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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사국사~조선사

廣開土好太王碑 釋文 및 飜譯 (광개토호태왕 비문) 광개토대왕비는 1880년경 중국 길림성 集安에서 발견되었으며, 1927년경 2층으로 碑閣이 만들어졌다. 사진 속의 광개토대왕비는 1927년 이전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비각은 1980년대에 새로 만든 것이다. 광개토대왕비는 장수왕 2년(414년)에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아들 장수왕이 건립했다. 높이 6.39m, 너비 1.5m, 두께 1.53m의 四面石碑(사면석비)이다. 일명 「好太王碑(호태왕비)」라고도 한다. 받침돌이 없이 碑身만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필체는 隸書體에 가까운 고구려 특유의 웅혼한 필체로 14∼15cm 정도 크기의 글자가 4면에 총 44행 (제1면 11행, 제2면 10행, 제3면 14행, 제4면 9행), 1775字가 새겨져 있다. 이 가운데 현재 알아볼 수 있는 글자.. 더보기
광개토대왕 비문 훼손-조작의 범인은 일본, 일본왕은 사죄하라 광개토대왕 비문 훼손-조작의 범인은 일본, 일본왕은 사죄하라 일본의 뿌리는 대한민족이며 일본의 고대역사는 없다 박병역 위원 ▲ ▶大韓國人아.! 일본은 왜 광개토비문을 훼손 했는가? [광개토대왕비문]에 광개토대왕 재위 10년 경자(400년)에 기마보병 5만 명을 신라에 파견하여 [한국 땅의] 신라성에 가득찬 왜적을 즉시 항복시켰다. 드디어 광개토대왕은 몸소 수군을 거느리고 대마도(임나가라)까지 쫓아가 대마도(임나가라) 신라성의 각 城(성)에 가득 찬 왜적들도 拔本(발본) 索出(색출)하여 즉시 항복시키고, 안라인을 술병하시었다. 고구려의 제19대 광개토대왕의 가장 큰 업적 부분의 왜(倭)와 관련된 기사(記事)의 [비문 제2면 10행과 제3면 1행에 □□□□와 같이 쪼아서 결락 자가 집중되어 있습니다. [1].. 더보기
고구려 태왕릉(광개토태왕)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 명문 전 고구려 태왕릉(광개토태왕)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 명문 전 高句麗 大兄 牛예陵永固 명문 전 http://blog.daum.net/kgyong55/5480234 더보기
칠성산 871호·천추총(千秋塚) ·도굴(盜掘)당한 서대총(西大塚) 더보기
고구려의 왕 - 해설부분은 개인의 추론임. 고구려의 왕1. 고구려에는 모두 28명의 왕이 재위하였다. 고구려를 세운 인물은 부여에서 이주한 주몽으로서 토착세력과 연합하면서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그러나, 계루부를 중심으로 집권력을 확립시키면서 강력한 일원적 정치제도를 정비해 나간 것은 태조왕에 이르러서이다. 또한, 태조왕 이후로 고구려는 대외적으로 영역을 확대시켜 동해안과 두만강 유역까지 진출을 시도하였고 서쪽으로는 한군현과 대결하였다. 또한, 대외적인 팽창과 함께 사회가 분화되고 왕위의 부자계승도 확립되었다. 4세기에 들어, 미천왕은 낙랑군과 대방군을 무찔렀으며 소수림왕대에는 중앙집권적 지배체제 확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소수림왕은 율령을 반포하고 태학을 세우며 불교를 공인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명설화를 바탕으로 고구려의 건국설화인 주몽.. 더보기
중국속의 백제 96년 10월 중순 중국 허난성(河南省)의 숭산(崇山) 소림사를 방문했을 때 일이다. 허난성의 수도 정주에서 대절버스를 빌려 낙양 방면으로 2시간 남짓 달리다가 소림사 입구 쪽에서 10분간 휴식시간을 갖고 있는데, 승객을 실은 일반버스가 마침 우리 일행 앞에 멈춰 섰다. 『저 버스 좀 봐. 「百濟(백제)」라고 씌어 있네』 누군가 소리쳤다. 분명히 버스 노정을 알리는 차창 간판에는 우리의 고대나라 백제와 한문글자 하나 틀리지 않았다. 허난성 소속인 그 중국버스는 분명히 인근의 백제쪽에서 소림사쪽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소림사행을 취소하고 그 버스로 「백제」라는 지명을 가진 마을을 찾아 그 연유를 캐고 싶었지만, 단체 행동의 제약 때문에 그럴 순 없었다. 숭산 소림사에서 무술시범을 보면서도 내.. 더보기
중국의 조선박씨 집성촌 중국에서 330~360여년 동안 ‘조선인’으로 살고 있는 박씨 집성촌이 3곳이나 있어 큰 관심거리가 되고 있다. 이들은 허베이성 칭룽셴(청룡현), 랴오닝성 가이셴(개현)과 번시셴(번계현) 등 만족(만주족) 자치현에 둥지를 틀고 있다. 맑은 물이 흐르는 산골에서 농사를 짓는 이들은 박씨끼리는 결혼하지 않는 풍습을 지키고 있다. 언어는 완전히 잃어버렸으나 집마다 족보를 고이 간직하고 있다. 중국화하긴 했으나 물김치와 된장이 이어지고 개고기와 매운 맛도 즐긴다. 만족과 한족에 둘러싸여 혈통도 만·한족과 섞여 있으나 조선인이란 의식은 핏속에 녹아 있다. 지난 12월 중순 세 마을을 찾아 이들이 사는 모습을 살펴봤다. △ △ 허베이성 조선족 박씨촌 칭룽현의 최고령자인 박만우(79)씨가 방안에서 ‘조선’(朝鮮)이라.. 더보기
[조선] 이순신에 대한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 [이순신 장군의 명언] 誓海漁龍動 盟山草木知 "바다에 맹세하니 어룡이 감동하고 산에 맹세하니 초목이 아는구나." '이충무공 전서' 중 15권에 실린 "진중음"으로 임금의 피난 소식을 접한 후 나라의 앞날을 근심하면서 충신의 굳센 의지와 장부의 기개 및 충혼을 표현한 말씀으로 원문은 "임금은 서쪽으로 멀리 가시고, 왕자님은 북쪽에서 위태한 오늘, 외로운 신하가 나라를 걱정하는 날이여! 이제 장사들은 공을 세울 때로다. 바다에 맹세하니 어룡이 감동하고 산에 맹세하니 초목이 아는구나. 이 원수 왜적을 모조리 무찌른다면, 비록 내 한 몸 죽을지라도 사양치 않으리라!' 이다. 勿令妄動 靜重如山 "가벼이 움직이지 말라. 침착하게 태산같이 무거이 행동하라." 1592년 5월 7일. 임진왜란 중 처음으로 출전한 옥포해.. 더보기
[고구리] 고구려 의상 복원 '고구려 복식문화'전 여는 숙명여대 채금석교수 더보기
[신라] 첨성대의 실체-첨성대는 천제를 지냈던 곳 [신복룡 교수의 한국사 새로보기-3]첨성대의 실체 요즘 일본에서 역사교과서가 국수주의적이라고 해서 말썽이 되고 있지만 역사교과서 문제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특히 삼국시대사의 문제는 논쟁의 여지가 많고 신비에 싸여 있는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는 사대주의자였던 김부식(金富軾)이 경순왕(敬順王)의 후손으로서 ‘삼국사기’를 신라 중심으로 썼다는 점, 둘째는 일본이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를 빙자해 신라를 식민지로 다스렸다고 확대 해석한 점, 셋째는 남북 분단으로 인해 남한은 고구려의 역사 연구에 소홀했고 북한은 신라의 역사 연구에 소홀했던 점을 들 수 있다. 이 결과 문화쪽에도 많은 왜곡이 유발됐다. 이를테면 국보 31호로 지정된 첨성대를 가리켜 동..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