 오자 이들을 받아들였으며, 다시 338년 후조의 전연을 공격할 때 후조에 내통하였던 봉추(封抽) 및 송황(宋晃) 등이 투항해 오자 이들 역시 받아들였다.
뿐만 아니라 335년 제 3현도군 지역을 차지하여 그곳에 신성(新城:撫順 北關山城)을 축조하였는가 하면, 342년 국도인 국내성(國內城)을 증축하여 전연과의 대결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후조 및 요서지방의 선비족의 일파인 우문부(宇文部)를 격파하고 중원 진출을 위해 후방의 안정을 모색하던 모용황은 342년에 고구려를 침입해 왔으며 이 싸움에서 고구려는 수도가 함락되었다. 모용황은 철군하면서 선왕인 미천왕의 능을 파헤쳐 그 시신을 가져갈 뿐 아니라, 왕모 주씨를 인질로 데리고 갔다. .
그리하여 고국원왕은 343년에 수도를 동황성(東黃城)으로 옮기고, 미천왕의 시신과 왕모의 반환을 청하며 전연에 사절을 파견하여 스스로 신하를 칭하기도 하였다. 또한, 349년에는 고구려로 투항해왔던 송황을 다시 전연으로 돌려보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355년에 전연으로부터 '낙랑공 고구려왕(樂浪公高句麗王)’에 봉해졌으며 '영주제군사 정동대장군 영주자사(營州諸軍事 征東大將軍 營州刺史)'라는 관직을 받게 된다.
342년에 있었던 모용황과의 전쟁 이후, 345년에 모용각(慕容恪)의 남소성(南蘇城)으로 쳐들어가기는 하였으나, 전연이 중원장악에 주력함에 따라 전연과의 관계는 소강상태를 유지하였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370년 전진(前秦)이 전연을 격파하고 고구려와 국경을 접하게 되자, 고구려로 피신해 온 전연의 권신 모용평(慕容評)을 전진으로 압송하는 등 전진과의 우호관계의 수립에 노력하였다.
한편, 고국원왕은 한반도 중부지역으로 눈을 돌려 대방군(帶方郡) 지역으로 북진하고 있던 백제와 격돌하게 되었다. 그래서, 고국원왕은 369년에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백제를 침공하였으나, 치양(雉壤: 지금의 白川)전투에서 백제 태자 근구수(近仇首)가 이끄는 군사에 패배하였다. 또한, 371년 10월에 고구려 지역에 깊숙이 진격해 온 백제 근초고왕의 군사을 맞아 평양성에서 싸우다가 화살에 맞아 전사하여 고국원(故國原)에 묻혔다.
(제 17대) 소수림왕(小獸林, ?)
소수림왕은 소해주류왕(小解朱留王) 혹은 해미류왕(解味留王)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구부(丘夫)이다. 제16대 고국원왕(故國原王)의 아들로 355년(고국원왕 25) 태자로 책봉되었고 371년 부왕의 전사에 따라 17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소수림왕은 고구려 사회의 동요를 극복하기 위한 일련의 체제정비를 단행하였다. 즉 372년(소수림왕 2년)에는 전진(前秦)에서 온 승려 순도(順道)를, 374년(소수림왕 4년)에는 아도(阿道)를 통해 불교를 수용하였고, 375년(소수림왕 5년)에는 성문사(省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창건하여 이들을 거주하게 하였다. 한편 372년(소수림왕 2년)에는 유교교육기관인 태학(太學)을 설립하여 유교이념의 확대와 인재의 양성에 주력하였다. 뿐만 아니라 373년(소수림왕 3년)에는 국가의 기본법인 율령(律令)을 반포하였다. 이는 전통적인 관습법을 대신하여 성문법인 율령을 바탕으로 하여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의 확립에 기여하였다.
대외적으로는 374년(소수림왕 4년),375년(소수림왕 5년),376년(소수림왕 6년)에 잇따라 백제를 공격하는 등 전대에 이어 백제와 공방전을 계속하였다. 378년(소수림왕 8년)에는 거란족의 침략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연(前燕)이 멸망한 뒤 북중국의 강자로 등장한 전진(前秦)과 372년(소수림왕 2년)과 377년(소수림왕 7년)에 외교사절을 교환하고 불교를 수용하는 등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죽은 뒤에는 소수림(小獸林)에 묻혔다.
(제 18대) 고국양왕(故國壤, ?~391)
이름은 이련(伊連), 이속(伊速) 또는 어지지(於只支)이며, 국양왕이라고도 한다. 고국원왕의 아들이며, 광개토왕의 아버지이다. 형인 소수림왕이 후사가 없으므로 즉위하였다.
소수림왕 때에 여러 가지 제도를 정비하여 국력이 신장된 상황을 기반으로 하여, 고국양왕은 보다 적극적인 대외활동을 펼쳐나갔다. 우선, 후연에 공격적인 자체를 취하였다. 그리하여, 385년 6월에 4만의 군사를 이끌고 후연(後燕)을 공격하였다. 그런데, 이에 앞서 후연왕 모용수은 대방군왕 모용좌를 시켜 용성(지금 하북성 패현)을 지키게 하였다. 따라서 고구려군이 요동으로 쳐들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모용좌가 사마학경을 시켜 이를 막도록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군은 이를 격파하고 요동군과 제 3 현도군으로 들어가 이를 점령하고 남녀 1만 명을 사로잡아 왔다.『자치통감』권106의 호삼성(胡三省) 주에 의하면, 이 때에 "후연은 고구려를 능히 이기지 못하였다."라고 한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에 후연의 장수 모용농이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와 점령당했던 요동·현도 2군을 회복하였다. 이 때, 처음에는 유주·기주(모두 황하 이북)에서 유랑하던 백성들 중 많은 수가 고구려의 편을 들었으나, 모용농이 범양 출신 방연이란 사람을 요동태수로 삼자 그들을 다시 불러 편안히 살게 했다. 그리하여, 385년에 고구려가 차지했던 요동·현도 군은 다음해인 386년에 후연에게 다시 빼앗기고 말았다.
또한, 386년 3년 정월에 왕자 담덕을 태자로 삼았으며 8월에는 왕이 군사를 이끌고 남쪽의 백제를 공격하였다. 그 해 10월에는 초봄에 피는 복숭아꽃과 자두꽃이 피고 암소가 발이 여덟 개이고 꼬리가 둘인 새끼 말을 낳았다고 한다.
388년 4월에는 나라에 가뭄이 들고 8월에는 누리가 번성하였으며 다음해 봄에는 굶주린 백성들이 서로를 잡아먹었다고 한다. 그러자 왕은 창고의 곡식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389년 9월에 백제가 쳐들어와 변경의 부락을 약탈해 갔으며 다음해인 390년 9월에도 백제가 달솔(관명) 진가모로 도압성을 치게 해 2백 명을 잡아갔다.
한편, 『삼국사기』에 따르면, 392년에는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신라 내물 마립간에게 실성(實聖)을 인질로 보내도록 하였다. 또한, 불교신앙의 확대를 꾀하였을 뿐 아니라, 사직을 세우고 종묘를 수리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그 해 5월에 왕이 죽었으니, 고국양에 장사하고 시호를 고국양왕이라 했다.
(제 19대) 광개토대왕(廣開土, 374~413)
광개토왕은 고국양왕의 장남으로 375년에 태어났다. 이름은 담덕(談德)인데 중국측 기록에는 안(安)이라 전하고 있다. 고국양왕 재위 3년인 386년 태자에 책봉되었고 391년 고국양왕이 죽자 고구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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