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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Kor

한국의 옛지도-'조선팔도지도(朝鮮八道之圖)

[동영상]친일파 - 끝나지 않은 전쟁



시사 월간지 신동아는 만주 지역이 조선의 영토였음을 입증하는 유럽 고(古)지도가 대량으로 발견됐다고 보도했습니다.
이 기사에 따르면 경희대 부설 혜정박물관(관장, 김혜정교수)은 18세기 압록강-두만강 이북 집안, 간도지역이 조선의 세력권이었음을 보여주는 서양 고지도 69점을 발굴했다고 합니다. 신동아는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이 한반도 이북 지역에서 형성됐음을 보여주는 서양 지도가 이처럼 대량으로 나온 것은 처음"이라고 전했습니다.




1749년 프랑스 지리학자 당빌리(D’Anville)가 제작한‘et des Rojaumes de COREE ET DE IAPAN’ 지도. 한국 평안도(PINGAN·왼쪽 밑줄)가 압록강 이북의 현 중국 집안지역까지로 돼 있고, 함경도(HIENKING·오른쪽 밑줄)도 두만강 이북 간도지역을 포함하고 있다. 당빌리는 프랑스 왕립과학아카데미 회원이었다.


1801년 영국 지리학자 존 케리가 제작한 ‘A NEW MAP OF CHINA’.



1745년 키친(T. Kitchin)이 제작한 ‘A Map of QUAN-TONG or LEA-TONGE PROVINCE ; and the KINGDOM of KAU-LI  or COREA’ 지도. 동해를‘SEA OF KOREA’라고 표기했다.




1740년 예수회가 선교를 목적으로 프랑스어, 네덜란드어로 제작한‘La CHINE avec la KOREE et les Parties de la TARTARIE’ 지도.




1771년, ‘본 도법’으로 유명한 지리학자 본이 제작한‘CARTE DE LA TARTARIE CHINOISE’ 지도.




1778년 잔비어(Janvier, j. & Santini, F) 등이 제작한 ‘L、ASIE divisee en ses principaux Etats’아시아 지도. 중국과 한국의 국경선이 압록강, 두만강 이북에 형성된 것으로 나온다. 한국을 녹색 테로 둘러 ‘COREE’라고 표기했으며 동해는 ‘MER DE COREE’로 표기했다.




1794년 윌킨슨(R. Wilkinson)이 제작한 ‘CHINA, Drawn from the Latest & Best AUTHORITIES’ 지도.




1920년 로마교황청이 작성한 교구도.  원본은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한반도를 서울, 대구, 원산의 3개 교구로 나눴는데, 간도 지역이 ‘원산(Wonsan) 교구’에  포함돼 있어 간도와 한반도가  동일 생활권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1909년 일본 조선통감부  임시 간도파출소 잔무정리소가 제작한‘백두산 정계비 부근 수계 답사도’.  백두산(검정색 원) 정계비는“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을 압록강-토문강으로 한다”고 적고 있는데, 이 지도는 토문강(土門江·갈색 원)과 두만강(豆滿江·청색 원)은 다른 강이며,  두만강 이북에 토문강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220년 전인 1785년 일본의 대표적인 지리학자인 하야시 시혜이(林子平)가 제작한 '조선팔도지도(朝鮮八道之圖)'로 빨간선 안에 울릉도와 독도(우산국)가 하나의 큰 섬으로 그려져 있다.
목포대 역사문화학부 정병준 교수(40)는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영국정부의 자료를 발굴했다. 이는 2차 세계대전 전후처리를 위해 연합국과 패전국일본이 1951년 9월 8일에 조인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준비과정에서 유일하게 작성된 지도이자, 독도를 한국영토로 명백히 규정한 자료다.



 
1951년 9월에 개최된 샌프란시스코평화회담 직전인 그해 4월 7일 제작한 연합국 일원인 영국정부의 일본 영토지도에 다케시마로 표기된 독도는 한국 영토에 포함돼 있다. 사진에서 화살표로 표시된 부분이 다케시마로 표기된 독도이다.

그동안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평화협약에 일본영토를 확실히 하는 지도가 첨부되지 않았다는 빌미로 독도를 포함해 러시아와 북방 4개 섬, 중국과의 조어도 영유권 분쟁을 야기해 왔다. 또 부산외국어대 김문길 교수는 1785년 일본의 대표적 지리학자인 하야시 시혜이가 제작한 '조선팔도지도'를 발견했다며 27일 원본을 공개했다. 한반도 전체를 노란색으로 채색한 이 지도에는 북위 39도에 울릉도와 독도(우산국)가 하나의 큰 섬으로 그려져 있고, 울릉도 우측 바다가 '일본해'가 아닌 '동해'로 표기돼 있다.

 
조선팔도지도(朝鮮八道地圖) 18세기 말, 채색필사본, 169.0 * 93.0cm,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18세기 말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지도. 조선 후기 지도 발달에 큰 획을 그었던 정상기의 <동국지도>의 수정본 계열에 속하는 전조(全圖)이다. 각 도의 군현을 원으로 나타내고 바탕색을 구별함으로써 팔도의 경계를 구분하였다. 감영(監營), 병영(兵營), 수영(水營)은 사각형으로, 진보(鎭堡), 역(驛)은 작은 원으로 표시하였다. 우측 주기(註記:지리정보)에는 서울에서 각지에 이르는 거리를 수록하였다. 다른 전도와 달리 도로망을 그리지 않아 미완의 작품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18 ~ 19세기로 이어지는 조선전도의 발달과정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지도이다.
 
 
아국총도(我國摠圖, 여지도) 18세기 말, 채색필사본, 152.2 * 82.0cm,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정조대에 제작된 지도첩인 <여지도(輿地圖)>에 수록된 전국지도. 전체적인 윤곽은 정상기의 <동국지도>를 따르고 있다. 이 지도는 무엇보다 화려한 색채가 돋보이는데, 산줄기를 녹색으로 하천을 청색, 그리고 팔도의 군현을 색채를 다르게 하여 구분하였다. 또한 해안의 섬들이 아주 자세하게 그려져 있는데, 이 시기 도서 지방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고 있던 사회적인 분위기가 반영되어 있다. 지금의 독도가 울릉도 동쪽 동해에 우산도(于山島)라는 명칭으로 표시되어 있고 대마도도 그려져 있다. 지도의 여백에는 국토의 좌향(坐向), 동서와 남북의 길이, 사방(四方)의 끝에서 서울까지의 거리, 그리고 각 도의 군현 수가 기재되어 있다.
 
 
동국대지도(東國大地圖) 18세기 후반, 채색필사본, 252.5 * 139.5cm, 개인소장



 조선 후기 지도사에서 한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되는 정상기(鄭尙驥, 1678 ~ 1752)의 <동국지도>이다. 정상기가 제작한 <동국지도>는 대전도와 팔도분도가 있는데 현존하는 것은 대부분 팔도분도이고 대전도는 매우 드물다. 이 지도는 제척(梯尺)의 형태인 백리척을 사용하여 그린 대전도로서, 당시로서는 대축척지도인 약 1 : 42만 지도이다. 한반도 북부지방의 왜곡된 윤곽이 정상기의 지도에서 비로소 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 지도는 대전도를 후대에 전사한 것으로 초기의 지도에 비해 정교함이 다소 떨어지지만 원형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조선전도(朝鮮全圖, 동국대전도) 정상기, 1757년, 비단에 채색,  271 * 139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 지도는 1757년(영조 33)에 영조의 명으로 정상기의 <동국대전도>를 모사하여 홍문관과 비변사에 보관하도록 한 모사지도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산과 강, 섬 등 자연 지명과 군현 이름, 창고, 진보(진보), 찰방, 산성 등 인문 지명 및 중국과 일본 등 모두 2,580여 개의 주기(주기)를 담고 있다. 산맥의 표현은 백두산을 기점으로 남쪽으로 뻗어내린 백두대간을 크게 강조하고, 여기서 뻗어나간 주요 산맥들을 강조함으로써 국토를 인체(人體)로 인식하는 전통적 지리관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병영, 수영, 읍성, 진보, 찰방, 봉수 등을 기호화하고, 산성, 고갯길, 관문 등을 그림으로 표현한 진일보한 방식을 보이고 있으며, 이는 19세기 김정호에 의해 한 층 더 발전했다. 한편 지도에 육로, 해로, 고갯길을 나타내어 군사적, 경제적, 행정적 필요를 모두 수용했음을 보여준다.
 
 
해좌전도(海左全圖) 1850년대, 목판본, 97.8 * 55.4cm, 개인소장




 19세기 중반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표적인 목판본 조선전도. 지도의 윤곽과 내용은 정상기의 <동국지도>와 유사하며 산계(山系)와 수계(水系), 자세한 교통로 등이 동일한 수법으로 그려져 있다. 지동의 여백에는 백두산, 금강산, 설악산 등 10여 개의 명산의 위치와 산수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섬 정계비, 초량왜관(草梁倭館) 등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다. 그리고 고조선(古朝鮮), 한사군(漢四郡), 신라구주(新羅九州), 고려팔도(高麗八道)의 고을 수를 좌측상부의 여백에 기록하여 우리나라의 현재와 과거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한 지도로서, 목판 인쇄술에서도 뛰어난 솜씨를 보이고 있다.
 
 
 
조선방역지도(朝鮮方域之圖) 1557년, 채색필사본, 국보 제248호, 132.0 * 61.0cm,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국보 제 248호로 지정된 조선전기의 전도. 이 지도는 전국에서 올라오는 진상품을 관할하던 제용감(濟用監)에서 제작한 지도로 대마도(對馬島) 종가(宗家)에 보관해 오던 것을 1930년대에 조선사편수회에서 종가문서를 인수하면서 한국으로 되돌아 왔다. 조선 전반 세종대의 과학적인 지도제작 사업은 세조 때 정척과 양성지의 <동국지도>에서 결실을 맺었는데, 이 지도는 <동국지도>의 사본으로 추정된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제외하면 하계망이 비교적 정확하다. 산줄기는 풍수적 지리인식에 기초한 연맥으로 표현하였다.
 
 
해동팔도봉화산악지도(海東八道烽火山岳地圖), 17세기 후기, 채색사본, 218.0 * 149.0cm, 고려대 도서관 소장



 이 지도는 이전의 어느 지도보다도 색감을 중시해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처럼 아름다운 지도이다. 많은 산봉우리에 봉화가 촛불처럼 그려져 있는데, 특히 압록강, 두만강의 국경 지대에 밀집되어 있다. 주현읍치(州縣邑治) ·도로, 산천과 대소 산맥 ·준령(峻嶺) ·성곽 ·역참(驛站) ·봉수대 등을 그려 넣어 봉수의 직간선(直間線)을 한 번에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서해쪽의 네모 안에는 목멱산(木覓山:서울의 남산)을 중심으로 한 함경강원도래양주아차산봉수(咸鏡江原道來楊州峨嵯山烽燧) ·경상도래광주천림산봉수(慶尙道來廣州天臨山烽燧) ·평안도육로래모악동봉봉수(平安道陸路來母岳東峯烽燧) ·평안황해도수로래모악서봉봉수(平安黃海道水路來母岳西峯烽燧) ·충청전라도래양천개화산봉수(忠淸全羅道來陽川開花山烽燧) 등 5대 봉수로와 동서 및 남북의 길이, 서울에서 동서남북 주요지점까지의 거리 등이 표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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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색필사본, 19세기 전기, 96 x 65.5cm, 영남대학교 박물관 소장>
정상기가 만든 <동국지도> 유형의 조선 전도이다. 조선전도는 팔도를 모아 전국을 한눈에조망하고  휴대하기 간편하게 만든 것이다. 전도인 이 지도에 정상기의 발문과 축척인 백리척이포함되어 있어 지도상에서 거리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군현의 이름을 오방색으로 나타내고 있는데 경기는 순황색, 충청은 홍백생, 호남은 순홍색, 영남은 청홍색, 강원은 순청색, 해서는순백색, 관서는 백흑색, 관북은 순흑색으로 표현하였다.  지고에 산, 천, 지, 나루, 봉수, 창, 진, 산성, 창고, 절 등이 표시되어 있으나 도로망은 그려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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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건국 후 수도를 옮김에 따라 전국 지도, 세계지도, 각 도별 지도 등이 제작되었다.
특히 세종, 세도 시기의 과학기술의 발달과 지도제작에 대한 큰 관심은 유명한 지리학자였던
정척과 양성지가 <동국지도>를 완성 제작함으로써 큰 결실을 맺은 바 있다. 한 때 조선
초기에는 대체로 국가가 주관하여 지도를 편찬하였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 된 지도로서는
많은 국가의 고관들이 참가하여 제작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1402)가 있다. 이 지도는
<천하도>로서 상상적 세계관을 나타 낸 원형 세계지도로서 조선조의 특징적인 지도로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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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판본, 18세기 후반, 28.5 x 34cm, 영남대학교 소장>
 
      팔도 전도와 도별지도를 포함한 동람도 형식의 지도책 속에 실린 세계지도. 천하도는 조선에서
특히 유행하였던 원형의 지도이다. 지도의 중앙에는 중국, 조선이 포함된 중심대륙이 자리잡고
있다. 그 대륙을 바다가 둘러 싸고, 그 둘레에 다시 고리 모양의 대륙이 있으며, 그 바깥에는 대양이
둘러 싸고  있다. 천하도에는 실제 존재하는 지명 보다 대인국, 소인국, 여인국, 등 <산해경>에
나오는 상상의 지명이 많이 나타 난다. 이 지도는 서양에서 도입된 정사도법의 경위선을 추가하여
서양식 지도 기법을 가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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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판본, 16세기 후반, 26x 34.6cm, 영남대학교 박물관 소장>
 
      16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지도책 <동람도>제 1면에 수록된 우리나라 지도 전도.
동람도에는 우리나라 전도인 팔도총도와 도별지도 8매가 포함되어 있으며 판심에 '동람도'라 적혀
있다. 현존하는 동람도는 대부분 임진왜란 이후에 제작된 것에 비하여 이지도는 임진왜란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사료상의 가치가 매우 높다. '팔도 총도'는 지도의 길이가 동서가 남북의 길이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넓어 한반도 전체와 특히 북부지방이 남북으로 압축된 느낌을 준다.
 
 

 
 
우리나라 전체를 대산으로 하여 그린 조선저도는 우리 국토를 상징하는 지도로서, 한국을 대표하는 지도이다. 조선전도에는 선조들의 국토인식과 자연관이 반영되어 있음은 물론이고 지도의 완성을 가능하게 했던 과학지식의 수준, 지도제작의 기술, 예술적 표현능력 등이 반영되어 있다.

 조선전도는 조선 초기부터 국가적 사업으로 제작되었는데, 국가를 경영하기 위해서는 국토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조선시대에 새로 개척된 북방지역에 대한 인식이 고양될 수 있었다. 그 결과 15세기 중엽에 정척과 양성지의 <동국지도(東國地圖)>가 탄생되었으나, 실물이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방역지도(朝鮮方域之圖)>(국보 248호)가 남아 그 흔적을 전해준다. 또한 조선 전기 지리지의 집성편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동람도(東覽圖)>는 간략한 지도이나 민간에서 널리 애용한 점에 의의가 있다.

 조선 후기에 들어 민간의 뛰어난 지도학자들이 지도 제작에 심혈을 기울였다. 18세기 중엽 정상기(鄭尙驥)는 한반도의 윤곽을 거의 실제와 가깝게 그려내, 조선전도의 분수령을 만들었다. 이와 같은 정교하고 사실적인 지도와는 달리 <동람도>와 같은 소략한 형태의 지도가 민간에서 제작 유포되었는데, 역사부도 및 여행용 지도로서 폭넓게 이용되었다.

 1861년에는 당시까지 축적된 지도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가 탄생되었다. <대동여지도>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제작된 조선저도의 완성편으로, 독창적인 지도학적 기법과 표현방식, 목판 인쇄를 통한 지도의 대중화, 예술적 감각과 정확하고 풍부한 내용의 지도의 전도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자료>
『한국의 지도- 과거, 현재, 미래』 (국립지리원, 대한지리학회. 2000)
              『우리 옛지도와 그 아름다움』(한영우 외, 효형출판, 1999)
              『한국의 옛지도』- 영남대학교 박물관 소장 (영남대학교 박물관. 1998)



“간도협약 100주년 이전에 한국 영유권 국제사회에 고증해야”

오는3월 문을 여는 경희대 수원캠퍼스 내 혜정박물관은 600여점의 동·서양 고(古)지도를 고루 갖췄다. 모두 김혜정(金惠靜·58) 박물관 관장이 수집한 것들로, 이중엔 주목할 만한 지도들이 있다. 18세기 압록강·두만강 이북의 집안 및 간도 지역을 조선이 관할했음을 보여주는 서양 고지도 69점이 그것이다. 모두 지금껏 공개되지 않은 지도들이다.

그간 국내 학자들이 간도가 조선 영토였음을 보여주는 옛 지도들을 간헐적으로 알려왔지만, 대량으로 공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 지도들은 당시 동아시아 국경 문제를 중립적으로 바라본 서양 지리학자들이 제작한 것이라 의미가 크다. 김혜정 관장은 “이번 지도 공개를 계기로 간도 영유권 논란에 대해 많은 한국인이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고 기대했다. “간도 문제는 ‘잃어버린 한국 근대사’의 참모습을 복원하는 일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박물관의 전시품 보관창고에는 칸마다 고지도와 관련 사료들로 꽉 차 있다. 한 사람이 이를 모두 채우기란 쉽지 않았을 듯싶다. 김 관장에게 지도를 수집한 경위를 물어봤다.

“30여 년이 걸렸습니다. 경비도 수십억원 들었죠. 중국만 60여 차례 방문했고, 일본과 유럽도 해마다 들렀습니다. 해외에 나갈 때마다 고서점, 골동품가게 등으로 한국이 표기된 동·서양 고지도를 찾아다녔습니다. 그렇게 16세기에서 20세기까지 시대별로 빠짐없이 지도를 수집했는데, 모두 원본입니다. 세계적으로도 혜정박물관은 서양 고지도를 가장 많이 보유한 기관 중 하나입니다. 특히 한국이 표기된 서양 고지도는 거의 대부분 수집했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김 관장은 “그처럼 많은 시간과 자금을 투자해 수집할 정도로 고지도가 매력 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서양 고지도는 객관적 증거물”
“기능을 강조하는 요즘 지도와 달리 옛 지도는 우선 아름답습니다. 색채, 디자인의 예술적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 지도엔 국가와 민족의 뿌리가 담겨 있어요. 예를 들어 최근 미국 의회는 ‘아메리카’라는 지명이 최초로 표기된 16세기 세계지도 한 장을 구입하기 위해 1700만달러를 제시했지만, 지도를 가진 독일인은 판매를 거절했습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아메리카’를 국명으로 사용하는 나라가 최초의 ‘아메리카’ 표기 지도를 갖고 있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따라 그것의 상징적 의미가 달라지지요. 지도의 보유 여부는 때로는 국가의 자존심과도 결부되는 사안입니다. 또한 지도는 당대를 살던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인정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줍니다. 역사적 사실을 규명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한다는 것이죠.”

2년여 전 김혜정 관장은 일을 한번 낸 적이 있다. 동해 표기를 둘러싸고 한국과 일본 간에 논란이 일었을 때 동해를 ‘동해’ ‘한국해’ ‘고려해’ ‘조선해’ 등으로 표기한 서양 고지도 50여 점을 일시에 공개, 전시한 것.

“객관적 증거자료를 제시하면서 국제사회를 설득해야 합니다. 그러기엔 서양 고지도만한 게 없죠. 당시 고지도 전시장을 둘러본 일본 수학여행단 학생들은 문화충격에 빠졌습니다. ‘일본해’로 표기하는 것이 절대로 옳다고 믿던 상식이 절반쯤 깨져 나갔기 때문입니다. 최근 서구 국가들이 동해 표기를 병기하는 것은 한국의 국력이 커진 탓도 있지만, 상당 부분은 ‘서양 고지도를 발굴한 힘’에서 나온 것입니다. 서양인들이 보기엔 자신들의 선조가 만든 수많은 지도가 ‘동해’라고 표기하고 있는데, 더 이상 어떤 설명이 필요하겠습니까.”

●30년간 전세계 돌며 ‘간도는 조선’ 입증하는 서양 고지도 구입
●18세기 압록강·두만강 이북 지역은 조선인 생활권
●중국 논리 뒤집는 ‘두만강·토문강 별도 표기’ 지도
●서구 유명 지리학자들이 측량, 중국 황제도 지도제작 지원


“현 ‘조선족자치주’는 실제 조선땅”
고지도가 가진 ‘증거물’로서의 가치는 간도 영유권 논란에도 적용된다는 것이 김 관장의 주장이다. 1712년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을 확정한 백두산정계비엔 ‘압록강과 토문강을 조선과 청의 국경으로 삼는다’고 적혀 있는데, 중국은 토문강이 곧 두만강이라며 간도 영유권 논란을 일축한다.

반면 한국 사학계는 “토문강은 백두산에서 발원해 북쪽의 만주로 흐르는 강으로, 두만강과는 별도로 존재하는 강”이라고 반박한다. 한국측 고증에 따르면 토문강이 국경이 될 경우 현재 중국 조선족자치주(남한 면적의 3분의 2)의 상당 부분이 조선의 영토였음이 인정된다. 이와 관련, 김혜정 관장은 토문강과 두만강을 별도 표기한 조선통감부의 미공개 지도 원본을 이번에 새로 공개했다.

1909년 일본은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체결, 간도지역을 청나라에 양도했다. 이에 대해서도 한국 학계는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을사보호조약이 고종 황제의 위임장이 없는 등 국제법상 무효이므로, 이를 근거로 한 국가간 외교조약인 간도협약도 무효”라는 주장을 편다.

김혜정 관장이 이번에 공개하는 69점의 간도 관련 서양 고지도는 18세기 이후 간도, 집안 지역이 조선의 영토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혜정박물관의 오일환 박사(역사학)는 간도 관련 서양 고지도의 제작경위와 지도상의 영토 표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혜정박물관이 확보한 지도들은 프랑스 왕립과학아카데미 회원인 당빌리, 영국 지리학자 존 케리, 본 도법(圖法)으로 유명한 프랑스 지리학자 본, 윌킨스 등 당대를 대표하는 서양 지리학자들이 1700년대 중반 동아시아 일대를 표기한 지도들로, 모두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 일부 지역을 조선의 관할권으로 기록하고 있어요. 백두산정계비로 조선-청나라 국경이 확정(1712)된 이후 제작된 것입니다.

당빌리를 비롯 서구 지리학자들은 강희제(康熙帝) 등 청나라 정부의 지원으로 측량한 뒤 지도를 제작한 것이어서 중국측 주장이 많이 반영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요. 그런데도 69점에 이르는 당시의 서양 지도는 조선-청나라 국경이 만주에서 형성됐다고 기록하고 있어요.

두만강 이북의 간도 지역은 조선 함경도 관할로 돼 있습니다. 압록강 이북 집안지역도 조선 평안도의 일부로 돼 있고요. 청나라가 ‘봉금지역’으로 설정해 자국민인 한족(漢族)의 통행을 제한한 압록강, 두만강 이북 지역이 사실상 조선인들의 생활무대였음을 당시 서양 지리학자들과 중국인들이 인정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서양 지리학자들은 한반도가 중국-일본 간 전면 전쟁의 무대가 된 임진왜란 이후 한반도와 만주 지역을 지도에 정교하게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일본과 만주국이 패망한 1945년 이후 60년간 실효적으로 중국이 간도 지역을 점유하고 있는데다, 간도와 접경한 한반도 북부에 주권이 미치지 못해서 한국은 그동안 간도 영유권 문제를 심각하게 논의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김혜정 관장은 “그러나 2004년 중국이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킨 이른바 ‘동북공정’을 전개한 것은 한국에게 한반도 주변 고대사(고구려사)와 근현대사(간도영유권)의 사실관계를 정확히 구명해야 할 당위성을 제공한다”고 말했다. 고구려사 문제와 간도 영유권 논란의 사실관계를 밝혀 국내외에 알리는 일에 당사자인 한국이 적극 나서야 할 때가 됐다는 것이다.

외교부 장관에게 전달된 간도 자료
지난해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은 “간도협약은 법리적으로 무효”라고 공개적으로 밝힌 바 있다. 확대해석을 경계했지만 간도 영유권 문제에 침묵으로 일관해온 한국 정부로선 진일보한 변화였다. 이런 발언은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었다. 김혜정 관장은 반기문 장관이 이 발언을 하기 며칠 전, 반 장관에게 간도 지역이 조선 영토임을 입증하는 서양 고지도들과 사료들을 전달하면서 간도 문제에 관심을 가져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간도협약은 2009년이면 체결된 지 100년이 된다. 김혜정 관장은 “이젠 간도 영유권 문제를 덮어둘 여유가 없다”고 말했다. “국가간 조약(간도협약)은 100년이 지나면 문제를 제기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그 전에 간도지역 영유권 문제를 국제사회에 이슈로 제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 관장은 “간도 영유권에 대한 구체적인 고증을 지금부터라도 해야 한다. 간도는 한-중 간 영유권 논란 지역”이라고 말했다.

기사제공= 신동아 허만섭 기자
mshue@donga.com
사진제공= 경희대 박물관
 
 
'한반도 괴지도'의 비밀
우연히 접하게 된 구한말의 괴지도.
간도는 물론 만주 ~ 연해주 ~ 흑룡강성까지 조선의 영역으로 표기한 이 지도의 정체는?
3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가려졌던 한반도 국경의 진실이 서서히 드러나는데….


# 프롤로그

구한말 괴지도의 존재를 처음 알게된 것은 지난 7월 11일. 고종의 증손자이자 의친왕의 손자인 이초남씨의 입을 통해서였다. ‘마지막 황실’에 관해 이야기하던 이씨가 화제를 바꿔 “궁궐서 나온 지도를 갖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 그는 “이경길 숙부(작고·의친왕의 여덟째 아들)로부터 한 장의 지도를 건네받았다”며 “(숙부께서) 돌아가시기 전, 내 손을 꼭 잡고 지도를 넘겨주면서 ‘소중히 보관하라’고 당부하셨다”고 말했다.

이초남씨는 이 지도에 관해 “북으로 만주와 길림성 일대는 물론 연해주와 흑룡강성 일부까지 조선 영역으로 표시한 귀중한 자료”라며 “이것은 만주 일대가 우리 땅이었다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는 “지도가 학계에 공개된 것이냐”는 질문에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안다”고 답했다.
▲ 대흥안령 산맥서 본 만주벌판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뉴스’였다. 물론 이 한 장의 지도가 ‘만주는 우리 땅’이란 물증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한반도 이남에 국한돼 있던 우리의 국토관을 만주 이북으로 넓힐 수 있는 ‘단초’는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의욕이 생겼다. 하지만 이 한 장의 ‘괴지도’로 인해 조선말~구한말에 얽힌 국사 공부를 다시 하게 될 줄은, 그 때까지만 해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 ‘괴지도’와의 만남

이초남씨를 두 번째로 만난 날은 장마 직전의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7월 16일이었다. 이씨는 지도에 관해 “교황청에서 파견된 선교사가 조선에 교구를 세운 뒤, 그 내역을 바티칸으로 보고하기 위해 작성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교구를 표시하다보니 지도를 그리게 된 것이고, 지도를 그리다보니 조선의 영토를 표시하게 됐을 것”이라며 “이후 파견된 또 다른 선교사가 원본을 사필(寫筆)해 황실에 갔다 줬다”고 말했다. 이씨는 “따라서 지도 원본은 바티칸에 보관돼 있고, 내가 갖고 있는 것은 그것의 필사본”이라고 주장했다.

우선 확인해야 할 것은 이씨 증언의 사실 여부였다. 설사 그의 말이 사실이라 해도 그 사실과 역사적 진실은 또 다른 이야기가 된다. 문제는 또 있었다. 원본을 작성했다는 선교사의 ‘그림’을 100%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 하는 의문이었다. 전문가의 감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먼저 문제의 지도를 확인해야 했다. “지도를 보고싶다”고 말하자 이초남씨는 “사본을 복사해 주겠다”고 했다. ‘먼저 실물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이씨는 “지도를 보관해둔 장소가 경기도 용인”이라며 “시간이 촉박하면 또 다른 사본을 갖고 있는 사람과 만나게 해 주겠다”고 말했다.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시 지도를 사필해 온 선교사가 사본을 여러 장 갖고 왔다고 합니다. 황실을 통해 제게 전달된 것도 그 중 하나지요. 또 다른 한 장은 이종진 박사가 보관하고 있습니다. 이 박사는 치과의사이면서 동시에 ‘해외 한민족 연구소’ 이사로 있는 아마추어 사학자이자 지도 수집가입니다.”

야릇한 상황이었다. 일단은 그의 말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종진 박사에게 전화를 걸어 약속을 잡았다. 이초남씨도 자리를 함께 했다. 7월 18일 밤이었다.

# 확대되는 의문

▲ 흑룡강성 일대까지 조선의 영역으로 표기한 문제의 괴지도
문제의 괴지도 이름은 ‘조선말의 한국지도’였다.<사진1> 이 지도에는 ‘주후(主後;서기) 1824년 9월 9일(순조 24년)… 로마교황 그레고리오 16세 조선교구 제정’이란 부제가 붙어있었다. 이종진 박사는 길이 80㎝ 가량의 지도를 실물크기로 복사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 지도는 만주뿐 아니라 연해주까지 조선의 땅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조선의 영역이 사실은 이렇게 광대한 것이었어요. 일제에 의해 우리 역사의 진실이 상당부분 가려져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를 보세요.” 이 박사는 지도 오른쪽에 붙어있는 해설을 가리켰다. 거기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 地圖는 VATICAN 政廳이 韓國에 있어서의 敎區의 管轄領域을 표시한 地圖이다. 本地圖는 PARIS에서 Societe des Mission Etrangeres가 發行한 Catholicism en Coree에 揭載하였던 實物大複寫?인 것이다.(1924)… 중략… VATICAN 政廳은 이 地域이 歷史的으로 長久한 기간 韓國民族이 居住해 왔으며 大韓帝國의 領土임이 명백하므로 朝鮮敎區로 대건교구·서울교구·원산교구(間島 吉林 CHIAMUSS KYUNGHUN 等地) 延吉 牧丹江北端은 하바로프스크(HABAROVSK) 接境까지 東界는 우스리江까지 西北界는 숭그리江으로 표시되어 있다. (東京韓國硏究院國境資料地圖K 1?) 明知大學校 出版部 複寫解說”

“바티칸 교황청에서도 조선의 영토가 이러했다는 사실을 适ㅗ杉募?이야기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가 이런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으니…. 통탄할 일이지요.” 이 박사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 기자, 연해주 이북~흑룡강성 일대까지 조선의 영역으로 표기한 지도는 이것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박사는 액자에 보관된 또 하나의 지도를 가리켰다.

“여기 보세요. 교황청 지도하고 같죠? 이 지도는 아까 지도보다 100여년 전인 1700년대에 제작된 것입니다. 이 지도도 흑룡강성 일대까지 조선의 땅으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 <사진2>18세기 영국서 제작한 아시아전도.흑룡강성 일대를 조선에 포함시켰다.<사진3>1769년 프랑스에서 제작한 아시아지도.압록~두만강 이북의 간도 일부를 조선의 영역으로 그렸다.<사진4>러시아에서 1854년에 제작한 아시아전도.만주 일부를 조선의 땅으로 표기했다.
이 박사가 보여준 지도<사진2>는 영문으로 된 고지도였다. 오른쪽 위에 별도의 명칭 없이 ‘Asia, T. Jeffery, Sculp’라고 적혀 있었다. T. Jeffery라는 사람이 작성한 아시아 지도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위쪽 구석엔 170 degrees East Long from London이라 쓰여 있었다. ‘런던 동쪽 170도’라는 표기로 미뤄 영국서 만들어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지도는 이 박사의 말처럼 지금의 흑룡강성 일대를 조선의 영역으로 표시하고 있었다.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은 동해를 ‘Sea of Coree’라 적은 점이었다. 이것은 당시 해양강국 영국서 이 바다를 ‘일본해(Sea of Japan)’가 아닌 ‘동해’로 불렀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게 원본입니까? 어디서 구하신 거죠?” 이 박사에게 물었다.

“영국 고물상을 통해 구한 것입니다. 입수 과정을 상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아주 귀중한 자료예요. 이 지도는 당시 서양 사람들도 만주 일대가 조선 땅이란 점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어때요? 흥미진진하죠?”

그랬다. 흥미진진했다. 하지만 개운치가 않았다. 이초남씨나 이종진 박사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 역사책이 잘못됐다는 이야기가 된다. 현재의 한반도 영토는 조선 세종 때 ‘4군6진’을 개척하면서 경계가 이뤄진 것으로 기록돼 있다. 세종 이후 다시 북방으로 영토를 확장했다는 기록은 나와있지 않다. 만주 일대가 조선의 땅이었다면 왕실은 마땅히 행정구역을 설정하고 관리를 임명해 이 지역을 다스렸어야 한다. 하지만 조선이 만주 일대에 관리를 보낸 기록은 “1813년 어윤중을 서북경락사로 삼아 백두산 정계비를 조사하게 했다”는 것과 “1902년 이범윤을 관리사로 임명해 간도로 파견했다”는 것 정도다. 게다가 이범윤의 파견 목적은 영토 통치가 아니라 간도지방의 ‘동포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눈앞에 나타난 2장의 지도는 무엇인가? 새로운 역사적 사실이 정말 존재하는 것인가? 복잡했다. 우선 해야할 일은 ‘사실’을 밝히는 일이었다. 서둘러 전문가에게 감정을 의뢰했다.

# ‘간도’의 주인

가장 먼저 답을 준 사람은 “이 지도를 본 적 있다”는 동국대학 역사교육과의 임영정 교수였다. 임 교수는 “7~8년 전 이종진 박사를 만난 기억이 난다”며 이렇게 말했다.

“조선인이 간도로 이주해 간 것은 1600년대부터입니다. 그 시기엔 영토관념이 희박해서 국경이란 것이 무의미 했었어요. 그러다 일본이 1909년(순종 3년) 9월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맺으면서, 간도일대를 만주국 영토로 편입시켰습니다. 그 전에는 간도를 조선 땅으로 간주하고 있었어요. 이런 사실은 일본에서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사다(朝田)란 일본인이 쓴 ‘간도 파출소 기요’란 책에도 이런 내용이 있고, 일제 때 일본 정보부나 일본 육군이 작성한 지도들도 북간도를 조선 영역으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재미학자 유영박씨가 쓴 ‘녹둔도 연구’란 논문에도 잘 나와 있습니다.”

녹둔도는 조선말까지 ‘경흥지방’에 속해 있던 두만강 하구의 섬으로 여진을 견제하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홍수가 잦아지면서 토사가 쌓여 연해주와 연륙되자 영유권 문제가 발생했다. 1860년 청과 러시아는 당사자인 조선을 배제한 채 북경조약을 체결, 녹둔도를 러시아 영토로 편입시켜버렸다.

하지만 임 교수는 문제의 ‘괴지도’에 관해서는 명쾌한 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흑룡강성 일부까지 조선의 영역으로 표시한 지도는 흔하지 않다”면서도 “(문제의 지도에 대해서는) 진위 여부를 명확하게 말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다른 전문가의 답변을 구해야 했다. 지도 전문가인 국사편찬위원회 이상태 교육연구관에게서 ‘괴지도’의 감정을 들은 것은 다음날인 7월 22일이었다. 이상태 교육연구관은 “당시 간도 지역은 주인없는 땅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중국 입장에서 간도는 변방에 있는 척박한 땅으로, 일종의 버려진 땅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땅이었지요. 백두산 정계비가 세워지기 전까진 사람들의 의식상 만주를 조선의 땅으로 간주해 왔습니다. 이 시기까지는 대부분의 지도가 만주를 조선 영역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간도가 조선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백두산 정계비(定界碑)란 1712년(숙종 38년) 백두산에 세운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경계비를 말한다. 이?계기로 조선과 청은 서쪽으로는 압록강을, 동쪽으로는 토문강(西爲鴨綠, 東爲土門)을 경계로 삼게 된다. 170년이 지난 1881년(고종 18년) 청은 간도개척에 착수했다. 조선은 1883년 어윤중·김우식을 보내 정계비를 조사한 뒤, 이중하·조창식 등을 보내 간도가 조선의 땅임을 주장했다. 하지만 청은 “동쪽 경계로 삼은 ‘토문(土門)’은 두만(豆滿)강을 말한다”고 주장해 해결을 보지 못했다. 백두산 정계비는 만주사변 때 일제가 철거해버렸다.

# 쏟아지는 기록들

“그런데 이 지도는 약간 이상하네요.” 이 연구관이 말을 이었다.

“조선 교구를 그렸다는 이 지도<사진1> 말이에요. 이것이 쓰여있는 대로 1824년에 나왔다면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조선에 교구가 세워진 것은 1830년대 일이거든요. 서울·원산 교구 등으로 나뉜 것은 1900년대 일이고요. 이 지도에는 경도와 위도가 표시돼 있는데, 경·위도가 나온 조선 지도는 1910년대에 등장합니다. 오른쪽 주해에 보면 이 지도에 대해 ‘파리 외방정교회(Societe des Mission Etrangeres)가 발행한 한국의 가톨릭(Catholicism en Coree)에 게재된 것’이라 설명하고, 괄호 안에 1924년이라 써 놨는데요. 1924년 지도라면 설명이 되지만, 1824년 것이라면 잘못된 겁니다.”

이 연구관은 말을 이었다. “국정홍보처가 영국 옥스퍼드·케임브리지 대학과 공동으로 대대적인 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때 조선의 영역을 압록·두만강 이북까지 그린 지도 37점이 대량 발견됐다는 사실이 보도(1999년 6월 26일)돼 주목을 받기도 했습니다. 만주가 우리 땅이란 의식은 ‘동국여지승람’ 전문에 잘 나와 있습니다. 양성지, 노사신 등의 학자는 ‘우리 국토가 (삼천리가 아니라) 만리(萬里)’라고 했고, 서거정은 고려 영토에 관해 ‘동북방 선춘령(先春嶺)을 경계로 고구려 지역을 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윤관이 두만강 건너 700리 선춘령에 9성을 쌓고, 그곳에 고려지경(高麗之境)이란 비석을 세웠다’는 고려사의 기록도 있습니다. 만주를 우리 영역으로 그린 지도도 여러가지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국보 248호인 ‘조선 방역도’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지도는 왜 당시의 영토를 한반도에 국한해서 그리고 있는 겁니까?”
“지도는 그리는 목적(교통지도, 등고선지도 등)에 따라 약간씩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를 그리는 지도라면 마땅히 당시 상황을 기준으로 해서 그려야 하죠. 저도 그 점이 안타깝습니다.”

“언제부터 지금처럼 그리게 됐습니까?”

“우리나라에 근대적 개념의 지리부도가 들어온 것은 일제 때 일입니다. 값싸고 질좋은 지도책이 대량 유통되면서 재래식 전통지도가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지요.”

# ‘괴지도’의 정체

괴지도를 갖고 있는 이종진 박사는 “조선말의 한국지도란 이름과 ‘주후(主後) 1824년 9월 9일(순조 24년) 로마교황 그레고리오 16세 조선교구 제정’이란 부제는 지도 입수 후 덧붙인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지도는 1924년에 제작된 것으로 봐야 한다. 하지만 지도의 진위 여부는 여전히 남은 숙제였다. 지도 전문가인 성신여대 양보경 교수에게 다시 감정을 의뢰했다.
“바티칸에서 작성한 것이 사실이라면 당시 흑룡강성까지 한인이 이주해 있었다는 사실을 교황청에서 인정한 것이 됩니다. 조선의 영향권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요. 하지만 만주 일대가 조선의 행정구역은 아니었어요. 게다가 교구를 그린 지도가 국경을 바르게 표현했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그리고 영국에서 그렸다는 세계지도<사진2> 말이에요. 당시 서양 고지도는 국경을 표시하고 있는 것이 드물어요. 이 지도의 경우, 지금 상태로 봐서는 이 경계가 국경인지 하천인지 불분명합니다.”

‘조선말의 한국지도’에 해설을 붙인 것으로 돼 있는 명지대 출판부의 답변은 상황을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관련 자료나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괴지도’의 정체가 밝혀진 것은 한국교회사연구소를 통해서였다. 지도를 검토한 연구소의 최기영 실장은 “이 지도는 1924년 파리 외방정교회가 영문·불문판으로 발행한 것”이라며 “한국의 가톨릭(Catholicism en Coree)이란 인쇄물에 별지로 들어가 있던 지도”라고 말했다. 최 실장은 “원본은 흑룡강성 부분이 지도 오른편에 별도로 붙어있었다”며 “이 사본은 누군가가 그것을 지리적 위치에 맞게 잘라붙인 것”이라고 말했다.

괴지도의 정체는 ‘유사복제품’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개운치 못한 것은 여전했다. 간도를 조선땅으로 그린 수많은 지도들, 국보인 조선방역도, 동국여지승람과 고려사의 기록들, 윤관이 쌓았다는 선춘령, 고려지경(高麗之境)이란 비석…. 이 유물들이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궁금증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 잃어버린 역사

문제는 1712년 세워진 ‘백두산 정계비’였다. 청을 세운 만주족은 자신들의 시조가 백두산에서 비롯됐다고 여겼다. 그들은 백두遠?장백산이라 부르며 신성시했고, 한족이 만주 일대로 출입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이른바 ‘봉금(封禁)정책’을 편 것이다. 하지만 이민족의 유입은 계속됐다. 농지 등과 관련된 분쟁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1712년(숙종 38년) 5월, 강희제는 국경을 명백히 하려는 목적으로 ‘오라총관’ 목극등을 파견했다. 오라(烏刺)란 만주 일대를 일컫던 당시 표현이다. 조선은 참판 박권을 접반사(接伴使)로 임명해 일을 처리하게 했다. 하지만 목극등은 “100리가 넘는 산길을 노인이 가기 어렵다”며 박권을 따돌린 채, 군관 이의복 등 조선의 하급관리만을 동행해 정계비를 세운다. 이때 새겨진 비문이 유명한 ‘서쪽은 압록을, 동쪽은 토문을 경계로 한다(西爲鴨綠, 東爲土門)’는 것이다.

중국과 한국 양측은 ‘토문’의 해석을 놓고 ‘두만강이냐, 송화강 지류인 토문강이냐’에 관한 논쟁을 벌였다. 송화강 지류로 국경이 설정될 경우, 만주 일대는 물론 흑룡강성 일부를 아우르는 광대한 지역이 한국의 영토가 되는 것이다.

논란을 거듭하던 한·중 국경문제에 끼어든 ‘이방인’은 일본이었다.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제는 만주철도 부설권을 얻는 대가로 1909년 ‘간도협약’을 체결, 간도를 청에 넘겨버렸다. 이같은 사실은 외교부가 1996년 1월 15일 공개한 ‘외교문서 251건’에 포함된 ‘간도문제와 그 문제점’이란 비밀해제 문서를 통해 사실로 밝혀졌다. 이 보고서는 일본이 ‘간도지방이 조선의 영토라는 점을 전제로 정책을 폈다’는 사실을 명확히 밝히고 ‘일본이 남만주 철도의 안봉선 개축문제로 이해가 대립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간도를 희생시켰음’을 확인해줬다.

‘간도협약의 법적 지위’를 연구하는 인천대학 노영돈 교수(국제법)는 “협약 자체가 무효”라고 주장한다. 노 교수는 “을사조약은 말 그대로 ‘보호조약’의 성격을 갖고 있다”며 “따라서 조선 국익에 저해되는 행위는 조약이 명시한 일제의 권한 밖의 일이므로 유효하지 않다”고 말했다.

“간도협약은 조약 체결권자인 대한제국 황제의 비준을 받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카이로·포츠담 선언, 샌프란시스코 조약 등을 통해 일제가 식민지에서 처리한 모든 조약이 무효화 됐습니다. 그런데 유독 간도협약 만큼은 예외로 있는 것이지요.”

노 교수는 “국제법 이론상 통상적으로 100년 이상 어떤 지역을 점유하면 점유지에 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기준을 어느 시기로 삼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1909년 간도협약을 기준시점으로 삼을 경우, 2009년이 되면 간도의 영유권은 중국으로 영구히 넘어갈 가능성이 있게 된다. 6년이 채 남지 않은 것이다.

“언론이나 학계에서 아무리 얘기해도 소용 없습니다. 정부가 외교채널을 통해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힘겹게 중국과 수교를 맺었는데 굳이 관계를 불편하게 할 것 있냐’면서 간도 문제를 외면하고 있습니다.”

노 교수는 “우리 정부는 역대로 역사나 주권, 영토에 관한 문제에 너무 무심했다”며 “중국은 간도에 관한 한국 내 연구상황을 정기적으로 파악, 향후 발생할 수 있는 국경문제에 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이상태 연구관도 “중국은 사회과학원 안에 ‘변방사문제연구소’를 설치, 한·중 국경문제를 심도있게 살피고 있다”며 “한반도 통일 후 생길 수 있는 영토분쟁에 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동방사회복지회의 김득황 이사장은 “1906~1907년 일제 통감부의 사이토 중장이 간도를 답사, 그곳이 조선 땅임을 인정한 바 있다”며 “일제도 인정했던 조선의 영토를 후손인 우리가 외면해서야 되겠느냐”고 말했다.

# 에필로그

1. 간도의 경제적 가치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조사된 것이 드물다. 막대한 삼림과 농토, 매장된 지하자원 등으로 가치를 추정할 뿐이다. 일부에서는 유전이나 가스전 등의 매장 가능성을 점치고 있기도 하다.

2. 간도에 관한 역사적 증거물들은 하나둘씩 자취를 감춰가고 있다. 백두산 정계비는 일제가 1900년대에 철거했고, 윤관이 두만강 건너 700리에 세웠다는 ‘고려지경’도 사라지고 말았다. 언제 누가 훼손했는지, 정확한 위치가 어디였는지도 우리는 알지 못한다. 9성의 위치에 관해서도 ‘두만강 이북까지 갔다’는 주장과 ‘함경도지역이었다’는 주장만 팽팽할 뿐, 정확한 사실(史實)은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 <사진5>1850년 독일서 제작한 동아시아 전도,만주 일부를 조선영역으로그렸다.<사진6>프랑스에서 제작한 아시아지도,요동일대를 조선의 영역으로 표시하고 있다.<사진7>프랑스 지리학자 당빌이 1737년 제작한 조선왕국전도,간도를 포함한 만주 일대를 조선의 영역으로 그렸다.
 
3. 간도가 ‘우리 영역’임을 나타낸 지도는 1737년 프랑스 지리연구가 당빌(D’Anville)이 그린 ‘조선왕국 전도’<사진7>, 청나라가 8년의 측량을 거쳐 1716년에 완성한 ‘황여전람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보관하고 있는 ‘한중삼국접양지도’, 규장각에 보관된 ‘천하총도오라지도 ’ 대한제국이 작성한 ‘대한신지지’, ‘서북피아만리지도’, 국보 248호인 ‘조선방역도’, 1769년 프랑스가 제작한 ‘아시아 지도’<사진3>, 1854년 러시아가 만든 ‘아시아 전도’<사진4>, 1850년 독일이 제작한 ‘동아시아 전도’<사진5>, 제작 연대 미상의 프랑스판 ‘아시아지도’ <사진6> 등이 다수가 남아있다.


이범진 주간조선 기자(bomb@chosun.com)
 
 
원본 : 한국의 옛지도-'조선팔도지도(朝鮮八道之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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