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복룡 교수의 한국사 새로보기-3]첨성대의 실체
요즘 일본에서 역사교과서가 국수주의적이라고 해서 말썽이 되고 있지만 역사교과서 문제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특히 삼국시대사의 문제는 논쟁의 여지가 많고 신비에 싸여 있는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는 사대주의자였던 김부식(金富軾)이 경순왕(敬順王)의 후손으로서 ‘삼국사기’를 신라 중심으로 썼다는 점, 둘째는 일본이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를 빙자해 신라를 식민지로 다스렸다고 확대 해석한 점, 셋째는 남북 분단으로 인해 남한은 고구려의 역사 연구에 소홀했고 북한은 신라의 역사 연구에 소홀했던 점을 들 수 있다.
이 결과 문화쪽에도 많은 왜곡이 유발됐다. 이를테면 국보 31호로 지정된 첨성대를 가리켜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라고 기록한 것도 그러한 예 중 하나다.
▼"첨성대는 제천의식 지내던 제단"▼
첨성대란 과연 무엇일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먼저 첨성대의 실상을 알아 볼 필요가 있다. 우선 그 위치를 보면, 첨성대는 경주의 중심지로부터 동남쪽으로 30리 떨어진 평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옆으로는 반월성(半月城)을 끼고 있다. 석재는 화강암으로 높이는 9m17cm이며, 바탕의 지름은 5m17cm이고, 상층부의 지름은 2m50cm이다. 세워진 연대는 신라 27대 선덕(善德)여왕 16년(서기 647년)인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이제까지의 우리 국정교과서는 한결같이 첨성대를 천문대로 풀이했고, 우리는 이에 대해 아무런 저항도 느끼지 않은 채 ‘동양 최고(最古)’의 자부심을 가지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첨성대를 천문대로 보는 입장이 정설이 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풀어야 할 문제점이 있다.
첫째, 첨성대를 천문대로 보기에는 그 위치가 적합하지 않다. 별을 관측하기 위해서는 좀 더 높고 한적한 곳을 찾아가야 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첨성대는 경주의 평지에, 게다가 반월성을 끼고 있다. 별을 관측하겠다는 사람이 어떻게 낮은 지대에다, 성 아래 관측소를 세울 생각을 했을까?
▼내부 석재는 다듬지 않아▼
둘째, 돌의 다듬질에 문제가 있다. 햇빛이 잘 비치는 날, 첨성대의 남쪽으로 뚫린 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면 안쪽의 석재는 다듬어지지 않았다. 이 건축물이 안에서 사람들이 활동(관측)하기 위해서 지어진 것이라면 바깥 표면을 다듬지 않는 일은 있을 수 있어도, 안을 다듬지 않는 일은 있을 수가 없다.
더구나 위쪽으로 올라 갈수록 직경이 좁아져서 사람이 운신하기조차 협소한데 돌에 부딪쳐 생기는 부상을 막기 위해서라도 안을 다듬었어야 했다. 안을 다듬지 않고 밖을 다듬었다고 하는 것은 이 건물을 밖에서 사용하기 위해 지었다는 분명한 증거가 된다.
셋째, 첨성대는 별을 관측하기에 매우 불편하다. 첨성대의 정상에서 별을 관측할 요량이었다면 처음부터 사다리를 타고 위로 올라갈 일이지, 중간에 사람이 드나들기에 너무도 비좁은 문을 뚫어놓고 그리로 들어갔다가 다시 위로 올라가야 할 이유가 없다. 입구의 문지방이 마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문을 통해 사람들이 드나든 것은 분명하다.
넷째,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첨성대에 대해 일언반구의 언급도 하지않고 있다. 첨성대가 진실로 위대했고 의미있는 것이었다면 김부식이 언급하지 않았을 리 없다.
신라사에 대해 그토록 애착을 가지고 있던 일연(一然) 스님도 선덕여왕이 첨성대를 세웠다는 말만 남긴 채 일체의 부연 설명이 없었다는 점은 이해하기 어렵다.
다섯째, 첨성대의 용도를 최초로 설명한 사람은 아마도 조선시대 역사학자 안정복(安鼎福·1712∼1791)일 것이다.
그는 그의 저서인 ‘동사강목’에서 첨성대를 축조했다는 사실과 그것은 ‘천문을 살피고 요망스러운 기운을 살피기 위해’(候天文察뺼칒) 지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후대의 학자들이 안정복의 설명을 인용하면서 ‘천문을 살피고’라는 대목만 주목했지 정작 중요한 대목인 ‘요망스러운 기운을 살피기 위해’라는 구절을 누락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첨성대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것이 고대 부족 국가 시대의 제천 의식을 위한 제단이라고 믿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말한 안정복의 설명 중에서 ‘요망스러운 기운을 살피기 위해’라는 대목을 주목하고 있다. 그것이 제단이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나는 위에서 제기된 문제점들을 반증하는 방법을 따르고자 한다.
▼"요망스런 기운 살피는 곳"▼
첫째, 첨성대는 왜 평지의 성 밑에 위치했나. 어느 고대 국가든 당시에는 군사들이 전쟁터로 떠나기 앞서 승리를 기원하는 의식을 반드시 치렀다. 그 장소는 쉽게 의식을 치를 수 있는 성과 가까운 곳일수록 좋았다. 원시 국가에서 고대 국가에 이르기까지 전쟁은 종교적이고 축제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고, 거기에는 무속적이고 주술적인 요인이 필수적으로 가미될 수밖에 없었다.
둘째, 왜 김부식은 첨성대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일연도 설명하지 않았던가? 그것은 유학을 믿는 김부식이나 스님의 신분인 일연의 눈으로 볼 때 그 같은 제천 의식은 ‘음란한 짓’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셋째, 첨성대를 불교와 관련시키는 것은 무리다. 첨성대를 이루고 있는 27층의 적석(積石)이 점성술의 28수(宿)와 관련이 있다거나, 첨성대의 전체 층수인 31층인 것이 33천과 관련이 있다거나, 그 모양이 수미산(須彌山)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추측에 불과하다. 정말 관련이 있다면 28이나 33의 숫자에 딱 떨어지게 맞춰야지, 왜 27이나 31로 했을까. 이처럼 엇비슷한 숫자는 큰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다.
첨성대가 진실로 불교적 사고에서 축조되었다면 그 문은 서방 정토(淨土)가 있는 서쪽을 향했어야지 남쪽을 향해야 할 이유가 없다. 또 첨성대가 불교의 성지였다면 일연 스님이 외면했을리 없다.
넷째, 그렇다면 문은 왜 남쪽으로 났는가? 그것은 제주(祭主)와 부락민들이 그 앞에서 북쪽을 향해 제사를 드렸음을 의미한다. 북쪽의 무엇을 향해 제사를 드렸다는 말인가? 그것은 북두칠성이었을 것이며, 그 때문에 첨성대(瞻星臺)라는 이름이 붙여졌을 것이다.
북두칠성은 영원과 장생(長生)을 기원하는 노장(老莊) 사상의 상징이었으며, 첨성(瞻星)이라는 말도 ‘별을 관측한다’는 뜻이 아니라 ‘별을 우러러 본다’는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첨(瞻)은 ‘우러러 본다’는 뜻이다. 그들은 별을 우러러 보았지 꿰뚫어 본 것이 아니었다.
▼瞻星=별을 우러러 본다▼
넷째, 그러면 첨성대 맨 위에 있는 우물 정(井) 자는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글자 그대로 우물로서, 비를 기원하는 기우(祈雨)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관개가 발달하지 않고 천수답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농경 사회인 신라로서는 기우제야말로 중요한 국가 행사였다.
역사학이란 결국 풀이(解釋)의 학문이다. 따라서 이 풀이가 잘못되면 역사는 그 본래의 뜻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 갈 수밖에 없다.
첨성대가 별을 신앙적으로 우러러보던 곳이었는가, 아니면 과학적으로 관측하던 곳이었는가의 해석에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정신사로 볼 것인가 아니면 과학사로 볼 것인가를 결정하게 될 것이고, 이에 따라 그들의 결론은 전혀 다른 곳으로 흘러가게 될 것이다.
건국대 교수<정치외교사>
요즘 일본에서 역사교과서가 국수주의적이라고 해서 말썽이 되고 있지만 역사교과서 문제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특히 삼국시대사의 문제는 논쟁의 여지가 많고 신비에 싸여 있는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는 사대주의자였던 김부식(金富軾)이 경순왕(敬順王)의 후손으로서 ‘삼국사기’를 신라 중심으로 썼다는 점, 둘째는 일본이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를 빙자해 신라를 식민지로 다스렸다고 확대 해석한 점, 셋째는 남북 분단으로 인해 남한은 고구려의 역사 연구에 소홀했고 북한은 신라의 역사 연구에 소홀했던 점을 들 수 있다.
이 결과 문화쪽에도 많은 왜곡이 유발됐다. 이를테면 국보 31호로 지정된 첨성대를 가리켜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라고 기록한 것도 그러한 예 중 하나다.
▼"첨성대는 제천의식 지내던 제단"▼
첨성대란 과연 무엇일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먼저 첨성대의 실상을 알아 볼 필요가 있다. 우선 그 위치를 보면, 첨성대는 경주의 중심지로부터 동남쪽으로 30리 떨어진 평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옆으로는 반월성(半月城)을 끼고 있다. 석재는 화강암으로 높이는 9m17cm이며, 바탕의 지름은 5m17cm이고, 상층부의 지름은 2m50cm이다. 세워진 연대는 신라 27대 선덕(善德)여왕 16년(서기 647년)인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이제까지의 우리 국정교과서는 한결같이 첨성대를 천문대로 풀이했고, 우리는 이에 대해 아무런 저항도 느끼지 않은 채 ‘동양 최고(最古)’의 자부심을 가지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첨성대를 천문대로 보는 입장이 정설이 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풀어야 할 문제점이 있다.
첫째, 첨성대를 천문대로 보기에는 그 위치가 적합하지 않다. 별을 관측하기 위해서는 좀 더 높고 한적한 곳을 찾아가야 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첨성대는 경주의 평지에, 게다가 반월성을 끼고 있다. 별을 관측하겠다는 사람이 어떻게 낮은 지대에다, 성 아래 관측소를 세울 생각을 했을까?
▼내부 석재는 다듬지 않아▼
둘째, 돌의 다듬질에 문제가 있다. 햇빛이 잘 비치는 날, 첨성대의 남쪽으로 뚫린 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면 안쪽의 석재는 다듬어지지 않았다. 이 건축물이 안에서 사람들이 활동(관측)하기 위해서 지어진 것이라면 바깥 표면을 다듬지 않는 일은 있을 수 있어도, 안을 다듬지 않는 일은 있을 수가 없다.
더구나 위쪽으로 올라 갈수록 직경이 좁아져서 사람이 운신하기조차 협소한데 돌에 부딪쳐 생기는 부상을 막기 위해서라도 안을 다듬었어야 했다. 안을 다듬지 않고 밖을 다듬었다고 하는 것은 이 건물을 밖에서 사용하기 위해 지었다는 분명한 증거가 된다.
셋째, 첨성대는 별을 관측하기에 매우 불편하다. 첨성대의 정상에서 별을 관측할 요량이었다면 처음부터 사다리를 타고 위로 올라갈 일이지, 중간에 사람이 드나들기에 너무도 비좁은 문을 뚫어놓고 그리로 들어갔다가 다시 위로 올라가야 할 이유가 없다. 입구의 문지방이 마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문을 통해 사람들이 드나든 것은 분명하다.
넷째,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첨성대에 대해 일언반구의 언급도 하지않고 있다. 첨성대가 진실로 위대했고 의미있는 것이었다면 김부식이 언급하지 않았을 리 없다.
신라사에 대해 그토록 애착을 가지고 있던 일연(一然) 스님도 선덕여왕이 첨성대를 세웠다는 말만 남긴 채 일체의 부연 설명이 없었다는 점은 이해하기 어렵다.
다섯째, 첨성대의 용도를 최초로 설명한 사람은 아마도 조선시대 역사학자 안정복(安鼎福·1712∼1791)일 것이다.
그는 그의 저서인 ‘동사강목’에서 첨성대를 축조했다는 사실과 그것은 ‘천문을 살피고 요망스러운 기운을 살피기 위해’(候天文察뺼칒) 지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후대의 학자들이 안정복의 설명을 인용하면서 ‘천문을 살피고’라는 대목만 주목했지 정작 중요한 대목인 ‘요망스러운 기운을 살피기 위해’라는 구절을 누락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첨성대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것이 고대 부족 국가 시대의 제천 의식을 위한 제단이라고 믿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말한 안정복의 설명 중에서 ‘요망스러운 기운을 살피기 위해’라는 대목을 주목하고 있다. 그것이 제단이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나는 위에서 제기된 문제점들을 반증하는 방법을 따르고자 한다.
▼"요망스런 기운 살피는 곳"▼
첫째, 첨성대는 왜 평지의 성 밑에 위치했나. 어느 고대 국가든 당시에는 군사들이 전쟁터로 떠나기 앞서 승리를 기원하는 의식을 반드시 치렀다. 그 장소는 쉽게 의식을 치를 수 있는 성과 가까운 곳일수록 좋았다. 원시 국가에서 고대 국가에 이르기까지 전쟁은 종교적이고 축제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고, 거기에는 무속적이고 주술적인 요인이 필수적으로 가미될 수밖에 없었다.
둘째, 왜 김부식은 첨성대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일연도 설명하지 않았던가? 그것은 유학을 믿는 김부식이나 스님의 신분인 일연의 눈으로 볼 때 그 같은 제천 의식은 ‘음란한 짓’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셋째, 첨성대를 불교와 관련시키는 것은 무리다. 첨성대를 이루고 있는 27층의 적석(積石)이 점성술의 28수(宿)와 관련이 있다거나, 첨성대의 전체 층수인 31층인 것이 33천과 관련이 있다거나, 그 모양이 수미산(須彌山)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추측에 불과하다. 정말 관련이 있다면 28이나 33의 숫자에 딱 떨어지게 맞춰야지, 왜 27이나 31로 했을까. 이처럼 엇비슷한 숫자는 큰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다.
첨성대가 진실로 불교적 사고에서 축조되었다면 그 문은 서방 정토(淨土)가 있는 서쪽을 향했어야지 남쪽을 향해야 할 이유가 없다. 또 첨성대가 불교의 성지였다면 일연 스님이 외면했을리 없다.
넷째, 그렇다면 문은 왜 남쪽으로 났는가? 그것은 제주(祭主)와 부락민들이 그 앞에서 북쪽을 향해 제사를 드렸음을 의미한다. 북쪽의 무엇을 향해 제사를 드렸다는 말인가? 그것은 북두칠성이었을 것이며, 그 때문에 첨성대(瞻星臺)라는 이름이 붙여졌을 것이다.
북두칠성은 영원과 장생(長生)을 기원하는 노장(老莊) 사상의 상징이었으며, 첨성(瞻星)이라는 말도 ‘별을 관측한다’는 뜻이 아니라 ‘별을 우러러 본다’는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첨(瞻)은 ‘우러러 본다’는 뜻이다. 그들은 별을 우러러 보았지 꿰뚫어 본 것이 아니었다.
▼瞻星=별을 우러러 본다▼
넷째, 그러면 첨성대 맨 위에 있는 우물 정(井) 자는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글자 그대로 우물로서, 비를 기원하는 기우(祈雨)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관개가 발달하지 않고 천수답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농경 사회인 신라로서는 기우제야말로 중요한 국가 행사였다.
역사학이란 결국 풀이(解釋)의 학문이다. 따라서 이 풀이가 잘못되면 역사는 그 본래의 뜻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 갈 수밖에 없다.
첨성대가 별을 신앙적으로 우러러보던 곳이었는가, 아니면 과학적으로 관측하던 곳이었는가의 해석에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정신사로 볼 것인가 아니면 과학사로 볼 것인가를 결정하게 될 것이고, 이에 따라 그들의 결론은 전혀 다른 곳으로 흘러가게 될 것이다.
건국대 교수<정치외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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