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史 列傳 (북사 열전)
주대(周代)의 역사를 기록한 책으로 당대(唐代)의 영호덕분(令狐德)이 편찬했다. 628년(貞觀 2)에 영호덕분이 최인사(崔仁師)·잠문본(岑文本)과 함께 이 책의 편찬을 맡았으며, 진숙달(陳叔達)·당검(唐儉)도 참가하여 완성했다. 이 책은 북송(北宋) 말기에 손상을 입어 후세 사람이<북사 北史〉에서 보충한 부분이 많으며, 현존하는<주서>는 당대의 원저와는 다르다. |
北史卷九十四
列傳第八十二
高麗(高句麗)·百濟·新羅·勿吉·奚·契丹·室韋·豆莫婁·地豆干·烏洛侯·流求·倭.
高句麗 (고구려) -이하 고려란 고구려를 가르킨다-
列傳第八十二
高麗(高句麗)·百濟·新羅·勿吉·奚·契丹·室韋·豆莫婁·地豆干·烏洛侯·流求·倭.
高句麗 (고구려) -이하 고려란 고구려를 가르킨다-
<高句麗>, 其先出<夫餘>. 王嘗得<河伯>女, 因閉於室內, 爲日所照, 引身避之, 日影又逐, 旣而有孕, 生一卵, 大如五升. <夫餘王>棄之與犬, 犬不食; 與豕, 豕不食; 棄於路, 牛馬避之; 棄於野, 衆鳥以毛茹之. 王剖之不能破, 遂還其母. 母以物 置暖處, 有一男破而出. 及長, 字之曰<朱蒙>. 其俗言[朱蒙]者, 善射也. <夫餘>人以<朱蒙>非人所生, 請除之. 王不聽, 命之養馬. <朱蒙>私試, 知有善惡, 駿者減食令瘦, 駑者善養令肥. <夫餘王>以肥者自乘, 以瘦者給<朱蒙>. 後狩于田, 以<朱蒙>善射, 給之一矢. <朱蒙>雖一矢, 獸甚多. <夫餘>之臣, 又謀殺之, 其母以告<朱蒙>, <朱蒙>乃與<焉違>等二人東南走./$《魏書》卷一 《高句麗傳》[焉違]作[烏引烏違].$/ 中道遇一大水, 欲濟無梁. <夫餘>人追之甚急, <朱蒙>告水曰: [我是日子, <河伯>外孫, 今追兵垂及, 如何得濟?] 於是魚鼈爲之成橋, <朱蒙>得度. 魚鼈乃解, 追騎不度. <朱蒙>遂至<普述水>, 遇見三人, 一著麻衣, 一著衲衣, 一著水藻衣, 與<朱蒙>至<紇升骨城>, 遂居焉. 號曰<高句麗>, 因以<高>爲氏. 其在<夫餘>妻懷孕, <朱蒙>逃後, 生子<始閭諧>. 及長, 知<朱蒙>爲國王, 卽與母亡歸之. 名曰<閭達>, 委之國事.
'고구려'는 먼저 '부여'에서 나왔다. 왕이 일찍이 '하백'의 여자를 얻어, 인하여 집안에 가두어 두었는데, 태양이 비추자, 몸을 피하였으나, 태양이 또 몸은 따라다녔다. 이미 아이를 베고 있었는데 알 하나를 낳았다. 크기가 다섯되나 되었다. '부여왕'이 버려 개에게 주었으나, 개는 먹지 않고, 돼지에게 주었으나 돼지도 먹지 않았다. 길에 버리자 소나 말이 이를 피하고, 들에 버렸으나 새들이 무리지어 털로써 보호하였다. 왕이 이를 쪼갤려고 하였으나 능히 깨뜨릴 수 없어, 다시 그 어미에게 돌려주었다. 어미가 이를 보자기에 싸서 따뜻한 곳에 두니, 한 남자가 깨뜨리고 나왔다. 장성하자 이름을 '주몽'이라 하였다. 그 풍속에 '주몽'이란 말은 활을 잘 쏜다 라는 것이다. '부여'사람들이 '주몽'이 사람이 태어난 것과 다르다고 해서, 버리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고, 말기지에 명하였다. '주몽'이 사사로이 시험하여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알아 좋은 말은 밥을 적게 주어 여위게 하고, 둔한 말은 잘 길러 살찌게 하였다. '부여왕'이 살찐말을 타고, 여윈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후에 밭에서 사냥을 하는데, '주몽'이 활을 잘 쏜다 하여 화살 하나를 주었다. '주몽'이 화살 하나로 짐승을 많이 잡았다. '부여'의 신하들이 주몽을 모살할려고 하자 그 어미가 '주몽'에게 고하자, '주몽'이 이에 '언' '위'등 두명과 동남으로 달아났다. 길을 다는 중에 우연히 큰 물을 만나, 건너고자 하나 다리가 없었다. 부여 사람들이 급히 뒤쫓아 오는데, '주몽'이 물에 고하여 말하기를, 나는 태양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이제 병사들이 쫓아 오니 어찌하면 건널수 있겠는가? 이때에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서 '주몽'이 건널수 있었다. '주몽'이 '흘승골성'에 이르러 여기에 거하였다. '고구려'라 부르는 것이다. 인하여 '고'씨로 성을 삼았다. '부여'에 남아있던 처가 아이를 베었는데, '주몽'이 달아난 후였다. 아들을 낳으니 '시여해'라 하여, 장성하여 '주몽'을 알자 나라의 왕이 되었다. 이미 어미는 돌가가신 뒤였다. 이름을 '여달'이라 하니 나라의 일을 맡기었다.
<朱蒙>死, 子<如栗>立./$《魏書》作[<朱蒙>死, <閭達>代立, <閭達>死, 子<如栗>立]. 此脫七字.$/ <如栗>死, 子<莫來>立, 乃幷<夫餘>.
'주몽'이 죽자 아들 '여율'이 서고, '여율'이 죽자 아들 '막래'가 섰는데, 이에 '부여'를 병합하였다.
'고구려'는 먼저 '부여'에서 나왔다. 왕이 일찍이 '하백'의 여자를 얻어, 인하여 집안에 가두어 두었는데, 태양이 비추자, 몸을 피하였으나, 태양이 또 몸은 따라다녔다. 이미 아이를 베고 있었는데 알 하나를 낳았다. 크기가 다섯되나 되었다. '부여왕'이 버려 개에게 주었으나, 개는 먹지 않고, 돼지에게 주었으나 돼지도 먹지 않았다. 길에 버리자 소나 말이 이를 피하고, 들에 버렸으나 새들이 무리지어 털로써 보호하였다. 왕이 이를 쪼갤려고 하였으나 능히 깨뜨릴 수 없어, 다시 그 어미에게 돌려주었다. 어미가 이를 보자기에 싸서 따뜻한 곳에 두니, 한 남자가 깨뜨리고 나왔다. 장성하자 이름을 '주몽'이라 하였다. 그 풍속에 '주몽'이란 말은 활을 잘 쏜다 라는 것이다. '부여'사람들이 '주몽'이 사람이 태어난 것과 다르다고 해서, 버리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고, 말기지에 명하였다. '주몽'이 사사로이 시험하여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알아 좋은 말은 밥을 적게 주어 여위게 하고, 둔한 말은 잘 길러 살찌게 하였다. '부여왕'이 살찐말을 타고, 여윈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후에 밭에서 사냥을 하는데, '주몽'이 활을 잘 쏜다 하여 화살 하나를 주었다. '주몽'이 화살 하나로 짐승을 많이 잡았다. '부여'의 신하들이 주몽을 모살할려고 하자 그 어미가 '주몽'에게 고하자, '주몽'이 이에 '언' '위'등 두명과 동남으로 달아났다. 길을 다는 중에 우연히 큰 물을 만나, 건너고자 하나 다리가 없었다. 부여 사람들이 급히 뒤쫓아 오는데, '주몽'이 물에 고하여 말하기를, 나는 태양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이제 병사들이 쫓아 오니 어찌하면 건널수 있겠는가? 이때에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서 '주몽'이 건널수 있었다. '주몽'이 '흘승골성'에 이르러 여기에 거하였다. '고구려'라 부르는 것이다. 인하여 '고'씨로 성을 삼았다. '부여'에 남아있던 처가 아이를 베었는데, '주몽'이 달아난 후였다. 아들을 낳으니 '시여해'라 하여, 장성하여 '주몽'을 알자 나라의 왕이 되었다. 이미 어미는 돌가가신 뒤였다. 이름을 '여달'이라 하니 나라의 일을 맡기었다.
<朱蒙>死, 子<如栗>立./$《魏書》作[<朱蒙>死, <閭達>代立, <閭達>死, 子<如栗>立]. 此脫七字.$/ <如栗>死, 子<莫來>立, 乃幷<夫餘>.
'주몽'이 죽자 아들 '여율'이 서고, '여율'이 죽자 아들 '막래'가 섰는데, 이에 '부여'를 병합하였다.
<漢><武帝><元封>四年, 滅<朝鮮>, 置<玄 郡>, 以<高句麗>爲縣以屬之. <漢>時賜衣 朝服鼓吹,/$諸本[時]作[昭],《三國志》卷三 《東夷傳》·《梁書》卷五四《諸夷傳》作[時]. 按下文云[常從<玄 郡>受之], 知是指漢時, 非指漢昭帝. 此段本之《梁書》,《梁書》又本之《三國志》, 今據改.$/ 常從<玄 郡>受之. 後稍驕, 不復詣郡, 但於東界築小城受之, 遂名此城爲< 溝 >. [溝 ]者, <句麗>[城]名也. <王莽>初, 發<高句麗>兵以伐胡, 而不欲行, <莽>强迫遣之, 皆出塞爲寇盜. 州郡歸咎於<句麗侯><騶>, <嚴尤>誘而斬之. <莽>大悅, 更名<高句麗>, <高句麗侯>. <光武><建武>八年, <高句麗>遣使朝貢./$諸本誤疊[朝貢]二字, 今刪.《三國志》作[<莽>大悅, 布告天下, 更名<高句麗>爲{下句麗}. 當此時爲侯國. <漢><光武帝>八年, <高句麗王>遺使朝貢, 始見稱王].《梁書》略同《三國志》.《北史》訛脫不可解.$/
한 무제 원봉 사년 '조선'을 멸하고 '현토군'을 두었다. '고구려'를 현으로 삼고, 이를 속하게 하였다. '한나라'때에 옷과 두건 조복과 북과 피리를 하사하니, 항상 '현토군'에 나와 이를 받았다. 후에 점점 교만해 지더니 군에 나와 복속하지 않고, 다만 동쪽경계에 작을 성을 쌓고, 이를 받았다. 그 성을 '책구루'라 부렀다. '구루'라는 것은 '구려'의 성 이름이다. '왕망' 초에 '고구려'의 병사를 일으켜 호를 쳤는데, 가고자 하지 않아, '망'이 강제로 다그치어 이를 보냈는데, 모두, 요새에서 나가 도적이 되었다. 주군에서 허물을 '구려후' '추'에게 돌리니, '암우'가 꾀어 이를 베었다. '망'이 크게 기뻐하고, 다시 이름을 '고구려', '고구려후'라 하였다. '광무' '건원' 팔년 '고구려'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至< >·<安>之間, <莫來>裔孫<宮>, 數寇<遼東>. <玄 >太守<蔡風>討之, 不能禁.
'상'과 '안' 사이에 이르러, '막래'의 후손 '궁'이 수차례 '요동'을 도적질 하였다. '현토' 태수 '제풍'이 이를 벌하였는데, 능히 금할 수 없었다.
한 무제 원봉 사년 '조선'을 멸하고 '현토군'을 두었다. '고구려'를 현으로 삼고, 이를 속하게 하였다. '한나라'때에 옷과 두건 조복과 북과 피리를 하사하니, 항상 '현토군'에 나와 이를 받았다. 후에 점점 교만해 지더니 군에 나와 복속하지 않고, 다만 동쪽경계에 작을 성을 쌓고, 이를 받았다. 그 성을 '책구루'라 부렀다. '구루'라는 것은 '구려'의 성 이름이다. '왕망' 초에 '고구려'의 병사를 일으켜 호를 쳤는데, 가고자 하지 않아, '망'이 강제로 다그치어 이를 보냈는데, 모두, 요새에서 나가 도적이 되었다. 주군에서 허물을 '구려후' '추'에게 돌리니, '암우'가 꾀어 이를 베었다. '망'이 크게 기뻐하고, 다시 이름을 '고구려', '고구려후'라 하였다. '광무' '건원' 팔년 '고구려'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至< >·<安>之間, <莫來>裔孫<宮>, 數寇<遼東>. <玄 >太守<蔡風>討之, 不能禁.
'상'과 '안' 사이에 이르러, '막래'의 후손 '궁'이 수차례 '요동'을 도적질 하였다. '현토' 태수 '제풍'이 이를 벌하였는데, 능히 금할 수 없었다.
<宮>死, 子<伯固>立. <順>·<和>之間, 復數犯<遼東>, 寇抄. <靈帝><建寧>二年, <玄 >太守<耿臨>討之, 斬首虜數百級, <伯固>乃降, 屬<遼東>. <公孫度>之雄海東也, <伯固>與之通好.
'궁'이 죽자 아들 '백고'가 섰다. '순'과 '화' 사이에 다시 여러번 '요동'을 범하여, 노략질 하였다. '영제' '건녕' 이년 '현토' 태수 '경임'이 이를 벌하고, 포로 수백을 베었다. '백고'가 이에 항복하여 '요동'에 속하였다. '공손도'가 해동에서 일어나자 '백고'가 통하여 좋아하였다.
<伯固>死, 子<伊夷摸>立. <伊夷摸>自<伯固>時, 已數寇<遼東>, 又受亡胡五百餘戶. <建安>中, <公孫康>出軍擊之, 破其國, 焚燒邑落, 降胡亦叛. <伊夷摸>更作新國. 其後<伊夷摸>復擊<玄 >, <玄 >與<遼東>合擊, 大破之.
'백고'가 죽자 아들 '이이모'가 섰다. '이이모'는 스스로 '백고'때에 이미 수차례 '요동'을 침략하였다. 또한 망한 호인 오백호를 얻었다. '건안' 중에 '공손강'이 군사로 공격하여 그 나라를 깨뜨리고, 수도를 불사르자, 항복한 호가 역시 모반하였다. '이이모'가 다시 새로운 나라를 열었다. 그 후에 '이이모'가 다시 '현토'를 공격하였는데, '현토'가 '요동'과 함께 공격하여 크게 이를 깨뜨렸다.
<伊夷摸>死, 子<位宮>立. 始<位宮>曾祖<宮>, 生而目開能視, 國人惡之. 及長凶虐, 國以殘破. 及<位宮>亦生而視人, <高麗>呼相似爲[位], 以爲似其曾祖<宮>, 故名<位宮>. <位宮>亦有勇力, 便鞍馬, 善射獵. <魏><景初>二年, 遣太傅·<司馬宣王>率衆討<公孫文懿>,/$《三國志》·《梁書》作[公孫淵],《北史》避<唐>諱稱字.$/ <位宮>遣主簿·大加將數千人助軍. <正始>三年, <位宮>寇<遼><西安平>./$《三國志》及《通典》卷一八六·《通志》卷一九四《高句麗傳》都無[遼]字. 按《後漢書》《郡國志》·《晉書》《地理志》, <遼東郡>有<西安平>, <遼西郡>無[安平]. [遼]字誤衍.$/ 五年, <幽州>刺史< 丘儉>將萬人出<玄 >, 討<位宮>, 大戰於<沸流>. 敗走, <儉>追至< 峴>, 懸車束馬登<丸都山>, 屠其所都. <位宮>單將妻息遠竄. 六年, <儉>復討之, <位宮>輕將諸加奔<沃沮>. <儉>使將軍<王 >追之, 絶<沃沮>千餘里, 到<肅愼>南, 刻石紀功. 又刊<丸都山>·銘<不耐城>而還. 其後, 復通中夏.
'이이모'가 죽자 아들 '위궁'이 섰다. '위궁'은 증조부 '궁'에서 시작하는데, 태어나서부터 눈을 뜨고 능히 볼 수 있어, 나라 사람들이 이를 싫어 하였다. 장성하자 흉폭해지고 사나워져, 나라를 해치고, 깨어졌다. '위궁' 역시 태어나서부터 사람을 보아 '고려'에서 서로 비슷하다를 '위'라 하는데, 증조부 '궁'과 비슷하니 고로 이름이 '위궁'이다. '위궁' 역시 용력이 있고, 말을 잘 타고, 활과 사냥에 능하였다. '위나라' '경초' 이년 태부 '사마선왕'을 보내어 무리를 이끌고 '공손문의'를 쳤는데, '위궁'이 주부, 대가의 장수 수천을 보내어 군사를 도왔다. '정시' 삼년 '위궁'이 '요'의 '서안평'을 도적질하고, 오년 '유주자사 관구검'이 만여명으로 '현토'에서 나와 '위궁'을 쳤다. '비류'에서 크게 싸웠다. 패하여 달아나니 '검'이 ??고개에 이르기까지 쫓아가서 '환도선'에 올라 그 도읍을 무찔렀다. '위궁'이 단지 아내와 멀리 숨었다. 육년 '검'이 다시 이를 쳤는데, '위궁'이 재빨리 여러 가들과 '옥저'로 달아났다. '검'이 장군 '왕기'를 보내어 쫓았지만, '옥저' 천여리에서 그만 두었다. '숙신'의 남쪽에 이르러, 돌에 그 공을 새기었다. 또한 '환도산'을 깍아 '불함성'이라 새기고 돌아 왔다. 그 후에 다시 중국과 통하였다.
<晉><永嘉>之亂, <鮮卑><慕容 >據<昌黎><大棘城>, <元帝>授<平州>刺史./$諸本[帝]作[年], [平州]上有[北]字.《梁書》.《諸夷傳》作[帝], 無[北]字. 按《晉書》卷一 八《慕容 載記》, < >逐<平州>刺史<崔毖>, <晉><元帝>因以<平州>刺史授之. 此[年]字訛, [北]字衍, 今據改刪.$/ <位宮>玄孫<乙弗利>頻寇<遼東>, < >不能制.
'진나라' '영가'의 난리때 '선비'의 '모용귀'가 '창려' '대극성'에서 일어났는데, '원제'가 '평주 자사'를 내렸다. '위궁'의 손자 '을불리'가 빈번히 '요동'을 노략질 하니 '귀'가 능히 제도하지 못하였다.
<弗利>死, 子<釗>代立. <魏><建國>四年, <慕容 >子<晃>伐之, 入自<南陜>, 戰於<木底>, 大破<釗>軍, 追至<丸都>. <釗>單馬奔竄, <晃>掘<釗>父墓, 掠其母妻·珍寶·男女五萬餘口, 焚其室, 毁<丸都城>而還. <釗>後爲<百濟>所殺.
'불리'가 죽자 아들 '쇠'가 섰다. '위 건국' 사년에 '모용귀'가 아들 '황'으로 이를 치니, 스스로 '남합'에 들어와 '목저'에서 전쟁을 하였는데, '쇠'의 군사를 크게 깨고, '환도'까지 쫓아갔다. '쇠'가 홀로 말을 타고 달아나 숨으니, '황'이 '쇠'의 아비의 묘를 파해치고, 그 어미와 처 보물과 남녀 오만여명을 노략질 하고 그 궁궐을 불살르며, '환도성'을 허물고 돌아 왔다. '쇠'는 후에 '백제'에 의해 살해 당했다.
及<晉><孝武><太元>十年, <句麗>攻<遼東>·<玄 郡>. <後燕><慕容垂>遣其弟<農>伐<句麗>,/$按《晉書》卷一二三《慕容垂載記》, <農>是<垂>之中子. 此作[弟], 是承《梁書》之誤.$/ 復二郡. <垂>子<寶>以<句麗王><安>爲<平州>牧, 封<遼東>·<帶方>二國王, 始置長史·司馬·參軍官. 後略有<遼東郡>.
'진나라 효무 태원' 십년에 이르러, '구려'가 '요동', '현토군'을 공격하였다. '후연의 모용수'가 동생 '농'을 보내어 '구려'를 쳤서, 다시 이군을 회복하였다. '수'의 아들 '보'가 '구려왕 안'을 '평주 목'에 삼고 '요동', '대방' 이국왕으로 봉하여 장사 사마 참군관을 두었다. 후에 '요동군'을 다스렸다.
<太武>時, <釗>曾孫<璉>始遣使者詣<安東>, 奉表貢方物, 幷請國諱. <太武>嘉其誠款, 詔下帝系名諱於其國. 使員外散騎侍郞<李敖>拜<璉>爲都督<遼海>諸軍事·征東將軍·領東夷中郞將·<遼東郡公>·<高句麗王>. <敖>至其所, 居<平壤城>, 訪其方事, 云: 去<遼東>南一千餘里, 東至<柵城>,/$諸本無[東]字,《魏書》有. 按下云[南至]·[北至], 是言<高麗>國境四至, 當有[東]字, 今據補.$/ 南至小海, 北至舊<夫餘>, 人戶參倍於<前魏>時. 後貢使相尋, 歲致黃金二百斤·白銀四百斤. 時<馮弘>率衆奔之, <太武>遣散騎常侍<封撥>詔<璉>, 令送<弘>. <璉>上書稱當與<弘>俱奉王化, 竟不遣. <太武>怒, 將往討之. <樂平王><丕>等議待後擧, <太武>乃止. 而<弘>亦尋爲<璉>所殺.
'태무'때에 '쇠'의 증손 '련'이 처음 사자를 보내어 '안동'에 이르러 표를 받들어 방물을 받치며, 나라의 휘를 함께 하길 청하였다. 사신 원외산기시랑 '이오'가 '련'에게 절하며 연을 '도독 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영동이중랑장 요동군공 고구려왕'으로 삼았다. '오'가 그 처소에 이르렀는데, '평양성'에 거하고 있었다. 찾아가 여러 가지일을 물었는데, 말하길 '요동'에서 남쪽으로 일천여리를 가면 동쪽으로 '책성'에 이르고, 남쪽으로 작은 바다에 이른다. 북쪽으로는 옛날 '부여'이고 호수는 '전위'때의 세배이다. 후에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받쳤는데 해마다 황금 이백근과 은 사백근을 받쳤다. 이때 '풍홍'이 무리를 이끌고 도망갔는데, 태무가 산기상시 '봉발'을 보내어 '련'에게 고하기를 '홍'을 보내달라 하였다. '련'이 상서하여 '홍'이 왕화됨을 받들었다고 하여 끝내 보내주지 않았다. '태무'가 노하여 장군을 보내어 이를 쳤다. '낙평왕 비'등이 의논하여 기다리다가 후에 일어나라고 하니 '태무'가 이에 그치었다. '홍'은 역시 '련'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後<文明太后>以<獻文>六宮未備, <璉>令薦其女. <璉>奉表云: 女已出, 求以弟女應旨. 朝廷許焉, 乃遣<安樂王><眞>·尙書<李敷>等至境送幣. <璉>惑其左右之說, 云朝廷昔與<馮氏>婚姻, 未幾而滅其國. <殷>鑒不遠, 宜以方便辭之. <璉>遂上書, 妄稱女死. 朝廷疑其矯拒, 又遣假散騎常侍<程駿>切責之, 若女審死, 聽更選宗淑. <璉>云: [若天子恕其前愆, 謹當奉詔.] 會<獻文>崩, 乃止. 至<孝文>時, <璉>貢獻倍前, 其報賜亦稍加焉. 時<光州>於海中得<璉>遣詣<齊>使<餘奴>等, 送闕. <孝文>詔責曰: [<道成>親殺其君, 竊號<江>左, 朕方欲興滅國於舊邦, 繼絶世於<劉氏>. 而卿越境外鄕, 交通簒賊, 豈是藩臣守節之義? 今不以一過掩舊款, 卽送還藩. 其感恕思愆, 祗承明憲, 輯寧所部, 動靜以聞.]
후에 '문명태후'가 '헌문'이 육궁을 갖추지 않았다 하여 조서를 내려 '련'이 여자를 천거하게 하였다. '련'이 표를 받들어 말하길, 여자가 없어, 아우의 여자를 구하여 응합니다 하였다. 조정에서 이에 허락하니 '안락왕 진'을 보내었다. 상서에는 '이오'등이 그 곳에 비단을 보냈다 하였다. '련'이 그 좌우의 말에 의심하였는데, 이르기를 조정에서는 옛날 '풍씨'와 혼인하였는데 얼마있지 않아 그 나라가 망하였습니다. 하였다. '은'의 때가 멀지 안음을 생각하십시오. 마땅히 방편을 말해야 합니다. '련'이 상서하여 거짓으로 여자가 죽었다 하니 조정에서는 이를 거짓이라 의심하고, 또한 가산기상시 '정준'을 보내어 끊고 이를 책하여, 만약 여자가 죽었으면 다시 여자를 가려 뽑아 청하라. 하였다. '련'이 말하길 만일 천자가 앞의 허물을 용서한다면 삼가 조서를 받들겠습니다. '헌문'이 죽자 이내 그치었다. '효문'때에 이르러 '련'이 앞서의 두배의 공물을 받치니 그 하사품 역시 점점 더하였다. 이때 '광주'의 바다에서 '련'이 '제에 보내는 사신 '여노'등을 얻어 대궐에 보내었다. '효문'이 책하여 고하길, '도성'이 그 임금을 죽이고 '강'의 왼쪽에서 몰래 일어나, 짐이 그 나라를 없애고 옛나라를 세워 '유씨'의 대를 끊고자 한다. 이에 경이 바깥으로 그 경계를 넘어 적들과 통하니, 어찌 이것이 신하로써 지켜야할 의라 할 것인가? 이제 하나의 잘못으로 옛날의 정성을 가리지 말라. 곧 돌려 보낼 것이다. 허물을 생각하여 용서함을 감사히 여기고 밝은 법을 받들어 공경하여 거느리는 바를 화목하고 편하게 하니 동정으로 삼가 받들라. 하였다.
<太和>十五年, <璉>死, 年百餘歲. <孝文>擧哀於東郊, 遣謁者僕射<李安上>策贈車騎大將軍·太傅·<遼東郡公>·<高句麗王>, 諡曰<康>. 又遣大鴻 拜<璉>孫<雲>使持節·都督<遼海>諸軍事·征東將軍·領護東夷中郞將·<遼東郡公>·<高句麗王>. 賜衣冠服物車旗之飾. 又詔<雲>遣世子入朝, 令及郊丘之禮. <雲>上書辭疾, 遣其從叔<升于>隨使詣闕. 嚴責之. 自此, 歲常貢獻. <正始>中, <宣武>於東堂引見其使<芮悉弗>, 進曰: [<高麗>係誠天極, 累葉純誠, 地産土毛, 無愆王貢. 但黃金出<夫餘>, 珂則<涉羅>所産. 今<夫餘>爲<勿吉>所逐, <涉羅>爲<百濟>所幷. 國王臣<雲>惟繼絶之義, 悉遷于境內. 二品所以不登王府, 實兩賊之爲.] <宣武>曰: [<高麗>世荷上將, 專制海外, 九夷 虜, 實得征之. 昔方貢之愆, 責在連率. 宜宣朕旨於卿主, 務盡威懷之略, 使二邑還復舊墟, 土毛無失常貢也.]
'태화' 십오년 '련'이 죽으니 백여세 였다. '효문'이 동쪽 성밖에서 슬퍼하고, 아뢰는 자로 복사 '이안상'을 보내어, 책을 '거기대장군 태전 요동군공 고구려왕'을 더하여 시호를 '강'이라 하였다. 또 대홍려를 보내어 '련'의 손자 '운'에게 절하며 '사지절 도독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영호동이중랑장 요동군공 고구려왕'으로 삼았다. 옷과 관 복과 물건 수례와 기를 꾸미는 것을 하사하였다. 또한 '운'에게 고하길 세자를 입조하라 하여 성밖에서 예를 차리는 것을 명하였다. '운'이 상서에 병을 핑계삼아 숙부 '승우'를 보내고 사신으로 대궐까지 수행하게 하였다. 이를 엄히 책하니 스스로 이에 세마다 항시 공물을 받쳤다. '정시'중에 '선무'가 사신 '예실불'을 동당에 불러 보니, 나아가 말하길, '고려'는 정성으로 하늘을 잇어 그 정성이 쌓여 땅에는 토모가 산출되어 왕의 공물에는 허물이 없습니다. 다만 황금은 '부여'에서 나오고, 옥이 '섭라'에서 나와, 이제 '부여'가 '물길'을 내 쫓고, '섭라'가 백제와 어울립니다. 나라의 왕인 신하 '운'이 의의 계통을 이어 모두다 경내에 옮기었습니다. 두 물건을 왕의 곳간에 채우지 않고, 양적의 제물을 베풉니다. '선무'가 말하길 '고려'를 어찌 천자를 책망하는가? 오로지 해외를 제도하고 영리한 오랑캐를 벌하여 재물을 얻었다. 지난달 방물을 받친 허물은 꾸짓어서 복종하게 되니, 마땅히 짐이 경에게 말하길, 힘써 위엄으로 다스리고, 두 읍은 옛날로 돌려 보내라. 토모가 잘못된 공물은 아닌 것이다. 하였다.
<神龜>中, <雲>死, <靈太后>爲擧哀於東堂. 遣使策贈車騎大將軍·領護東夷校尉·<遼東郡公>·<高麗王>. 又拜其世子<安>爲鎭東將軍·領護東夷校尉·<遼東郡公>·<高麗王>. <正光>初, <光州>又於海中執得<梁> 所授<安>寧東將軍衣冠劍 , 及使人<江法盛>等, 送京師.
'신귀'중에 '운'이 죽자 '영태후'가 동당에서 슬퍼하였다. 사신을 파견하여 '거기대장군 령호동이교위 요동군공 고려왕'을 더하였다. 또 절하여 그 세자 '안'에게 '진동장군 령오동이교위 요동군공 고려왕'을 삼았다. '정광' 초에 또 '광주'의 바다 가운데에 '양나라'가 '안'에게 내리는 영동장군의 의관과 검 노리게를 얻었다. 이에 사신 '강법성'등을 서울로 보냈다.
<安>死, 子<延>立. <孝武帝>初, 詔加<延>使持節·散騎常侍·車騎大將軍·領護東夷校尉·<遼東郡公>·<高句麗王>. <天平>中, 詔加<延>侍中·驃騎大將軍,/$諸本[驃]作[車],《魏書》作[驃]. 按上文言其已爲車騎大將軍, 則加官當爲驃騎, 今據改.$/ 餘悉如故.
'안'이 죽자 아들 '연'이 섰다. '효무제' 초에 고하길 '연'에게 '사지절 산기상시 거기대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공 고구려왕'을 더하였다. '천평' 중에 '연'에게 '시중 표기대장군'을 더하고 나머지는 옛날과 같다.
'궁'이 죽자 아들 '백고'가 섰다. '순'과 '화' 사이에 다시 여러번 '요동'을 범하여, 노략질 하였다. '영제' '건녕' 이년 '현토' 태수 '경임'이 이를 벌하고, 포로 수백을 베었다. '백고'가 이에 항복하여 '요동'에 속하였다. '공손도'가 해동에서 일어나자 '백고'가 통하여 좋아하였다.
<伯固>死, 子<伊夷摸>立. <伊夷摸>自<伯固>時, 已數寇<遼東>, 又受亡胡五百餘戶. <建安>中, <公孫康>出軍擊之, 破其國, 焚燒邑落, 降胡亦叛. <伊夷摸>更作新國. 其後<伊夷摸>復擊<玄 >, <玄 >與<遼東>合擊, 大破之.
'백고'가 죽자 아들 '이이모'가 섰다. '이이모'는 스스로 '백고'때에 이미 수차례 '요동'을 침략하였다. 또한 망한 호인 오백호를 얻었다. '건안' 중에 '공손강'이 군사로 공격하여 그 나라를 깨뜨리고, 수도를 불사르자, 항복한 호가 역시 모반하였다. '이이모'가 다시 새로운 나라를 열었다. 그 후에 '이이모'가 다시 '현토'를 공격하였는데, '현토'가 '요동'과 함께 공격하여 크게 이를 깨뜨렸다.
<伊夷摸>死, 子<位宮>立. 始<位宮>曾祖<宮>, 生而目開能視, 國人惡之. 及長凶虐, 國以殘破. 及<位宮>亦生而視人, <高麗>呼相似爲[位], 以爲似其曾祖<宮>, 故名<位宮>. <位宮>亦有勇力, 便鞍馬, 善射獵. <魏><景初>二年, 遣太傅·<司馬宣王>率衆討<公孫文懿>,/$《三國志》·《梁書》作[公孫淵],《北史》避<唐>諱稱字.$/ <位宮>遣主簿·大加將數千人助軍. <正始>三年, <位宮>寇<遼><西安平>./$《三國志》及《通典》卷一八六·《通志》卷一九四《高句麗傳》都無[遼]字. 按《後漢書》《郡國志》·《晉書》《地理志》, <遼東郡>有<西安平>, <遼西郡>無[安平]. [遼]字誤衍.$/ 五年, <幽州>刺史< 丘儉>將萬人出<玄 >, 討<位宮>, 大戰於<沸流>. 敗走, <儉>追至< 峴>, 懸車束馬登<丸都山>, 屠其所都. <位宮>單將妻息遠竄. 六年, <儉>復討之, <位宮>輕將諸加奔<沃沮>. <儉>使將軍<王 >追之, 絶<沃沮>千餘里, 到<肅愼>南, 刻石紀功. 又刊<丸都山>·銘<不耐城>而還. 其後, 復通中夏.
'이이모'가 죽자 아들 '위궁'이 섰다. '위궁'은 증조부 '궁'에서 시작하는데, 태어나서부터 눈을 뜨고 능히 볼 수 있어, 나라 사람들이 이를 싫어 하였다. 장성하자 흉폭해지고 사나워져, 나라를 해치고, 깨어졌다. '위궁' 역시 태어나서부터 사람을 보아 '고려'에서 서로 비슷하다를 '위'라 하는데, 증조부 '궁'과 비슷하니 고로 이름이 '위궁'이다. '위궁' 역시 용력이 있고, 말을 잘 타고, 활과 사냥에 능하였다. '위나라' '경초' 이년 태부 '사마선왕'을 보내어 무리를 이끌고 '공손문의'를 쳤는데, '위궁'이 주부, 대가의 장수 수천을 보내어 군사를 도왔다. '정시' 삼년 '위궁'이 '요'의 '서안평'을 도적질하고, 오년 '유주자사 관구검'이 만여명으로 '현토'에서 나와 '위궁'을 쳤다. '비류'에서 크게 싸웠다. 패하여 달아나니 '검'이 ??고개에 이르기까지 쫓아가서 '환도선'에 올라 그 도읍을 무찔렀다. '위궁'이 단지 아내와 멀리 숨었다. 육년 '검'이 다시 이를 쳤는데, '위궁'이 재빨리 여러 가들과 '옥저'로 달아났다. '검'이 장군 '왕기'를 보내어 쫓았지만, '옥저' 천여리에서 그만 두었다. '숙신'의 남쪽에 이르러, 돌에 그 공을 새기었다. 또한 '환도산'을 깍아 '불함성'이라 새기고 돌아 왔다. 그 후에 다시 중국과 통하였다.
<晉><永嘉>之亂, <鮮卑><慕容 >據<昌黎><大棘城>, <元帝>授<平州>刺史./$諸本[帝]作[年], [平州]上有[北]字.《梁書》.《諸夷傳》作[帝], 無[北]字. 按《晉書》卷一 八《慕容 載記》, < >逐<平州>刺史<崔毖>, <晉><元帝>因以<平州>刺史授之. 此[年]字訛, [北]字衍, 今據改刪.$/ <位宮>玄孫<乙弗利>頻寇<遼東>, < >不能制.
'진나라' '영가'의 난리때 '선비'의 '모용귀'가 '창려' '대극성'에서 일어났는데, '원제'가 '평주 자사'를 내렸다. '위궁'의 손자 '을불리'가 빈번히 '요동'을 노략질 하니 '귀'가 능히 제도하지 못하였다.
<弗利>死, 子<釗>代立. <魏><建國>四年, <慕容 >子<晃>伐之, 入自<南陜>, 戰於<木底>, 大破<釗>軍, 追至<丸都>. <釗>單馬奔竄, <晃>掘<釗>父墓, 掠其母妻·珍寶·男女五萬餘口, 焚其室, 毁<丸都城>而還. <釗>後爲<百濟>所殺.
'불리'가 죽자 아들 '쇠'가 섰다. '위 건국' 사년에 '모용귀'가 아들 '황'으로 이를 치니, 스스로 '남합'에 들어와 '목저'에서 전쟁을 하였는데, '쇠'의 군사를 크게 깨고, '환도'까지 쫓아갔다. '쇠'가 홀로 말을 타고 달아나 숨으니, '황'이 '쇠'의 아비의 묘를 파해치고, 그 어미와 처 보물과 남녀 오만여명을 노략질 하고 그 궁궐을 불살르며, '환도성'을 허물고 돌아 왔다. '쇠'는 후에 '백제'에 의해 살해 당했다.
及<晉><孝武><太元>十年, <句麗>攻<遼東>·<玄 郡>. <後燕><慕容垂>遣其弟<農>伐<句麗>,/$按《晉書》卷一二三《慕容垂載記》, <農>是<垂>之中子. 此作[弟], 是承《梁書》之誤.$/ 復二郡. <垂>子<寶>以<句麗王><安>爲<平州>牧, 封<遼東>·<帶方>二國王, 始置長史·司馬·參軍官. 後略有<遼東郡>.
'진나라 효무 태원' 십년에 이르러, '구려'가 '요동', '현토군'을 공격하였다. '후연의 모용수'가 동생 '농'을 보내어 '구려'를 쳤서, 다시 이군을 회복하였다. '수'의 아들 '보'가 '구려왕 안'을 '평주 목'에 삼고 '요동', '대방' 이국왕으로 봉하여 장사 사마 참군관을 두었다. 후에 '요동군'을 다스렸다.
<太武>時, <釗>曾孫<璉>始遣使者詣<安東>, 奉表貢方物, 幷請國諱. <太武>嘉其誠款, 詔下帝系名諱於其國. 使員外散騎侍郞<李敖>拜<璉>爲都督<遼海>諸軍事·征東將軍·領東夷中郞將·<遼東郡公>·<高句麗王>. <敖>至其所, 居<平壤城>, 訪其方事, 云: 去<遼東>南一千餘里, 東至<柵城>,/$諸本無[東]字,《魏書》有. 按下云[南至]·[北至], 是言<高麗>國境四至, 當有[東]字, 今據補.$/ 南至小海, 北至舊<夫餘>, 人戶參倍於<前魏>時. 後貢使相尋, 歲致黃金二百斤·白銀四百斤. 時<馮弘>率衆奔之, <太武>遣散騎常侍<封撥>詔<璉>, 令送<弘>. <璉>上書稱當與<弘>俱奉王化, 竟不遣. <太武>怒, 將往討之. <樂平王><丕>等議待後擧, <太武>乃止. 而<弘>亦尋爲<璉>所殺.
'태무'때에 '쇠'의 증손 '련'이 처음 사자를 보내어 '안동'에 이르러 표를 받들어 방물을 받치며, 나라의 휘를 함께 하길 청하였다. 사신 원외산기시랑 '이오'가 '련'에게 절하며 연을 '도독 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영동이중랑장 요동군공 고구려왕'으로 삼았다. '오'가 그 처소에 이르렀는데, '평양성'에 거하고 있었다. 찾아가 여러 가지일을 물었는데, 말하길 '요동'에서 남쪽으로 일천여리를 가면 동쪽으로 '책성'에 이르고, 남쪽으로 작은 바다에 이른다. 북쪽으로는 옛날 '부여'이고 호수는 '전위'때의 세배이다. 후에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받쳤는데 해마다 황금 이백근과 은 사백근을 받쳤다. 이때 '풍홍'이 무리를 이끌고 도망갔는데, 태무가 산기상시 '봉발'을 보내어 '련'에게 고하기를 '홍'을 보내달라 하였다. '련'이 상서하여 '홍'이 왕화됨을 받들었다고 하여 끝내 보내주지 않았다. '태무'가 노하여 장군을 보내어 이를 쳤다. '낙평왕 비'등이 의논하여 기다리다가 후에 일어나라고 하니 '태무'가 이에 그치었다. '홍'은 역시 '련'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後<文明太后>以<獻文>六宮未備, <璉>令薦其女. <璉>奉表云: 女已出, 求以弟女應旨. 朝廷許焉, 乃遣<安樂王><眞>·尙書<李敷>等至境送幣. <璉>惑其左右之說, 云朝廷昔與<馮氏>婚姻, 未幾而滅其國. <殷>鑒不遠, 宜以方便辭之. <璉>遂上書, 妄稱女死. 朝廷疑其矯拒, 又遣假散騎常侍<程駿>切責之, 若女審死, 聽更選宗淑. <璉>云: [若天子恕其前愆, 謹當奉詔.] 會<獻文>崩, 乃止. 至<孝文>時, <璉>貢獻倍前, 其報賜亦稍加焉. 時<光州>於海中得<璉>遣詣<齊>使<餘奴>等, 送闕. <孝文>詔責曰: [<道成>親殺其君, 竊號<江>左, 朕方欲興滅國於舊邦, 繼絶世於<劉氏>. 而卿越境外鄕, 交通簒賊, 豈是藩臣守節之義? 今不以一過掩舊款, 卽送還藩. 其感恕思愆, 祗承明憲, 輯寧所部, 動靜以聞.]
후에 '문명태후'가 '헌문'이 육궁을 갖추지 않았다 하여 조서를 내려 '련'이 여자를 천거하게 하였다. '련'이 표를 받들어 말하길, 여자가 없어, 아우의 여자를 구하여 응합니다 하였다. 조정에서 이에 허락하니 '안락왕 진'을 보내었다. 상서에는 '이오'등이 그 곳에 비단을 보냈다 하였다. '련'이 그 좌우의 말에 의심하였는데, 이르기를 조정에서는 옛날 '풍씨'와 혼인하였는데 얼마있지 않아 그 나라가 망하였습니다. 하였다. '은'의 때가 멀지 안음을 생각하십시오. 마땅히 방편을 말해야 합니다. '련'이 상서하여 거짓으로 여자가 죽었다 하니 조정에서는 이를 거짓이라 의심하고, 또한 가산기상시 '정준'을 보내어 끊고 이를 책하여, 만약 여자가 죽었으면 다시 여자를 가려 뽑아 청하라. 하였다. '련'이 말하길 만일 천자가 앞의 허물을 용서한다면 삼가 조서를 받들겠습니다. '헌문'이 죽자 이내 그치었다. '효문'때에 이르러 '련'이 앞서의 두배의 공물을 받치니 그 하사품 역시 점점 더하였다. 이때 '광주'의 바다에서 '련'이 '제에 보내는 사신 '여노'등을 얻어 대궐에 보내었다. '효문'이 책하여 고하길, '도성'이 그 임금을 죽이고 '강'의 왼쪽에서 몰래 일어나, 짐이 그 나라를 없애고 옛나라를 세워 '유씨'의 대를 끊고자 한다. 이에 경이 바깥으로 그 경계를 넘어 적들과 통하니, 어찌 이것이 신하로써 지켜야할 의라 할 것인가? 이제 하나의 잘못으로 옛날의 정성을 가리지 말라. 곧 돌려 보낼 것이다. 허물을 생각하여 용서함을 감사히 여기고 밝은 법을 받들어 공경하여 거느리는 바를 화목하고 편하게 하니 동정으로 삼가 받들라. 하였다.
<太和>十五年, <璉>死, 年百餘歲. <孝文>擧哀於東郊, 遣謁者僕射<李安上>策贈車騎大將軍·太傅·<遼東郡公>·<高句麗王>, 諡曰<康>. 又遣大鴻 拜<璉>孫<雲>使持節·都督<遼海>諸軍事·征東將軍·領護東夷中郞將·<遼東郡公>·<高句麗王>. 賜衣冠服物車旗之飾. 又詔<雲>遣世子入朝, 令及郊丘之禮. <雲>上書辭疾, 遣其從叔<升于>隨使詣闕. 嚴責之. 自此, 歲常貢獻. <正始>中, <宣武>於東堂引見其使<芮悉弗>, 進曰: [<高麗>係誠天極, 累葉純誠, 地産土毛, 無愆王貢. 但黃金出<夫餘>, 珂則<涉羅>所産. 今<夫餘>爲<勿吉>所逐, <涉羅>爲<百濟>所幷. 國王臣<雲>惟繼絶之義, 悉遷于境內. 二品所以不登王府, 實兩賊之爲.] <宣武>曰: [<高麗>世荷上將, 專制海外, 九夷 虜, 實得征之. 昔方貢之愆, 責在連率. 宜宣朕旨於卿主, 務盡威懷之略, 使二邑還復舊墟, 土毛無失常貢也.]
'태화' 십오년 '련'이 죽으니 백여세 였다. '효문'이 동쪽 성밖에서 슬퍼하고, 아뢰는 자로 복사 '이안상'을 보내어, 책을 '거기대장군 태전 요동군공 고구려왕'을 더하여 시호를 '강'이라 하였다. 또 대홍려를 보내어 '련'의 손자 '운'에게 절하며 '사지절 도독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영호동이중랑장 요동군공 고구려왕'으로 삼았다. 옷과 관 복과 물건 수례와 기를 꾸미는 것을 하사하였다. 또한 '운'에게 고하길 세자를 입조하라 하여 성밖에서 예를 차리는 것을 명하였다. '운'이 상서에 병을 핑계삼아 숙부 '승우'를 보내고 사신으로 대궐까지 수행하게 하였다. 이를 엄히 책하니 스스로 이에 세마다 항시 공물을 받쳤다. '정시'중에 '선무'가 사신 '예실불'을 동당에 불러 보니, 나아가 말하길, '고려'는 정성으로 하늘을 잇어 그 정성이 쌓여 땅에는 토모가 산출되어 왕의 공물에는 허물이 없습니다. 다만 황금은 '부여'에서 나오고, 옥이 '섭라'에서 나와, 이제 '부여'가 '물길'을 내 쫓고, '섭라'가 백제와 어울립니다. 나라의 왕인 신하 '운'이 의의 계통을 이어 모두다 경내에 옮기었습니다. 두 물건을 왕의 곳간에 채우지 않고, 양적의 제물을 베풉니다. '선무'가 말하길 '고려'를 어찌 천자를 책망하는가? 오로지 해외를 제도하고 영리한 오랑캐를 벌하여 재물을 얻었다. 지난달 방물을 받친 허물은 꾸짓어서 복종하게 되니, 마땅히 짐이 경에게 말하길, 힘써 위엄으로 다스리고, 두 읍은 옛날로 돌려 보내라. 토모가 잘못된 공물은 아닌 것이다. 하였다.
<神龜>中, <雲>死, <靈太后>爲擧哀於東堂. 遣使策贈車騎大將軍·領護東夷校尉·<遼東郡公>·<高麗王>. 又拜其世子<安>爲鎭東將軍·領護東夷校尉·<遼東郡公>·<高麗王>. <正光>初, <光州>又於海中執得<梁> 所授<安>寧東將軍衣冠劍 , 及使人<江法盛>等, 送京師.
'신귀'중에 '운'이 죽자 '영태후'가 동당에서 슬퍼하였다. 사신을 파견하여 '거기대장군 령호동이교위 요동군공 고려왕'을 더하였다. 또 절하여 그 세자 '안'에게 '진동장군 령오동이교위 요동군공 고려왕'을 삼았다. '정광' 초에 또 '광주'의 바다 가운데에 '양나라'가 '안'에게 내리는 영동장군의 의관과 검 노리게를 얻었다. 이에 사신 '강법성'등을 서울로 보냈다.
<安>死, 子<延>立. <孝武帝>初, 詔加<延>使持節·散騎常侍·車騎大將軍·領護東夷校尉·<遼東郡公>·<高句麗王>. <天平>中, 詔加<延>侍中·驃騎大將軍,/$諸本[驃]作[車],《魏書》作[驃]. 按上文言其已爲車騎大將軍, 則加官當爲驃騎, 今據改.$/ 餘悉如故.
'안'이 죽자 아들 '연'이 섰다. '효무제' 초에 고하길 '연'에게 '사지절 산기상시 거기대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공 고구려왕'을 더하였다. '천평' 중에 '연'에게 '시중 표기대장군'을 더하고 나머지는 옛날과 같다.
<延>死, 子<成>立. 訖於<武定>已來,/$《魏書》[已來]作[末]一字, 是.$/ 其貢使無歲不至. <大統>十二年, 遣使至<西魏>朝貢. 及<齊>受<東魏>禪之歲, 遣使朝貢于<齊>. <齊><文宣>加<成>使持節·侍中·驃騎大將軍, 領東夷校尉·<遼東郡公>·<高麗王>如故. <天保>三年, <文宣>至<營州>, 使<博陵><崔柳>使于<高麗>, 求<魏>末流人. <柳>曰: [若不從者, 以便宜從事.] 及至, 不見許. <柳>張目叱之, 拳擊<成>墜於牀下, <成>左右雀息不敢動, 乃謝服, <柳>以五千戶反命.
'연'이 죽고 아들 '성'이 섰다. '무정'에 이르러 왔었는데, 해마다 오지 않음이 없었다. '대통' 십이년 사신이 '서위'에 이르러 조공하였다. '제'가 '동위'를 합병한 해에 사신을 '제'에 보냈다. '제'의 '문선'이 '성'에게 '사지절 시중 표기대장군'을 더하고 '령동이교위 요동군공 고려왕'은 옛날과 같다. '천보' 삼년 '문선'이 '영주'에 이르러 사신'박릉'과 '최유'를 '고려'에 보내어 '위'의 유민을 구하라 하니. 조서에서 '유'가 말하길 만일 좇지 안는다면, 의당 일을 좇아야 한다 하였다. 이르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유'가 눈을 크게 뜨고 꾸짓고, 주먹질을 하자, '성'이 마루아래로 떨어졌다. '성'이 숨을 몰아쉬고 감히 움직이지 못하고, 이에 사죄를 하자 '유'가 오천여호를 되돌렸다.
'연'이 죽고 아들 '성'이 섰다. '무정'에 이르러 왔었는데, 해마다 오지 않음이 없었다. '대통' 십이년 사신이 '서위'에 이르러 조공하였다. '제'가 '동위'를 합병한 해에 사신을 '제'에 보냈다. '제'의 '문선'이 '성'에게 '사지절 시중 표기대장군'을 더하고 '령동이교위 요동군공 고려왕'은 옛날과 같다. '천보' 삼년 '문선'이 '영주'에 이르러 사신'박릉'과 '최유'를 '고려'에 보내어 '위'의 유민을 구하라 하니. 조서에서 '유'가 말하길 만일 좇지 안는다면, 의당 일을 좇아야 한다 하였다. 이르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유'가 눈을 크게 뜨고 꾸짓고, 주먹질을 하자, '성'이 마루아래로 떨어졌다. '성'이 숨을 몰아쉬고 감히 움직이지 못하고, 이에 사죄를 하자 '유'가 오천여호를 되돌렸다.
<成>死, 子<湯>立. <乾明>元年, <齊><廢帝>以<湯>爲使持節·領東夷校尉·<遼東郡公>·<高麗王>. <周><建德>六年, <湯>遣使至<周>, <武帝>以<湯>爲上開府儀同大將軍·<遼東郡公>·<遼東王>. <隋><文帝>受禪, <湯>遣使詣闕, 進授大將軍, 改封<高麗王>. 自是, 歲遣使朝貢不絶.
'성'이 죽고 아들 '탕'이 섰다. '건명' 원년에 '제'의 '폐제'가 탕을 '사지절 령동이교위 요동군공 고려왕'을 삼았다. '주 건덕' 육년 '탕이 사신을 보내어 '주'에 이르르니, '무제'가 '탕'을 '상개부의동대장군 요동군공 요동왕'을 삼았다. '수' '문제'가 선양 받자 '탕'이 사신을 보내어 궐에 이르렀다. 나아가 대장군을 받고 고쳐 '고려왕'을 봉함 받고 이때부터 해마다 사신을 보내어 조공이 끊이질 않았다.
'성'이 죽고 아들 '탕'이 섰다. '건명' 원년에 '제'의 '폐제'가 탕을 '사지절 령동이교위 요동군공 고려왕'을 삼았다. '주 건덕' 육년 '탕이 사신을 보내어 '주'에 이르르니, '무제'가 '탕'을 '상개부의동대장군 요동군공 요동왕'을 삼았다. '수' '문제'가 선양 받자 '탕'이 사신을 보내어 궐에 이르렀다. 나아가 대장군을 받고 고쳐 '고려왕'을 봉함 받고 이때부터 해마다 사신을 보내어 조공이 끊이질 않았다.
其國, 東至<新羅>, 西度<遼>, 二千里; 南接<百濟>, 北隣<靺鞨>, 一千餘里. 人皆土著, 隨山谷而居, 衣布帛及皮. 土田薄瘠, 蠶農不足以自供, 故其人節飮食. 其王好修宮室, 都<平壤城>, 亦曰<長安城>, 東西六里,/$諸本脫[西]字, 據《周書》卷四九·《隋書》卷八一《高麗傳》補.$/ 隨山屈曲, 南臨<浿水>. 城內唯積倉儲器備, 寇賊至日, 方入固守. 王別爲宅於其側, 不常居之. 其外復有<國內城>及<漢城>, 亦別都也. 其國中呼爲三京. 復有<遼東>·<玄 >等數十城, 皆置官司以統攝. 與<新羅>每相侵奪, 戰爭不息.
그나라는 동쪽이 '신라'이고 서쪽은 '요'를 넘어 이천리이다. 남쪽은 '백제'와 접하고, 북쪽은 '말갈'과 이웃하니, 일천여리이다. 사람들은 토착하고, 산과 계곡에 의지하여 거쳐한다. 옷은 베와 비단과 가죽으로 하고, 땅이 척박하여 양잠하고 농사지어도 족하지 않다. 고로 사람들은 음식을 절약한다. 그 왕은 좋은 궁실을 닦아 도읍을 '평양성'이라 하고 또 말하길 '장안성'이라고 한다. 동서가 육리이고 산의 굴곡에 있어 남쪽은 '패수'에 임한다. 성내에 오직 창고에 쌓아두고 대비하는데, 적이 이르르면 들어와 지킨다. 왕은 따로 그 곁에 집을 짓는데 항상 거기에 거하지는 않는다. 그 밖에 '국내성'과 '한성'이 있는데 역시 다른 도읍지이다. 그 나라에서 삼경이라 부른다. 다시 '요동' '현토'등 십여성이 있는데 모두 관리를 두어 다스렸다. '신라'가 매양 침범하니 전쟁이 끊이질 않았다.
官有大對盧·太大兄·大兄·小兄·竟侯奢·烏拙·太大使者·大使者·小使者·褥奢· 屬·仙人, 凡十二等, 分掌內外事. 其大對盧則以强弱相陵奪而自爲之, 不由王署置. 復有內評·五部褥薩./$《隋書》[內評]下有[外評]二字.$/ 人皆頭著折風, 形如弁, 士人加揷二鳥羽. 貴者, 其冠曰蘇骨, 多用紫羅爲之, 飾以金銀. 服大袖衫·大口袴·素皮帶·黃革履. 婦人裙 加 . 書有《五經》·《三史》·《三國志》·《晉陽秋》. 兵器與中國略同. 及春秋校獵, 王親臨之. 稅, 布五疋·穀五石; 游人則三年一稅, 十人共細布一疋. 租, 戶一石, 次七斗, 下五斗. 其刑法, 叛及謀逆者, 縛之柱, 而斬之, 籍沒其家; 盜則償十倍, 若貧不能償者樂及公私債負, 皆聽評其子女爲奴婢以償之./$《周書》無[樂]字. 按此當是涉下文[樂有五絃琴]之[樂]字而衍.$/
관직은 대대로, 태대형, 대형, 소형, 경후사, 오졸, 태대사자, 대사자, 소사자, 욕사, 예속, 선인으로 무릇 십이등급이 있다. 나누어 내외의 일을 맡는다. 대대로는 강하고, 약함에 따라 빼앗아 스스로 오르는데, 왕이 두는 것이 아닌다. 다시 내평과 오부욕살이 있다. 사람들은 모두 절풍건을 머리에 쓰는데 형태가 고깔과 같고, 선비는새의 깃털을 양쪽에 꽂는다. 귀한 자는 관을 소골이라고 하는데, 자줏빛비단을 사용하고 금은으로 꾸민다. 옷은 소매가 넓고, 큰 바지에 가죽혁대 황색 가죽신발을 신는다. 부인은 치마와 저고리에 선을 두른다. 책은 '오경'과 '삼사' '삼국지' '진양추'가 있고, 병기는 중국과 같다. 봄 가을로는 사냥을 하는데 왕이 친히 이를 주제하고, 세는 포 오필과 곡 오석이고 유랑인은 삼년에 한번 세를 내고, 열명이 세포일필을 낸다. 조는 호당 일석, 다음은 칠두, 아래는 오두,이다. 형법에 배반하거나 모반하는 자는 기둥에 묶어 불사른 후에 베고, 집안도 몰살한다. 도적은 열배로 갚고, 만일 가난해서 갚지 못하면 빚을 지는데, 모두 청해 듣고 자녀를 노비로 삼아 갚는다.
그나라는 동쪽이 '신라'이고 서쪽은 '요'를 넘어 이천리이다. 남쪽은 '백제'와 접하고, 북쪽은 '말갈'과 이웃하니, 일천여리이다. 사람들은 토착하고, 산과 계곡에 의지하여 거쳐한다. 옷은 베와 비단과 가죽으로 하고, 땅이 척박하여 양잠하고 농사지어도 족하지 않다. 고로 사람들은 음식을 절약한다. 그 왕은 좋은 궁실을 닦아 도읍을 '평양성'이라 하고 또 말하길 '장안성'이라고 한다. 동서가 육리이고 산의 굴곡에 있어 남쪽은 '패수'에 임한다. 성내에 오직 창고에 쌓아두고 대비하는데, 적이 이르르면 들어와 지킨다. 왕은 따로 그 곁에 집을 짓는데 항상 거기에 거하지는 않는다. 그 밖에 '국내성'과 '한성'이 있는데 역시 다른 도읍지이다. 그 나라에서 삼경이라 부른다. 다시 '요동' '현토'등 십여성이 있는데 모두 관리를 두어 다스렸다. '신라'가 매양 침범하니 전쟁이 끊이질 않았다.
官有大對盧·太大兄·大兄·小兄·竟侯奢·烏拙·太大使者·大使者·小使者·褥奢· 屬·仙人, 凡十二等, 分掌內外事. 其大對盧則以强弱相陵奪而自爲之, 不由王署置. 復有內評·五部褥薩./$《隋書》[內評]下有[外評]二字.$/ 人皆頭著折風, 形如弁, 士人加揷二鳥羽. 貴者, 其冠曰蘇骨, 多用紫羅爲之, 飾以金銀. 服大袖衫·大口袴·素皮帶·黃革履. 婦人裙 加 . 書有《五經》·《三史》·《三國志》·《晉陽秋》. 兵器與中國略同. 及春秋校獵, 王親臨之. 稅, 布五疋·穀五石; 游人則三年一稅, 十人共細布一疋. 租, 戶一石, 次七斗, 下五斗. 其刑法, 叛及謀逆者, 縛之柱, 而斬之, 籍沒其家; 盜則償十倍, 若貧不能償者樂及公私債負, 皆聽評其子女爲奴婢以償之./$《周書》無[樂]字. 按此當是涉下文[樂有五絃琴]之[樂]字而衍.$/
관직은 대대로, 태대형, 대형, 소형, 경후사, 오졸, 태대사자, 대사자, 소사자, 욕사, 예속, 선인으로 무릇 십이등급이 있다. 나누어 내외의 일을 맡는다. 대대로는 강하고, 약함에 따라 빼앗아 스스로 오르는데, 왕이 두는 것이 아닌다. 다시 내평과 오부욕살이 있다. 사람들은 모두 절풍건을 머리에 쓰는데 형태가 고깔과 같고, 선비는새의 깃털을 양쪽에 꽂는다. 귀한 자는 관을 소골이라고 하는데, 자줏빛비단을 사용하고 금은으로 꾸민다. 옷은 소매가 넓고, 큰 바지에 가죽혁대 황색 가죽신발을 신는다. 부인은 치마와 저고리에 선을 두른다. 책은 '오경'과 '삼사' '삼국지' '진양추'가 있고, 병기는 중국과 같다. 봄 가을로는 사냥을 하는데 왕이 친히 이를 주제하고, 세는 포 오필과 곡 오석이고 유랑인은 삼년에 한번 세를 내고, 열명이 세포일필을 낸다. 조는 호당 일석, 다음은 칠두, 아래는 오두,이다. 형법에 배반하거나 모반하는 자는 기둥에 묶어 불사른 후에 베고, 집안도 몰살한다. 도적은 열배로 갚고, 만일 가난해서 갚지 못하면 빚을 지는데, 모두 청해 듣고 자녀를 노비로 삼아 갚는다.
用刑旣峻, 罕有犯者. 樂有五絃·琴·箏· ·橫吹·簫·鼓之屬, 吹蘆以和曲. 每年初, 聚戱<浿水>上, 王乘腰 ·列羽儀觀之. 事畢, 王以衣入水, 分爲左右二部, 以水石相 擲, 呼馳逐, 再三而止. 俗潔淨自喜, 尙容止, 以趨走爲敬. 拜則曳一脚, 立多反拱, 行必揷手./$《隋書》[揷]作[搖], 疑是.$/ 性多詭伏, 言辭鄙穢, 不簡親疏. 父子同川而浴, 共室而寢. 好歌舞, 常以十月祭天, 其公會衣服, 皆錦繡金銀以爲飾. 好 踞, 食用俎机. 出三尺馬, 云本<朱蒙>所乘馬種, 卽果下也. 風俗尙淫, 不以爲愧, 俗多游女, 夫無常人, 夜則男女 聚而戱, 無有貴賤之節. 有婚嫁, 取男女相悅卽爲之. 男家送猪酒而已, 無財聘之禮; 或有受財者, 人共恥之, 以爲賣婢. 死者, 殯在屋內, 經三年, 擇吉日而葬. 居父母及夫喪, 服皆三年, 兄弟三月. 初終哭泣, 葬則鼓舞作樂以送之. 埋訖, 取死者生時服玩車馬置墓側, 會葬者爭取而去. 信佛法, 敬鬼神, 多淫祠. 有神廟二所: 一曰<夫餘神>, 刻木作婦人像; 一曰<高登神>, 云是其始祖<夫餘神>之子. 置官司, 遣人守護, 蓋<河伯>女·<朱蒙>云.
형벌은 엄하여, 범하는 자가 드물다. 악기는 오현, 금, 쟁, 필률, 횡취, 소, 고지속이 있고, 피리는 굽어 있다. 매년 초에 '패수'위에서 모여 즐기는데, 왕은 가마를 타고 이를 지켜본다. 일을 마치면 왕이 옷을 물속에 넣고 좌우 두 개로 나누어 돌로싸 던진다. 떠들며 달리고 쫓기를 다시 세 번한 후 그친다. 풍속에 깨끗함을 좋아하고, 절제함을 숭상하고, 달리는 것을 공경한다. 절은 한쪽 다리를 끌고, 서 있을 때는 두 손을 맞 잡고 있고, 걸을때는 반드는 손을 낀다. 성격은 속임이 많고, 언사는 더럽고 추악하며, 책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 부자가 같은 내에서 목욕을 하고, 공실에서 같이 잠을 자고,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좋아하고, 항시 시월에 하늘에 제사지내는데 공적인 모임으로 의복을 입고, 모두 비단과 금은으로 장식한다. 걸터 않는 것을 좋아하고, 음식을 할 때 도마를 쓰고, 삼척마가 나온다. 이르기를 본래 '주몽'이 타던 말의 종류라 하는데, 즉 과하라 한다. 풍속에 음란함을 좋아하여,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풍속으로 유녀가 많아, 지아비로 아무나 삼는다. 밤이 되면 남녀가 무리지어 노는데, 귀천의 절도가 있지 않았다. 결혼을 할 때는 남녀가 서로 좋아하는 것을 인정하는데, 남자집에서 돼지와 술을 보내어 마친다. 재물이 없이 가는 것이 예로 혹 재물을 받는 사람이 있으면, 사람들이 이를 부끄러이 여기어, 여자종으로 파는 것으로 여기었다. 죽으면 염하여 집안에 놓는데, 삼년만에 길일을 탹하여 장사지낸다. 부모나 남편이 상을 당하면 옷을 삼년간 입고 형제는 삼개월간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울며 읍하는데, 장사의 법칙은 북치고, 춤추고, 음악하면서 죽은자를 보내는 것이다. 묻을 때에는 죽은자가 태어났을때의 옷과 익숙한 수레 말을 묘의 곁에 두는데, 장사에 모인자들이 다투어 취한후 가지고 간다. 불법을 믿고 귀신을 공경하고 음사가 많다. 신묘는 두곳이 있는데, 하나를 '부여신'이라 부르고 나무를 부인모양으로 깍은 사람의 형상이다. 나머지 하나는 '고등신'으로 이르기를 시조 '부여신'의 아들이라 한다. 함께 관사에 두고 사람을 파견하여 보호하니, 대개 '하백녀'와 '주몽'을 일컷는 것이다.
及<隋>平<陳>後, <湯>大懼, 陳兵積穀, 爲守拒之策. <開皇>十七年, 上賜璽書, 責以每遣使人歲常朝貢, 雖稱藩附, 誠節未盡. 驅逼<靺鞨>, 禁固<契丹>. 昔年潛行貨利, 招動 小, 私將弩手, 巡竄下國, 豈非意欲不臧, 故爲竊盜? 坐使空館, 嚴加防守; 又數遣馬騎, 殺害邊人. 恒自猜疑, 密 消息. 慇懃曉示, 許其自新. <湯>得書惶恐, 將表陳謝./$《隋書》[表]上有[奉]字, 疑此脫文.$/ 會病卒.
'수'가 '진'을 평정한 후에 '탕'이 크게 두려워 하여 병사를 진치고, 곡식을 쌓아 수비의 책을 만들었다. '개황' 십칠년 임금이 새서를 보내어 책하기를 매양 해마다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하더니 비록 변방에 붙어 산다고 하더라도 정성이 부족하다. '말갈'은 핍박해 오고, '거란'은 굳게 방비한다. 지난해 재화를 가지고 가는데, 작은 무리들이 사사로이 군사를 움직여서, 귀국으로 숨었다. 어찌 거두지 않고자 함이 아니면 고로 도둑이 아닌가? 객사에만 앉아 있지 말고, 더욱 수비를 증가해야 할 것이다. 또한 수차례 기병을 보내어 변방인을 죽이고, 항상 의심이 있어 숨을 죽이고 있다. 점차로 스스로 새로워지기를 바란다. '탕'이 서를 받고 두려워하더니 표를 올려 사죄하였다. 병으로 죽으니,
子<元>嗣. <文帝>使拜<元>爲上開府儀同三司, 襲爵<遼東公>, 賜服一襲. <元>奉表謝恩, 幷賀祥瑞, 因請封王. <文帝>優冊爲王. 明年, 率<靺鞨>萬餘騎寇<遼西>, <營州>總管<韋世沖>擊走之. 帝大怒, 命<漢王><諒>爲元帥, 總水陸討之, 下詔黜其爵位. 時 運不繼, 六軍乏食, 師出<臨 關>, 復遇疾疫, 王師不振. 及次<遼水>, <元>亦惶懼, 遣使謝罪, 上表稱[<遼東>糞土臣<元>]云云. 上於是罷兵, 待之如初. <元>亦歲遣朝貢.
아들 '원'이 이었다. 문제가 사신을 보내어, '원'을 '상개부의동삼사'로 삼고, '요동공'의 작위를 이으니, 옷을 하사하였다. '원'이 표를 받들어 감사하고, 상서에 하례하며 '왕'을 봉하기를 청하였다. '문제'가 칙서를 내려 왕으로 삼았다. 다음해, '말갈'을 거느리고 만여기병으로 '요서'를 도둑질 하자 '영주' 총관 '위세충'이 공격하자 달아났다. 제가 크게 노하여, 명하여 '한왕' '양'을 원수로 삼아, 수륙양군으로 이에 토벌하고, 그 작위를 물렸다. 때를 맞추어 운송하는 길이 이어지지 않자 여섯 군대가 굶주리고, '임유관'까지 갔다 질병을 만나 돌아오니, 왕사가 구할수 없었다. 다음으로 '요수'에 미치어, '원'이 역시 두려워 하여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며 표를 올리며 칭하기를 '요동의 하찮은 신하 원'이라 운운하였다. 임금이 이에 병사를 물리고, 처음과 같이 하였다. '원' 역시 해마다 조공하였다.
<煬帝>嗣位, 天下全盛, <高昌王>·<突厥><啓人可汗> 親詣闕貢獻, 於是徵<元>入朝. <元>懼, 蕃禮頗闕. <大業>七年, 帝將討<元>罪, 車駕度<遼水>, 止營於<遼東>地, 分道出師, 各頓兵於其城下. <高麗>出戰多不利, 皆 城固守. 帝令諸軍攻之, 又 諸將, <高麗>若降, 卽宜撫納, 不得縱兵入. 城將陷, 賊輒言降,/$諸本脫[將]字·[降]字, 據《隋書》·《通志》補.$/ 諸將奉旨, 不敢赴機. 先馳奏, 比報, 賊守禦亦備, 復出拒戰. 如此者三, 帝不悟. 由是食盡師老, 轉輸不繼, 諸軍多敗績, 於是班師. 是行也, 唯於<遼水>西拔賊<武 邏>, 置<遼東郡>及<通定鎭>而還. 九年, 帝復親征, 諸軍以便宜從事. 諸將分道攻城, 賊勢日蹙. 會<楊玄感>作亂, 帝大懼, 卽日六軍 還. 兵部侍郞<斛斯政>亡入<高麗>, <高麗>具知事實, 盡銳來追, 殿軍多敗. 十年, 又發天下兵, 會盜賊蜂起, 所在阻絶, 軍多失期. 至<遼水>, <高麗>亦困弊, 遣使乞降, 因送<斛斯政>贖罪. 帝許之, 頓<懷遠鎭>受其降, 仍以 囚軍實歸. 至京師, 以<高麗>使親告太廟, 因拘留之. 仍徵<元>入朝, <元>竟不至. 帝更圖後擧, 會天下喪亂, 遂不復行.
'양제'가 서니 천하의 전성기이다. '고창왕'과 '돌궐의 계인가한'이 함께 궐에 와서 공물을 받쳤는데, 이때 '원'을 입조하라 불렀는데, '원'이 두려워하여 오랑캐의 예의로 대궐에 무례하였다.(?) '대업' 칠년 제가 장차 '원'의 죄를 벌하려고 하여, 수레를 타고 '요수'를 건너 '요동'의 땅에 멈추어 영을 세웠다. 길을 나누어 나아가 각각 그 성의 아래에 당도 하였다. '고려'는 나아가 싸우는 것이 불리하다고 여기어 모두 성을 굳게 지키었다. 제가 여러 군사들에게 공격하라 명하고, 또 여러 장수들에게 칙서를 내리니, '고려'가 만약 항복한다면, 곧 마땅히 위로하며 얻어야 하고, 병사들이 들어가 불을 놓지 못하도록 하라. 하였다. 성이 장차 함락되려 하자, 도적들이 문득 항복하려는 말을 하고, 교지를 받들고자 하나 감히 나아가질 못한다고 하였다. 먼저 나아가 아뢰고 이를 보고하자, 적이 또 갖추오 방비 하고 다시 나와 방어전을 하였다. 이와 같음을 세 번을 하였는데, 제가 깨닫지를 못하였다. 이로말이암아 식량이 다 되고, 병사들이 지치자, 보급도 잇지 못하니 여러 군사들이 많이 패하여, 반이 되었다. 이 행함에 오직 '요수'의 서쪽 '무려라'만 빼앗고, '요동군'에 소속시키고, '통정진'으로 돌아왔다. 구년 제가 다시 친히 정벌하여 칙서를 여러 군사들에 내려 따르게 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길을 나우어 성을 공격하는데, 적의 기세가 그 날로 사그라졌다. '양현감'이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키자, 제가 크게 두려워 하여 곧 그날로 여섯 군대를 거느리고 돌아갔다. 병부시랑 '곡사정'이 망하여 '고려'에 들어갔는데, '고려'가 이 사실을 알고 정예군으로 뒤쫓으니 많은 군사가 패하였다. 십년 다시 천하의 병사를 일으켜 도적을 치려고 일어났는데 그 있는곳이 험하여 많은 군사를 잃어버렸다. '요수'에 이르자 '고려'도 역시 약해져서 사신을 보내어 항복을 빌고 '곡사정'을 보내며 속죄하였다. 제가 이를 허락하자, '회원진'에서 항복을 받고, 이어 사로 잡힌 병사들을 돌려 받았다. 도성에 도착하자 '고려'가 시신을 보내어 친히 사당에 고하자 이를 사로잡았다. 이에 '원'을 입조하라 하였으나, '원'이 오지 않았다. 제가 다시 후에 일어나길 꾀하였으나, 천하가 어지러워 다시 가질 못하였다.
百濟 (백제)
형벌은 엄하여, 범하는 자가 드물다. 악기는 오현, 금, 쟁, 필률, 횡취, 소, 고지속이 있고, 피리는 굽어 있다. 매년 초에 '패수'위에서 모여 즐기는데, 왕은 가마를 타고 이를 지켜본다. 일을 마치면 왕이 옷을 물속에 넣고 좌우 두 개로 나누어 돌로싸 던진다. 떠들며 달리고 쫓기를 다시 세 번한 후 그친다. 풍속에 깨끗함을 좋아하고, 절제함을 숭상하고, 달리는 것을 공경한다. 절은 한쪽 다리를 끌고, 서 있을 때는 두 손을 맞 잡고 있고, 걸을때는 반드는 손을 낀다. 성격은 속임이 많고, 언사는 더럽고 추악하며, 책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 부자가 같은 내에서 목욕을 하고, 공실에서 같이 잠을 자고,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좋아하고, 항시 시월에 하늘에 제사지내는데 공적인 모임으로 의복을 입고, 모두 비단과 금은으로 장식한다. 걸터 않는 것을 좋아하고, 음식을 할 때 도마를 쓰고, 삼척마가 나온다. 이르기를 본래 '주몽'이 타던 말의 종류라 하는데, 즉 과하라 한다. 풍속에 음란함을 좋아하여,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풍속으로 유녀가 많아, 지아비로 아무나 삼는다. 밤이 되면 남녀가 무리지어 노는데, 귀천의 절도가 있지 않았다. 결혼을 할 때는 남녀가 서로 좋아하는 것을 인정하는데, 남자집에서 돼지와 술을 보내어 마친다. 재물이 없이 가는 것이 예로 혹 재물을 받는 사람이 있으면, 사람들이 이를 부끄러이 여기어, 여자종으로 파는 것으로 여기었다. 죽으면 염하여 집안에 놓는데, 삼년만에 길일을 탹하여 장사지낸다. 부모나 남편이 상을 당하면 옷을 삼년간 입고 형제는 삼개월간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울며 읍하는데, 장사의 법칙은 북치고, 춤추고, 음악하면서 죽은자를 보내는 것이다. 묻을 때에는 죽은자가 태어났을때의 옷과 익숙한 수레 말을 묘의 곁에 두는데, 장사에 모인자들이 다투어 취한후 가지고 간다. 불법을 믿고 귀신을 공경하고 음사가 많다. 신묘는 두곳이 있는데, 하나를 '부여신'이라 부르고 나무를 부인모양으로 깍은 사람의 형상이다. 나머지 하나는 '고등신'으로 이르기를 시조 '부여신'의 아들이라 한다. 함께 관사에 두고 사람을 파견하여 보호하니, 대개 '하백녀'와 '주몽'을 일컷는 것이다.
及<隋>平<陳>後, <湯>大懼, 陳兵積穀, 爲守拒之策. <開皇>十七年, 上賜璽書, 責以每遣使人歲常朝貢, 雖稱藩附, 誠節未盡. 驅逼<靺鞨>, 禁固<契丹>. 昔年潛行貨利, 招動 小, 私將弩手, 巡竄下國, 豈非意欲不臧, 故爲竊盜? 坐使空館, 嚴加防守; 又數遣馬騎, 殺害邊人. 恒自猜疑, 密 消息. 慇懃曉示, 許其自新. <湯>得書惶恐, 將表陳謝./$《隋書》[表]上有[奉]字, 疑此脫文.$/ 會病卒.
'수'가 '진'을 평정한 후에 '탕'이 크게 두려워 하여 병사를 진치고, 곡식을 쌓아 수비의 책을 만들었다. '개황' 십칠년 임금이 새서를 보내어 책하기를 매양 해마다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하더니 비록 변방에 붙어 산다고 하더라도 정성이 부족하다. '말갈'은 핍박해 오고, '거란'은 굳게 방비한다. 지난해 재화를 가지고 가는데, 작은 무리들이 사사로이 군사를 움직여서, 귀국으로 숨었다. 어찌 거두지 않고자 함이 아니면 고로 도둑이 아닌가? 객사에만 앉아 있지 말고, 더욱 수비를 증가해야 할 것이다. 또한 수차례 기병을 보내어 변방인을 죽이고, 항상 의심이 있어 숨을 죽이고 있다. 점차로 스스로 새로워지기를 바란다. '탕'이 서를 받고 두려워하더니 표를 올려 사죄하였다. 병으로 죽으니,
子<元>嗣. <文帝>使拜<元>爲上開府儀同三司, 襲爵<遼東公>, 賜服一襲. <元>奉表謝恩, 幷賀祥瑞, 因請封王. <文帝>優冊爲王. 明年, 率<靺鞨>萬餘騎寇<遼西>, <營州>總管<韋世沖>擊走之. 帝大怒, 命<漢王><諒>爲元帥, 總水陸討之, 下詔黜其爵位. 時 運不繼, 六軍乏食, 師出<臨 關>, 復遇疾疫, 王師不振. 及次<遼水>, <元>亦惶懼, 遣使謝罪, 上表稱[<遼東>糞土臣<元>]云云. 上於是罷兵, 待之如初. <元>亦歲遣朝貢.
아들 '원'이 이었다. 문제가 사신을 보내어, '원'을 '상개부의동삼사'로 삼고, '요동공'의 작위를 이으니, 옷을 하사하였다. '원'이 표를 받들어 감사하고, 상서에 하례하며 '왕'을 봉하기를 청하였다. '문제'가 칙서를 내려 왕으로 삼았다. 다음해, '말갈'을 거느리고 만여기병으로 '요서'를 도둑질 하자 '영주' 총관 '위세충'이 공격하자 달아났다. 제가 크게 노하여, 명하여 '한왕' '양'을 원수로 삼아, 수륙양군으로 이에 토벌하고, 그 작위를 물렸다. 때를 맞추어 운송하는 길이 이어지지 않자 여섯 군대가 굶주리고, '임유관'까지 갔다 질병을 만나 돌아오니, 왕사가 구할수 없었다. 다음으로 '요수'에 미치어, '원'이 역시 두려워 하여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며 표를 올리며 칭하기를 '요동의 하찮은 신하 원'이라 운운하였다. 임금이 이에 병사를 물리고, 처음과 같이 하였다. '원' 역시 해마다 조공하였다.
<煬帝>嗣位, 天下全盛, <高昌王>·<突厥><啓人可汗> 親詣闕貢獻, 於是徵<元>入朝. <元>懼, 蕃禮頗闕. <大業>七年, 帝將討<元>罪, 車駕度<遼水>, 止營於<遼東>地, 分道出師, 各頓兵於其城下. <高麗>出戰多不利, 皆 城固守. 帝令諸軍攻之, 又 諸將, <高麗>若降, 卽宜撫納, 不得縱兵入. 城將陷, 賊輒言降,/$諸本脫[將]字·[降]字, 據《隋書》·《通志》補.$/ 諸將奉旨, 不敢赴機. 先馳奏, 比報, 賊守禦亦備, 復出拒戰. 如此者三, 帝不悟. 由是食盡師老, 轉輸不繼, 諸軍多敗績, 於是班師. 是行也, 唯於<遼水>西拔賊<武 邏>, 置<遼東郡>及<通定鎭>而還. 九年, 帝復親征, 諸軍以便宜從事. 諸將分道攻城, 賊勢日蹙. 會<楊玄感>作亂, 帝大懼, 卽日六軍 還. 兵部侍郞<斛斯政>亡入<高麗>, <高麗>具知事實, 盡銳來追, 殿軍多敗. 十年, 又發天下兵, 會盜賊蜂起, 所在阻絶, 軍多失期. 至<遼水>, <高麗>亦困弊, 遣使乞降, 因送<斛斯政>贖罪. 帝許之, 頓<懷遠鎭>受其降, 仍以 囚軍實歸. 至京師, 以<高麗>使親告太廟, 因拘留之. 仍徵<元>入朝, <元>竟不至. 帝更圖後擧, 會天下喪亂, 遂不復行.
'양제'가 서니 천하의 전성기이다. '고창왕'과 '돌궐의 계인가한'이 함께 궐에 와서 공물을 받쳤는데, 이때 '원'을 입조하라 불렀는데, '원'이 두려워하여 오랑캐의 예의로 대궐에 무례하였다.(?) '대업' 칠년 제가 장차 '원'의 죄를 벌하려고 하여, 수레를 타고 '요수'를 건너 '요동'의 땅에 멈추어 영을 세웠다. 길을 나누어 나아가 각각 그 성의 아래에 당도 하였다. '고려'는 나아가 싸우는 것이 불리하다고 여기어 모두 성을 굳게 지키었다. 제가 여러 군사들에게 공격하라 명하고, 또 여러 장수들에게 칙서를 내리니, '고려'가 만약 항복한다면, 곧 마땅히 위로하며 얻어야 하고, 병사들이 들어가 불을 놓지 못하도록 하라. 하였다. 성이 장차 함락되려 하자, 도적들이 문득 항복하려는 말을 하고, 교지를 받들고자 하나 감히 나아가질 못한다고 하였다. 먼저 나아가 아뢰고 이를 보고하자, 적이 또 갖추오 방비 하고 다시 나와 방어전을 하였다. 이와 같음을 세 번을 하였는데, 제가 깨닫지를 못하였다. 이로말이암아 식량이 다 되고, 병사들이 지치자, 보급도 잇지 못하니 여러 군사들이 많이 패하여, 반이 되었다. 이 행함에 오직 '요수'의 서쪽 '무려라'만 빼앗고, '요동군'에 소속시키고, '통정진'으로 돌아왔다. 구년 제가 다시 친히 정벌하여 칙서를 여러 군사들에 내려 따르게 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길을 나우어 성을 공격하는데, 적의 기세가 그 날로 사그라졌다. '양현감'이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키자, 제가 크게 두려워 하여 곧 그날로 여섯 군대를 거느리고 돌아갔다. 병부시랑 '곡사정'이 망하여 '고려'에 들어갔는데, '고려'가 이 사실을 알고 정예군으로 뒤쫓으니 많은 군사가 패하였다. 십년 다시 천하의 병사를 일으켜 도적을 치려고 일어났는데 그 있는곳이 험하여 많은 군사를 잃어버렸다. '요수'에 이르자 '고려'도 역시 약해져서 사신을 보내어 항복을 빌고 '곡사정'을 보내며 속죄하였다. 제가 이를 허락하자, '회원진'에서 항복을 받고, 이어 사로 잡힌 병사들을 돌려 받았다. 도성에 도착하자 '고려'가 시신을 보내어 친히 사당에 고하자 이를 사로잡았다. 이에 '원'을 입조하라 하였으나, '원'이 오지 않았다. 제가 다시 후에 일어나길 꾀하였으나, 천하가 어지러워 다시 가질 못하였다.
百濟 (백제)
<百濟>之國, 蓋<馬韓>之屬也, 出自<索離國>./$《梁書》卷五四《高句麗傳》[索離]作[ 離],《三國志》卷三 《夫餘傳》註引《魏略》作[高離]殿本作[ 離],《隋書》卷八一《百濟傳》作[高麗]. 按[ ]音[高]. [索]當是[ ]之訛. [ 離]卽[高麗]也.$/ 其王出行, 其侍兒於後姙娠, 王還, 欲殺之. 侍兒曰: [前見天上有氣如大鷄子來降, 感, 故有娠.] 王捨之. 後生男, 王置之豕牢, 豕以口氣噓之, 不死; 後徙於馬 , 亦如之. 王以爲神, 命養之, 名曰<東明>. 及長, 善射, 王忌其猛, 復欲殺之. <東明>乃奔走, 南至<淹滯水>, 以弓擊水, 魚鼈皆爲橋, <東明>乘之得度, 至<夫餘>而王焉. <東明>之後有<仇台>, 篤於仁信, 始立國于<帶方>故地. <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 遂爲東夷强國. 初以百家濟, 因號<百濟>.
'백제'라는 나라는 대개 '마한'의 속국으로 '색리국'에서 나왔다. 그 왕이 출행하였는데, 그 시종드는 아이가 임신을 하였다. 왕이 돌아와 죽이고자 하니, 그 시종드는 아이가 말하길, 전에 하늘을 보았는데, 위에서 큰 계란같은 기운이 있어, 내려와서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왕이 이를 버려두었는데, 후에 남자 아이을 낳았다. 왕이 돼지우리에 두었으나 돼지가 입기운으로 이를 보호하여 죽지 않고, 다시 마굿간에 두었으나 역시 이와 같았다. 왕이 신비롭다 하여 명을 내려 이를 기르니 명하여 '동명'이라 하였다. 장성하더니 활을 잘쏘자 왕이 그 용맹함을 꺼려하여 다시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동명'이 이에 달아나 남쪽의 '엄대수'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모두 다리를 만들었다. '동명'이 이를 타고 건널수 있었다. '부여'에 이르러 왕노릇을 하였다. '동명'의 후손중에 '구태'가 있었는데, 인정이 많고, 어질고 믿음이 있어 나라를 세우니 '대방'의 옛 땅이다. '한'의 요동태수 '공손도'의 여자를 처로 삼으니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 처음 백집으로 시작하니 이로써 '백제'라 하였다.
其國東極<新羅>, 北接<高句麗>,/$諸本脫[北接高]三字, 據《周書》卷四九《百濟傳》補.《隋書》作[北拒高麗].$/ 西南俱限大海, 處小海南, 東西四百五十里, 南北九百餘里. 其都曰<居拔城>, 亦曰<固麻城>. 其外更有五方: 中方曰<古沙城>, 東方曰<得安城>, 南方曰<久知下城>, 西方曰<刀先城>, 北方曰<熊津城>. 王姓<餘氏>, 號[於羅瑕], 百姓呼爲[ 吉之], <夏>言 王也. 王妻號[於陸], <夏>言妃也. 官有十六品: 左平五人, 一品; 達率三十人, 二品; 恩率, 三品; 德率, 四品; 率, 五品; 奈率, 六品. 已上冠飾銀華. 將德, 七品, 紫帶. 施德, 八品, 帶. 固德, 九品, 赤帶. 季德, 十品, 靑帶. 對德, 十一品; 文督, 十二品, 皆黃帶. 武督, 十三品; 佐軍, 十四品; 振武, 十五品; 剋虞, 十六品, 皆白帶. 自恩率以下, 官無常員. 各有部司, 分掌衆務. 內官有前內部·穀內部·/$《周書》作[穀部肉部]. 按疑此脫[部]字, [肉]訛爲[內].$/內掠部·外掠部·馬部·刀部·功德部·藥部·木部·法部·後宮部. 外官有司軍部·司徒部·司空部·司寇部·點口部·客部·外舍部·綢部·日官部·市部./$《周書》上有[都]字, 疑是.$/ 長吏三年一交代. 都下有萬家,/$諸本[萬家]訛作[方], 據《周書》改. 此涉下文[五方]又[方][万]形似而誤.$/ 分爲五部, 曰上部·前部·中部·下部·後部, 部有五巷, 士庶居焉./$諸本[焉]訛作[馬], 據《周書》改.$/ 部統兵五百人. 五方各有方領一人, 以達率爲之, 方佐貳之. 方有十郡, 郡有將三人, 以德率爲之. 統兵一千二百人以下, 七百人以上./$《周書》[統]上有[方]字.$/ 城之內外人庶及餘小城, 咸分 焉./$諸本脫[人]字,《周書》有[民]字,《通志》卷一九四《百濟傳》有[人]字. 今據《通志》補.$/
그 나라의 동쪽은 '신라'이고 북쪽은 '고구려'에 접하고 서쪽과 남쪽은 큰 바다에 경계하니 소해의 남쪽에 위치한다. 동서로 사백오십리이고 남북이 구백여리이다. 그 도읍을 '거발성'이라 하는데 또한 '고마성'이라고 한다. 그 밖으로는 오방이 있는데, 중방을 '고사성' 동방을 '득안성' 남방을 '구지하성' 서방을 '도선성' 북방을 '웅진성'이라 한다. 왕의 성은 '여씨'이고 '어라하'라 부르는데 백성들은 '건길지'라 부른다. '하'나라 말로 왕과 같은 것이다. 왕의 처는 '어륙'이라 하는데, '하'나라 말로는 비라는 것이다. 관직은 십육품이 있는데, 좌평이 오명으로 일품이요, 달솔이 삼십명으로 이품이요, 은솔이 삼품, 덕솔이 사품, 우솔이 오품, 금솔이 육품으로 이상은 관에 은과 꽃으로 장식을 한다. 장덕이 칠품으로 자주색 띠를 두르고, 시덕이 팔품으로 검정색 띠를 두르고, 고덕은 구품으로 붉은띠, 계덕은 십품으로 청색띠, 대덕은 십일품, 문독은 십이품으로 모두 노랑띠, 무독은 십삼품, 좌군은 십사품, 진무는 십오품, 극우는 십육품으로 모두 백색띠를 두른다. 은솔이하로는 관직이 수효가 없다. 각각 부사가 있는데, 나누어 일을 맡는다. 내관에는 전내부, 곡내부, 내경부, 왜경부, 마부, 도부, 공덕부, 낙부, 목부, 법부, 후궁부가 있다. 외관에는 사군부, 사도부, 사공부, 사구부, 점구부, 객부, 외사부, 주부, 일관부, 시부가 있다. 오래해도 삼년에 한번씩 교대한다. 도읍에는 만가가 있고, 나누어 오부가 있는데, 상부, 전부, 중부, 하부, 후부이고, 부에는 오항이 있어 선비들이 거처한다. 부에는 병사가 총 오백명이다. 오방에는 각각 방령이 한명이 있고, 달솔이 이를 하고, 방좌가 두명이다. 방에는 열 개의 군이 있고, 군에는 장수가 세명이 있는데, 덕솔이 이를 한다. 총 병사는 일천이백명 이하, 칠백명이상이다. 성의 안과 밖의 백성들이 남아 작은성에 나누어 살게 한다.
其人雜有<新羅>·<高麗>·<倭>等, 亦有中國人. 其飮食衣服, 與<高麗>略同. 若朝拜祭祀, 其冠兩廂加翅, 戎事則不. 拜謁之禮, 以兩手據地爲禮. 婦人不加粉黛, 女 髮垂後, 已出嫁, 則分爲兩道, 盤於頭上. 衣似袍而袖微大. 兵有弓箭刀 . 俗重騎射, 兼愛墳史, 而秀異者頗解屬文, 能吏事. 又知醫藥·蓍龜, 與相術·陰陽五行法. 有僧尼, 多寺塔, 而無道士. 有鼓角· ·箏 · 笛之樂, 投壺· 蒲·弄珠·握 等雜戱. 尤尙奕 . 行<宋>《元嘉曆》, 以建寅月爲歲首. 賦稅以布·絹·絲·麻及米等, 量歲 儉, 差等輸之. 其刑罰, 反叛·退軍及殺人者, 斬; 盜者, 流, 其贓兩倍徵之; 婦犯姦, 沒入夫家爲婢. 婚娶之禮, 略同華俗. 父母及夫死者, 三年居服, 餘親則葬訖除之. 土田濕, 氣候溫暖, 人皆山居. 有巨栗, 其五穀·雜果·菜蔬及酒醴肴饌之屬, 多同於內地. 唯無駝· ·驢·羊·鵝·鴨等. 國中大姓有八族,/$諸本脫[八]字, 據《隋書》補.$/ <沙氏>·<燕氏>·<沙氏>·<解氏>·<眞氏>·<國氏>·<木氏>·<苗氏>. 其王每以四仲月祭天及五帝之神. 立其始祖<仇台>之廟於國城, 歲四祠之. 國西南, 人島居者十五所, 皆有城邑.
백성들은 '신라', '고려', '왜'등과 섞여 있는데, 역시 중국인도 있다. 그 음식과 의복은 '고려'와 비슷함이 있고, 만일 제사지내거나 조알할때는 그 관의 양쪽에 날개를 더하는데, 전쟁할때는 그렇지 않다. 절하거나 아뢰는 예는 양손을 땅에대는 것으로 예를 삼는다. 부인은 화장을 하지 않고, 여자는 머리를 땋아 뒤로 드리우고, 결혼하면 곧 양쪽으로 드리우고, 판같은 것을 머리에 얻는다. 옷은 핫옷 비슷해서 소매가 작으나 통이 넓다. 병기는 활과 화살 도와 창이 있다. 풍속에 기사를 중히 여기고 겸하여 고전도 사랑한다. 뛰어난 자는 글을 짓거나 파자할 줄 알고, 여러일에 능하다. 또한 의약과 점을 칠 줄 알고, 상술과 음양오행법을 안다. 승려와 비구니가 있고, 절과 탑이 많으나, 도사는 없다. 악기로는 고각·공후·쟁우·호적이 있고, 투호·저포·농주·악삭등의 놀이가 있는데, 바둑과 장기를 숭상한다. '송'의 '원가력'를 쓰는데, 인월을 세수로 삼는다. 조세는 베, 명주, 실, 마, 쌀등으로 받는데, 그해의 풍년이나 흉년을 해아려서 차등을 두어 걷는다. 형벌에는 배반하는 자나 후퇴하는 군사, 살인한 자는 죽이고, 도둑질한자는 쫓아 내고, 훔친 물건의 두배로 값게 한다. 부인이 간음을 하면, 그 남편의 집의 노비로 삼는다. 혼인하는 예는 중국의 풍속과 같다. 부모나 남편이 죽으면, 삼년동안 복을 입고, 나머지 친척은 장사가 끝나면, 이내 멈춘다. 밭이 습하고, 기후는 온난하며, 사람들은 모두 산에 거처한다. 큰 밤이 있으며, 오곡과, 잡과, 채소와 술등의 찬거리가 중국과 같은 것이 많다. 낙타, 노새, 당나귀, 양, 거위와 오리등은 없다. 나라에는 큰 성씨가 여덟족속이 있는데, '사씨' '연씨', '사씨(?)', ' 해씨', '진씨', '국씨', '목씨', '묘씨'이다. 그 왕은 늘 사중월에 하늘과 오제의 신에게 제사 지낸다. 그 시조 '구태'의 사당을 나라의 성에 세우고 해마다 네 번 제사지낸다. 나라의 서남쪽에 사람들이 섬의 열다섯군데에 거하는데, 모두 성읍이 있다.
<魏><延興>二年, 其王<餘慶>始遣其冠軍將軍駙馬都尉<弗斯侯>·長史<餘禮>·龍 將軍<帶方>太守司馬<張茂>等上表自通, 云: [臣與<高麗>, 源出<夫餘>, 先世之時, 篤崇舊款. 其祖<釗>, 輕廢隣好, 陵踐臣境. 臣祖<須>, 整旅電邁, 梟斬<釗>首. 自爾以來, 莫敢南顧. 自<馮氏>數終, 餘燼奔竄, 醜類漸盛, 遂見陵逼, 構怨連禍, 三十餘載. 若天慈曲矜, 遠及無外, 速遣一將, 來救臣國. 當奉送鄙女, 執掃後宮, 幷遣子弟, 牧 外廐, 尺壤疋夫, 不敢自有. 去庚辰年後, 臣西界海中, 見尸十餘, 幷得衣器鞍勒. 看之, 非<高麗>之物. 後聞乃是王人來降臣國, 長蛇隔路, 以阻于海./$《魏書》卷一 《百濟傳》[阻]作[沈]. 按[阻]疑是[ ]之訛.$/ 今上所得鞍一, 以爲實矯.]/$《魏書》[矯]作[驗],《通志》作[據]. 按[矯]字無義, 疑誤.$/
'위'의 '연흥' 이년 그 왕 '여경'이 처음으로 관군장군부마도위 '불사후', 장사 '여례', 용양장군 대방태수 사마 '장무'등을 보내어 상표를 올리고 통하였다. 말하기를 신은 '고려'와 함께 '부여'에서 근원하는데, 선왕때부터 오래된 정성이 도탑고, 숭상했다. 그 조상 '쇠'가 가벼이 좋은 이웃을 부시고자, 신의 경계로 넘어왔는데, 신의 할아버지 '수'가 번개같이 군사를 이끌고가 '쇠'의 머리를 베었습니다. 스스로 이후부터, 조용하게 감히 남쪽을 엿보더니, 스스로 '풍씨'에게 수차례 멸망하여 불타고, 달아나 숨었습니다. 이런 나쁜 무리들이 점차 일어나더니, 끝내 위협을 가하여, 원망과 재난이 끊이질 않은지가 삼십여년입니다. 만일 천자께서 자애로와 불쌍히 여기신다면, 멀리 밖이라 여기지 말고 빨리 장수 하나를 보내어, 신의 나라를 구해주시옵서서. 마땅히 어리석은 여자를 받들어 보내니, 후궁으로 삼으시고, 자식과 동생을 함께 보내니, 마굿간지기를 시키던지, 밖으로 폐하던지, 하십시오. 흙이나 갈아야할 필부는 감히 스스로 있지 못합니다. 경진년에 가다가 신의 서쪽 경계 바다에서 시여구의 시체를 보았는데, 아울러 옷과 그릇, 안장과 재갈을 얻었습니다. 이를 살펴보니, '고려'의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후세 소문을 들으니, 왕의 사람들이 신하의 나라에 항복하여 오는데, 큰 뱀이 길을 막았다 합니다, 바다가 험합니다. 이제 얻은 말 안장 하나를 올리니, 바로잡아 주시옵서서. 하였다.
<獻文>以其僻遠, 冒險入獻, 禮遇優厚, 遣使者<邵安>與其使俱還. 詔曰: [得表聞之無恙. 卿與<高麗>不睦, 致被陵犯, 苟能順義, 守之以仁, 亦何憂於寇 也. 前所遣使, 浮海以撫荒外之國, 從來積年, 往而不反, 存亡達否, 未能審悉. 卿所送鞍, 比校舊乘, 非中國之物. 不可以疑似之事, 以生必然之過. 經略權要, 已具別旨.] 又詔曰: [<高麗>稱藩先朝, 供職日久, 於彼雖有自昔之 , 於國未有犯令之愆. 卿使命始通, 便求致伐, 尋討事會, 理亦未周. 所獻錦布海物, 雖不悉達, 明卿至心. 今賜雜物如別.] 又詔<璉>護送<安>等. 至<高麗>, <璉>稱昔與<餘慶>有 , 不令東過. <安>等於是皆還, 乃下詔切責之. 五年, 使<安>等從<東萊>浮海, 賜<餘慶>璽書, 其誠節. <安>等至海濱, 遇風飄蕩, 竟不達而還.
'헌문'이 그 후미지고 먼 곳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바치러 오니, 예가 두텁고, 도탑다 하여, 사신 '소안'을 보내어 그 사신과 함께 돌아가게 하였다. 조서에 말하기를 표들 듣고 근심이 없음을 알았다. 경이 '고려'와 화목하지 않아, 능이 범해지는 일을 당하였는데, 순하고 의로와 인으로서 지키고자 하니 역시 어찌 도둑과 원수함의 근심이 없겠는가. 전에 사신을 보내었는데, 바다로 거친 외국으로 갔다. 간지가 몇 년인데, 가서 돌아오지 않으니, 망했다고 생각했서 자세히 살폈었다. 경이 안장을 보내와 옛날에 따던 것과 비교했었는데, 중국의 물건이 아니었다. 의심함이 이와 같으면 아니되니, 그러함이 지니치어 생긴 것이다. 다스림에 분별력이 필요하니, 갈라서려는 것을 버려야 한다. 또 조서에 말하기를 '고려'는 먼저 조공하였고, 오래전부터 임무에 이바지 하고 있어, 그가 옛날의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그가 영을 범하는 잘못을 하지 않았다. 경이 처음 통하여 벌하기를 구하는데, 벌하는 일을 찾는 것이 아직은 이치에 두루 미치지 않는다. 금과 베 해무을 바쳤는데, 모두다 미치지는 않았지만, 밝은 경의 마음이 이르렀다. 이제 여러 물건을 나누어 하사한다. 또 '련'에게 '안'등을 보호하며 보내라 하였다. '고려'에 이르렀는데, '련'이 '여경'과 옛날에 원수가 있다 하여, 동쪽으로 지나감을 허락하지 않았다. '안'등이 이에 모두 돌아 오자, 이를 책하였다. 오년 '안'등이 '동래'에서 바다로 나아가 '여경'에게 새서를 하사하고, 성절을 칭찬하였다. '안'등이 바닷가에 이르러 우연히 폭풍우를 만다, 끝내 돌아오지 못하였다.
自<晉>·<宋>·<齊>·<梁>據<江>左,/$諸本[左]下衍[右]字, 據《周書》刪.$/ 亦遣使稱藩, 兼受拜封. 亦與<魏>不絶.
'진', '송', '제', '양'이 '강'의 왼쪽에서 일어났는데, 역시 사신을 보내어 번이라 칭하면서, 봉함을 받았고, '위'와도 끊어지지 않았다.
及<齊>受<東魏>禪, 其王<隆>亦通使焉. 淹死, 子<餘昌>亦通使命於<齊>./$《周書》[淹]作[隆], 此作[淹]疑誤. 又《梁書》言<隆>死以其子<餘明>爲<百濟王>, 與此作[餘昌]不同.$/ <武平>元年, <齊><後主>以<餘昌>爲使持節·侍中·車騎大將軍, <帶方郡公>·<百濟王>如故. 二年, 又以<餘昌>爲<持節>·都督<東靑州>諸軍事·<東靑州>刺史.
'제'가 '동위'에게 선양을 받자, 그 왕 '융'이 역시 통하였다. 그가 죽자 아들 '여창'이 역시 '제과 통하고, '무평'원년 '제'의 '후주'가 '여창'을 '사지절 시중 거기대장군'을 삼고, 대방군공, 백제왕은 옛날과 같았다. 이년 또 '여창'을 '지절 도독 동청주 제군사 동청주 자사'로 삼았다.
<周><建德>六年, <齊>滅, <餘昌>始遣使<通周>. <宣政>元年, 又遣使來獻.
'주' '건덕' 육년 '제'가 멸망하자 '여창'이 '주'에 사신을 보내도 통하기 시작하였다. '선정' 원년 또 사신을 보내어 헌납하였다.
<隋><開皇>初, <餘昌>又遣使貢方物, 拜上開府·<帶方郡公>·<百濟王>. 平<陳>之歲, 戰船漂至海東<牟羅國>. 其船得還, 經于<百濟>, <昌>資送之甚厚, 幷遣使奉表賀平<陳>. <文帝>善之, 下詔曰: [彼國懸隔, 來往至難, 自今以後, 不須年別入貢.]使者舞蹈而去. 十八年, <餘昌>使其長史<王辯那>來獻方物./$諸本無[十]字,《隋書》有. 按上文言昌遣使賀平陳, 平陳在開皇九年, 則此不得在八年. 下云[屬興<遼東>之役], 指<開皇>十八年<楊諒>·<高 >攻<高麗>事. 知脫[十]字, 今據補.$/ 屬興<遼東>之役, 遣奉表, 請爲軍導. 帝下詔, 厚其使而遣之. <高麗> 頗知其事, 兵侵其境. <餘昌>死, 子<餘璋>立./$《隋書》作:[<昌>死, 子<餘宣>立. 死, 子<餘璋>立.] 此當脫五字.$/ <大業>三年, <餘璋>遣使<燕文進>朝貢. 其年, 又遣使<王孝隣>入獻, 請討<高麗>. <煬帝>許之, 命 <高麗>動靜. 然<餘璋>內與<高麗>通和, 挾詐以窺中國. 七年, 帝親征<高麗>, <餘璋>使其臣<國智牟>來請軍期. 帝大悅, 厚加賞賜, 遣尙書起部郞<席律>詣<百濟>, 與相知. 明年, 六軍度<遼>, <餘璋>亦嚴兵於境, 聲言助軍, 實持兩端. 尋與<新羅>有隙, 每相戰爭. 十年, 復遣使朝貢. 後天下亂, 使命遂絶.
'수' '개황' 초에 '여창'이 또 방물을 밭치고 '상개부 대방군공 백제왕'을 하사받았다. '진'을 평정한 해에, 전선이 떠돌다 바다동쪽의 '모라국'에 이르렀다. 그배가 돌아 왔는데, '백제'를 경위하자, '창'이 두터훈 재물을 보내고, 아울러 사신을 보내어 '진'을 평정함을 경축하는 표를 받들었다. '문제' 이를 선히 여기어 조서를 내려 말하길, 너의 나라는 멀어 오고 감에 어려움이 있으니 이후로는 마땅히 공물을 받침에 해마다 하지 않아도 된다. 하니 사자가 춤을 추며, 떠났다. 십팔년 '여창'이 사신 장사 '왕변나'를 보내어 방물을 받쳤다. '요동'에서 전투가 일어나자, 표를 받들어 보내길, 군사를 이끌수 있도록 청하자, 제가 조서를 내려, 후이, 그렇게 하라 하니 이에 보냈다. '고려'가 이 사실을 알고, 병사로 그 지경을 침범하였다. '여창'이 죽자, '아들 여장'이 섰다. '대업' 삼년 '여장'이 사신 '연문진'을 보내어 조공하고, 그해 도 '왕효린'을 보내어, 헌납하며 '고려'를 치길 청하였다. '양제'가 이를 허락하고, 명하여 '고려'의 동정을 엿 보았다. 그리하여 '여경'이 안으로 '고려'와 화통하면서, 그 사이에서 거짓말 하며 중국을 엿보았다. 칠년, 제가 친히 '고려'를 정벌하자, '여장'이 신하 '국지모'를 보내어 군사를 보내기를 약속하자, 제가 크게 기뻐하며, 후하게 상을 하사하고, 상서기부랑 '석률'을 보내어 '백제'에 이르르자, 서로 무리됨을 알았다. 다음해, 여섯군대가 '요'를 건너고, '여장' 역시 병사가 지경에 이르러 군사를 돕는다 맹세하니 실로 양단에서 지켜야 했다. 평소 '신라'와는 틈이 있어, 매양 전쟁하였다. 십년 다시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후에 중국이 어지러워지자, 사신이 끊어졌다.
其南, 海行三月有<牟羅國>, 南北千餘里, 東西數百里, 土多 鹿, 附庸於<百濟>. 西行三日, 至<貊國>千餘里云.
남쪽 바다로 삼개월을 가면 '모라국'이 있다. 남북이 천여리이고 동서로 수백리이다. 땅에 노루와 사슴이 많고, '백제'에 의지하고 있다. 서쪽으로 삼일을 가면 '맥국'에 이르는데, 천여리라 말한다.
新羅 (신라)
'백제'라는 나라는 대개 '마한'의 속국으로 '색리국'에서 나왔다. 그 왕이 출행하였는데, 그 시종드는 아이가 임신을 하였다. 왕이 돌아와 죽이고자 하니, 그 시종드는 아이가 말하길, 전에 하늘을 보았는데, 위에서 큰 계란같은 기운이 있어, 내려와서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왕이 이를 버려두었는데, 후에 남자 아이을 낳았다. 왕이 돼지우리에 두었으나 돼지가 입기운으로 이를 보호하여 죽지 않고, 다시 마굿간에 두었으나 역시 이와 같았다. 왕이 신비롭다 하여 명을 내려 이를 기르니 명하여 '동명'이라 하였다. 장성하더니 활을 잘쏘자 왕이 그 용맹함을 꺼려하여 다시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동명'이 이에 달아나 남쪽의 '엄대수'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모두 다리를 만들었다. '동명'이 이를 타고 건널수 있었다. '부여'에 이르러 왕노릇을 하였다. '동명'의 후손중에 '구태'가 있었는데, 인정이 많고, 어질고 믿음이 있어 나라를 세우니 '대방'의 옛 땅이다. '한'의 요동태수 '공손도'의 여자를 처로 삼으니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 처음 백집으로 시작하니 이로써 '백제'라 하였다.
其國東極<新羅>, 北接<高句麗>,/$諸本脫[北接高]三字, 據《周書》卷四九《百濟傳》補.《隋書》作[北拒高麗].$/ 西南俱限大海, 處小海南, 東西四百五十里, 南北九百餘里. 其都曰<居拔城>, 亦曰<固麻城>. 其外更有五方: 中方曰<古沙城>, 東方曰<得安城>, 南方曰<久知下城>, 西方曰<刀先城>, 北方曰<熊津城>. 王姓<餘氏>, 號[於羅瑕], 百姓呼爲[ 吉之], <夏>言 王也. 王妻號[於陸], <夏>言妃也. 官有十六品: 左平五人, 一品; 達率三十人, 二品; 恩率, 三品; 德率, 四品; 率, 五品; 奈率, 六品. 已上冠飾銀華. 將德, 七品, 紫帶. 施德, 八品, 帶. 固德, 九品, 赤帶. 季德, 十品, 靑帶. 對德, 十一品; 文督, 十二品, 皆黃帶. 武督, 十三品; 佐軍, 十四品; 振武, 十五品; 剋虞, 十六品, 皆白帶. 自恩率以下, 官無常員. 各有部司, 分掌衆務. 內官有前內部·穀內部·/$《周書》作[穀部肉部]. 按疑此脫[部]字, [肉]訛爲[內].$/內掠部·外掠部·馬部·刀部·功德部·藥部·木部·法部·後宮部. 外官有司軍部·司徒部·司空部·司寇部·點口部·客部·外舍部·綢部·日官部·市部./$《周書》上有[都]字, 疑是.$/ 長吏三年一交代. 都下有萬家,/$諸本[萬家]訛作[方], 據《周書》改. 此涉下文[五方]又[方][万]形似而誤.$/ 分爲五部, 曰上部·前部·中部·下部·後部, 部有五巷, 士庶居焉./$諸本[焉]訛作[馬], 據《周書》改.$/ 部統兵五百人. 五方各有方領一人, 以達率爲之, 方佐貳之. 方有十郡, 郡有將三人, 以德率爲之. 統兵一千二百人以下, 七百人以上./$《周書》[統]上有[方]字.$/ 城之內外人庶及餘小城, 咸分 焉./$諸本脫[人]字,《周書》有[民]字,《通志》卷一九四《百濟傳》有[人]字. 今據《通志》補.$/
그 나라의 동쪽은 '신라'이고 북쪽은 '고구려'에 접하고 서쪽과 남쪽은 큰 바다에 경계하니 소해의 남쪽에 위치한다. 동서로 사백오십리이고 남북이 구백여리이다. 그 도읍을 '거발성'이라 하는데 또한 '고마성'이라고 한다. 그 밖으로는 오방이 있는데, 중방을 '고사성' 동방을 '득안성' 남방을 '구지하성' 서방을 '도선성' 북방을 '웅진성'이라 한다. 왕의 성은 '여씨'이고 '어라하'라 부르는데 백성들은 '건길지'라 부른다. '하'나라 말로 왕과 같은 것이다. 왕의 처는 '어륙'이라 하는데, '하'나라 말로는 비라는 것이다. 관직은 십육품이 있는데, 좌평이 오명으로 일품이요, 달솔이 삼십명으로 이품이요, 은솔이 삼품, 덕솔이 사품, 우솔이 오품, 금솔이 육품으로 이상은 관에 은과 꽃으로 장식을 한다. 장덕이 칠품으로 자주색 띠를 두르고, 시덕이 팔품으로 검정색 띠를 두르고, 고덕은 구품으로 붉은띠, 계덕은 십품으로 청색띠, 대덕은 십일품, 문독은 십이품으로 모두 노랑띠, 무독은 십삼품, 좌군은 십사품, 진무는 십오품, 극우는 십육품으로 모두 백색띠를 두른다. 은솔이하로는 관직이 수효가 없다. 각각 부사가 있는데, 나누어 일을 맡는다. 내관에는 전내부, 곡내부, 내경부, 왜경부, 마부, 도부, 공덕부, 낙부, 목부, 법부, 후궁부가 있다. 외관에는 사군부, 사도부, 사공부, 사구부, 점구부, 객부, 외사부, 주부, 일관부, 시부가 있다. 오래해도 삼년에 한번씩 교대한다. 도읍에는 만가가 있고, 나누어 오부가 있는데, 상부, 전부, 중부, 하부, 후부이고, 부에는 오항이 있어 선비들이 거처한다. 부에는 병사가 총 오백명이다. 오방에는 각각 방령이 한명이 있고, 달솔이 이를 하고, 방좌가 두명이다. 방에는 열 개의 군이 있고, 군에는 장수가 세명이 있는데, 덕솔이 이를 한다. 총 병사는 일천이백명 이하, 칠백명이상이다. 성의 안과 밖의 백성들이 남아 작은성에 나누어 살게 한다.
其人雜有<新羅>·<高麗>·<倭>等, 亦有中國人. 其飮食衣服, 與<高麗>略同. 若朝拜祭祀, 其冠兩廂加翅, 戎事則不. 拜謁之禮, 以兩手據地爲禮. 婦人不加粉黛, 女 髮垂後, 已出嫁, 則分爲兩道, 盤於頭上. 衣似袍而袖微大. 兵有弓箭刀 . 俗重騎射, 兼愛墳史, 而秀異者頗解屬文, 能吏事. 又知醫藥·蓍龜, 與相術·陰陽五行法. 有僧尼, 多寺塔, 而無道士. 有鼓角· ·箏 · 笛之樂, 投壺· 蒲·弄珠·握 等雜戱. 尤尙奕 . 行<宋>《元嘉曆》, 以建寅月爲歲首. 賦稅以布·絹·絲·麻及米等, 量歲 儉, 差等輸之. 其刑罰, 反叛·退軍及殺人者, 斬; 盜者, 流, 其贓兩倍徵之; 婦犯姦, 沒入夫家爲婢. 婚娶之禮, 略同華俗. 父母及夫死者, 三年居服, 餘親則葬訖除之. 土田濕, 氣候溫暖, 人皆山居. 有巨栗, 其五穀·雜果·菜蔬及酒醴肴饌之屬, 多同於內地. 唯無駝· ·驢·羊·鵝·鴨等. 國中大姓有八族,/$諸本脫[八]字, 據《隋書》補.$/ <沙氏>·<燕氏>·<沙氏>·<解氏>·<眞氏>·<國氏>·<木氏>·<苗氏>. 其王每以四仲月祭天及五帝之神. 立其始祖<仇台>之廟於國城, 歲四祠之. 國西南, 人島居者十五所, 皆有城邑.
백성들은 '신라', '고려', '왜'등과 섞여 있는데, 역시 중국인도 있다. 그 음식과 의복은 '고려'와 비슷함이 있고, 만일 제사지내거나 조알할때는 그 관의 양쪽에 날개를 더하는데, 전쟁할때는 그렇지 않다. 절하거나 아뢰는 예는 양손을 땅에대는 것으로 예를 삼는다. 부인은 화장을 하지 않고, 여자는 머리를 땋아 뒤로 드리우고, 결혼하면 곧 양쪽으로 드리우고, 판같은 것을 머리에 얻는다. 옷은 핫옷 비슷해서 소매가 작으나 통이 넓다. 병기는 활과 화살 도와 창이 있다. 풍속에 기사를 중히 여기고 겸하여 고전도 사랑한다. 뛰어난 자는 글을 짓거나 파자할 줄 알고, 여러일에 능하다. 또한 의약과 점을 칠 줄 알고, 상술과 음양오행법을 안다. 승려와 비구니가 있고, 절과 탑이 많으나, 도사는 없다. 악기로는 고각·공후·쟁우·호적이 있고, 투호·저포·농주·악삭등의 놀이가 있는데, 바둑과 장기를 숭상한다. '송'의 '원가력'를 쓰는데, 인월을 세수로 삼는다. 조세는 베, 명주, 실, 마, 쌀등으로 받는데, 그해의 풍년이나 흉년을 해아려서 차등을 두어 걷는다. 형벌에는 배반하는 자나 후퇴하는 군사, 살인한 자는 죽이고, 도둑질한자는 쫓아 내고, 훔친 물건의 두배로 값게 한다. 부인이 간음을 하면, 그 남편의 집의 노비로 삼는다. 혼인하는 예는 중국의 풍속과 같다. 부모나 남편이 죽으면, 삼년동안 복을 입고, 나머지 친척은 장사가 끝나면, 이내 멈춘다. 밭이 습하고, 기후는 온난하며, 사람들은 모두 산에 거처한다. 큰 밤이 있으며, 오곡과, 잡과, 채소와 술등의 찬거리가 중국과 같은 것이 많다. 낙타, 노새, 당나귀, 양, 거위와 오리등은 없다. 나라에는 큰 성씨가 여덟족속이 있는데, '사씨' '연씨', '사씨(?)', ' 해씨', '진씨', '국씨', '목씨', '묘씨'이다. 그 왕은 늘 사중월에 하늘과 오제의 신에게 제사 지낸다. 그 시조 '구태'의 사당을 나라의 성에 세우고 해마다 네 번 제사지낸다. 나라의 서남쪽에 사람들이 섬의 열다섯군데에 거하는데, 모두 성읍이 있다.
<魏><延興>二年, 其王<餘慶>始遣其冠軍將軍駙馬都尉<弗斯侯>·長史<餘禮>·龍 將軍<帶方>太守司馬<張茂>等上表自通, 云: [臣與<高麗>, 源出<夫餘>, 先世之時, 篤崇舊款. 其祖<釗>, 輕廢隣好, 陵踐臣境. 臣祖<須>, 整旅電邁, 梟斬<釗>首. 自爾以來, 莫敢南顧. 自<馮氏>數終, 餘燼奔竄, 醜類漸盛, 遂見陵逼, 構怨連禍, 三十餘載. 若天慈曲矜, 遠及無外, 速遣一將, 來救臣國. 當奉送鄙女, 執掃後宮, 幷遣子弟, 牧 外廐, 尺壤疋夫, 不敢自有. 去庚辰年後, 臣西界海中, 見尸十餘, 幷得衣器鞍勒. 看之, 非<高麗>之物. 後聞乃是王人來降臣國, 長蛇隔路, 以阻于海./$《魏書》卷一 《百濟傳》[阻]作[沈]. 按[阻]疑是[ ]之訛.$/ 今上所得鞍一, 以爲實矯.]/$《魏書》[矯]作[驗],《通志》作[據]. 按[矯]字無義, 疑誤.$/
'위'의 '연흥' 이년 그 왕 '여경'이 처음으로 관군장군부마도위 '불사후', 장사 '여례', 용양장군 대방태수 사마 '장무'등을 보내어 상표를 올리고 통하였다. 말하기를 신은 '고려'와 함께 '부여'에서 근원하는데, 선왕때부터 오래된 정성이 도탑고, 숭상했다. 그 조상 '쇠'가 가벼이 좋은 이웃을 부시고자, 신의 경계로 넘어왔는데, 신의 할아버지 '수'가 번개같이 군사를 이끌고가 '쇠'의 머리를 베었습니다. 스스로 이후부터, 조용하게 감히 남쪽을 엿보더니, 스스로 '풍씨'에게 수차례 멸망하여 불타고, 달아나 숨었습니다. 이런 나쁜 무리들이 점차 일어나더니, 끝내 위협을 가하여, 원망과 재난이 끊이질 않은지가 삼십여년입니다. 만일 천자께서 자애로와 불쌍히 여기신다면, 멀리 밖이라 여기지 말고 빨리 장수 하나를 보내어, 신의 나라를 구해주시옵서서. 마땅히 어리석은 여자를 받들어 보내니, 후궁으로 삼으시고, 자식과 동생을 함께 보내니, 마굿간지기를 시키던지, 밖으로 폐하던지, 하십시오. 흙이나 갈아야할 필부는 감히 스스로 있지 못합니다. 경진년에 가다가 신의 서쪽 경계 바다에서 시여구의 시체를 보았는데, 아울러 옷과 그릇, 안장과 재갈을 얻었습니다. 이를 살펴보니, '고려'의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후세 소문을 들으니, 왕의 사람들이 신하의 나라에 항복하여 오는데, 큰 뱀이 길을 막았다 합니다, 바다가 험합니다. 이제 얻은 말 안장 하나를 올리니, 바로잡아 주시옵서서. 하였다.
<獻文>以其僻遠, 冒險入獻, 禮遇優厚, 遣使者<邵安>與其使俱還. 詔曰: [得表聞之無恙. 卿與<高麗>不睦, 致被陵犯, 苟能順義, 守之以仁, 亦何憂於寇 也. 前所遣使, 浮海以撫荒外之國, 從來積年, 往而不反, 存亡達否, 未能審悉. 卿所送鞍, 比校舊乘, 非中國之物. 不可以疑似之事, 以生必然之過. 經略權要, 已具別旨.] 又詔曰: [<高麗>稱藩先朝, 供職日久, 於彼雖有自昔之 , 於國未有犯令之愆. 卿使命始通, 便求致伐, 尋討事會, 理亦未周. 所獻錦布海物, 雖不悉達, 明卿至心. 今賜雜物如別.] 又詔<璉>護送<安>等. 至<高麗>, <璉>稱昔與<餘慶>有 , 不令東過. <安>等於是皆還, 乃下詔切責之. 五年, 使<安>等從<東萊>浮海, 賜<餘慶>璽書, 其誠節. <安>等至海濱, 遇風飄蕩, 竟不達而還.
'헌문'이 그 후미지고 먼 곳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바치러 오니, 예가 두텁고, 도탑다 하여, 사신 '소안'을 보내어 그 사신과 함께 돌아가게 하였다. 조서에 말하기를 표들 듣고 근심이 없음을 알았다. 경이 '고려'와 화목하지 않아, 능이 범해지는 일을 당하였는데, 순하고 의로와 인으로서 지키고자 하니 역시 어찌 도둑과 원수함의 근심이 없겠는가. 전에 사신을 보내었는데, 바다로 거친 외국으로 갔다. 간지가 몇 년인데, 가서 돌아오지 않으니, 망했다고 생각했서 자세히 살폈었다. 경이 안장을 보내와 옛날에 따던 것과 비교했었는데, 중국의 물건이 아니었다. 의심함이 이와 같으면 아니되니, 그러함이 지니치어 생긴 것이다. 다스림에 분별력이 필요하니, 갈라서려는 것을 버려야 한다. 또 조서에 말하기를 '고려'는 먼저 조공하였고, 오래전부터 임무에 이바지 하고 있어, 그가 옛날의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그가 영을 범하는 잘못을 하지 않았다. 경이 처음 통하여 벌하기를 구하는데, 벌하는 일을 찾는 것이 아직은 이치에 두루 미치지 않는다. 금과 베 해무을 바쳤는데, 모두다 미치지는 않았지만, 밝은 경의 마음이 이르렀다. 이제 여러 물건을 나누어 하사한다. 또 '련'에게 '안'등을 보호하며 보내라 하였다. '고려'에 이르렀는데, '련'이 '여경'과 옛날에 원수가 있다 하여, 동쪽으로 지나감을 허락하지 않았다. '안'등이 이에 모두 돌아 오자, 이를 책하였다. 오년 '안'등이 '동래'에서 바다로 나아가 '여경'에게 새서를 하사하고, 성절을 칭찬하였다. '안'등이 바닷가에 이르러 우연히 폭풍우를 만다, 끝내 돌아오지 못하였다.
自<晉>·<宋>·<齊>·<梁>據<江>左,/$諸本[左]下衍[右]字, 據《周書》刪.$/ 亦遣使稱藩, 兼受拜封. 亦與<魏>不絶.
'진', '송', '제', '양'이 '강'의 왼쪽에서 일어났는데, 역시 사신을 보내어 번이라 칭하면서, 봉함을 받았고, '위'와도 끊어지지 않았다.
及<齊>受<東魏>禪, 其王<隆>亦通使焉. 淹死, 子<餘昌>亦通使命於<齊>./$《周書》[淹]作[隆], 此作[淹]疑誤. 又《梁書》言<隆>死以其子<餘明>爲<百濟王>, 與此作[餘昌]不同.$/ <武平>元年, <齊><後主>以<餘昌>爲使持節·侍中·車騎大將軍, <帶方郡公>·<百濟王>如故. 二年, 又以<餘昌>爲<持節>·都督<東靑州>諸軍事·<東靑州>刺史.
'제'가 '동위'에게 선양을 받자, 그 왕 '융'이 역시 통하였다. 그가 죽자 아들 '여창'이 역시 '제과 통하고, '무평'원년 '제'의 '후주'가 '여창'을 '사지절 시중 거기대장군'을 삼고, 대방군공, 백제왕은 옛날과 같았다. 이년 또 '여창'을 '지절 도독 동청주 제군사 동청주 자사'로 삼았다.
<周><建德>六年, <齊>滅, <餘昌>始遣使<通周>. <宣政>元年, 又遣使來獻.
'주' '건덕' 육년 '제'가 멸망하자 '여창'이 '주'에 사신을 보내도 통하기 시작하였다. '선정' 원년 또 사신을 보내어 헌납하였다.
<隋><開皇>初, <餘昌>又遣使貢方物, 拜上開府·<帶方郡公>·<百濟王>. 平<陳>之歲, 戰船漂至海東<牟羅國>. 其船得還, 經于<百濟>, <昌>資送之甚厚, 幷遣使奉表賀平<陳>. <文帝>善之, 下詔曰: [彼國懸隔, 來往至難, 自今以後, 不須年別入貢.]使者舞蹈而去. 十八年, <餘昌>使其長史<王辯那>來獻方物./$諸本無[十]字,《隋書》有. 按上文言昌遣使賀平陳, 平陳在開皇九年, 則此不得在八年. 下云[屬興<遼東>之役], 指<開皇>十八年<楊諒>·<高 >攻<高麗>事. 知脫[十]字, 今據補.$/ 屬興<遼東>之役, 遣奉表, 請爲軍導. 帝下詔, 厚其使而遣之. <高麗> 頗知其事, 兵侵其境. <餘昌>死, 子<餘璋>立./$《隋書》作:[<昌>死, 子<餘宣>立. 死, 子<餘璋>立.] 此當脫五字.$/ <大業>三年, <餘璋>遣使<燕文進>朝貢. 其年, 又遣使<王孝隣>入獻, 請討<高麗>. <煬帝>許之, 命 <高麗>動靜. 然<餘璋>內與<高麗>通和, 挾詐以窺中國. 七年, 帝親征<高麗>, <餘璋>使其臣<國智牟>來請軍期. 帝大悅, 厚加賞賜, 遣尙書起部郞<席律>詣<百濟>, 與相知. 明年, 六軍度<遼>, <餘璋>亦嚴兵於境, 聲言助軍, 實持兩端. 尋與<新羅>有隙, 每相戰爭. 十年, 復遣使朝貢. 後天下亂, 使命遂絶.
'수' '개황' 초에 '여창'이 또 방물을 밭치고 '상개부 대방군공 백제왕'을 하사받았다. '진'을 평정한 해에, 전선이 떠돌다 바다동쪽의 '모라국'에 이르렀다. 그배가 돌아 왔는데, '백제'를 경위하자, '창'이 두터훈 재물을 보내고, 아울러 사신을 보내어 '진'을 평정함을 경축하는 표를 받들었다. '문제' 이를 선히 여기어 조서를 내려 말하길, 너의 나라는 멀어 오고 감에 어려움이 있으니 이후로는 마땅히 공물을 받침에 해마다 하지 않아도 된다. 하니 사자가 춤을 추며, 떠났다. 십팔년 '여창'이 사신 장사 '왕변나'를 보내어 방물을 받쳤다. '요동'에서 전투가 일어나자, 표를 받들어 보내길, 군사를 이끌수 있도록 청하자, 제가 조서를 내려, 후이, 그렇게 하라 하니 이에 보냈다. '고려'가 이 사실을 알고, 병사로 그 지경을 침범하였다. '여창'이 죽자, '아들 여장'이 섰다. '대업' 삼년 '여장'이 사신 '연문진'을 보내어 조공하고, 그해 도 '왕효린'을 보내어, 헌납하며 '고려'를 치길 청하였다. '양제'가 이를 허락하고, 명하여 '고려'의 동정을 엿 보았다. 그리하여 '여경'이 안으로 '고려'와 화통하면서, 그 사이에서 거짓말 하며 중국을 엿보았다. 칠년, 제가 친히 '고려'를 정벌하자, '여장'이 신하 '국지모'를 보내어 군사를 보내기를 약속하자, 제가 크게 기뻐하며, 후하게 상을 하사하고, 상서기부랑 '석률'을 보내어 '백제'에 이르르자, 서로 무리됨을 알았다. 다음해, 여섯군대가 '요'를 건너고, '여장' 역시 병사가 지경에 이르러 군사를 돕는다 맹세하니 실로 양단에서 지켜야 했다. 평소 '신라'와는 틈이 있어, 매양 전쟁하였다. 십년 다시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후에 중국이 어지러워지자, 사신이 끊어졌다.
其南, 海行三月有<牟羅國>, 南北千餘里, 東西數百里, 土多 鹿, 附庸於<百濟>. 西行三日, 至<貊國>千餘里云.
남쪽 바다로 삼개월을 가면 '모라국'이 있다. 남북이 천여리이고 동서로 수백리이다. 땅에 노루와 사슴이 많고, '백제'에 의지하고 있다. 서쪽으로 삼일을 가면 '맥국'에 이르는데, 천여리라 말한다.
新羅 (신라)
<新羅>者, 其先本<辰韓>種也. 地在<高麗>東南, 居<漢>時<樂浪>地. <辰韓>亦曰<秦韓>. 相傳言<秦>世亡人避役來適, <馬韓>割其東界居之, 以<秦>人, 故名之曰<秦韓>. 其言語名物, 有似中國人, 名國爲邦, 弓爲弧, 賊爲寇, 行酒爲行觴, 相呼皆爲徒, 不與<馬韓>同. 又<辰韓>王常用<馬韓>人作之, 世世相傳, <辰韓>不得自立王, 明其流移之人故也. 恒爲<馬韓>所制. <辰韓>之始, 有六國, 稍分爲十二, <新羅>則其一也. 或稱<魏>將< 丘儉>討<高麗>破之, 奔<沃沮>, 其後復歸故國, 有留者, 遂爲<新羅>, 亦曰<斯盧>. 其人雜有<華夏>·<高麗>·<百濟>之屬,/$諸本[雜]訛作[辯], 據《隋書》卷八一《新羅傳》改.$/ 兼有<沃沮>·<不耐>·<韓>·<濊>之地. 其王本<百濟>人, 自海逃入<新羅>, 遂王其國. 初附庸于<百濟>, <百濟>征<高麗>, 不堪戎役, 後相率歸之, 遂致强盛. 因襲<百濟>, 附庸於<迦羅國>焉. 傳世三十, 至<眞平>./$《隋書》作[傳祚至<金眞平>]. 按《通典》卷一八五《新羅傳》云[其王姓<金>名<眞平>], 引《隋東蕃風俗記》云:[<金>姓相承, 三十餘葉.] 這裏[眞平]上當脫[金]字.$/ 以<隋><開皇>十四年, 遣使貢方物. <文帝>拜<眞平>上開府·<樂浪郡公>·<新羅王>.
'신라'는 근본이 '진한'의 종자이다. 땅은 '고려'의 동남쪽에 있고, '한나라'때의 '낙랑'땅에 거한다. '진한'의 역시 '진한'이라고도 한다. 전하는 말로 '진'나라때에 사역을 피하여 온 사람이라고 하니, '마한'이 그 동쪽 경계를 나누어 거하게 하였다. '진'나라 사람이기 때문에 고로 '진한'이라고 하였다.그 말로 물건의 이름이 중국인과 유사하니 나라의 이름을 나라 하고, 궁을 호라 하고, 적을 구라하고 주를 상이라고 상을 도라고 하니 '마한'과 같지 않다. 또한 '진한'의 왕은 항시 '마한'사람이 하는데, 대대로 전하여 '진한'은 스스로 왕위에 오를 수 없어, 밝혀 유이민이기 때문이다. 항상 '마한'의 제도를 따랐다. '진한'의 처음에 육국이 있었는데, 점점 나누어져 십이국이 되고, '신라'는 그중의 하나였다. 혹 칭하길 '위'의 장수 '관구검'이 '고려'를 쳐서 이를 깨뜨렸는데, '옥저'로 도망해서, 나중에 옛날의 나라로 돌아 왔다. 남는 자가 있어서 '신라'를 이루었다 하니, 역시 '사로'라 불리었다. 그 사람들은 '중국'과 '고려', '백제'와 섞여있는데, '옥저', '불내', '한', '예'의 땅에도 겸하여 있다. 그 왕은 본래 '백제'사람으로 바다로 도망하여 '신라'로 들어가 그나라에서 왕을 하였다. 처음 '백제'에 의지해 있었는데, '백제'가 '고려'를 정벌할 때, 혹독한 사역을 견디지 못하여, 후에 돌아와 강성하게 되었다. 그런 이유로 '백제'를 엄습하고, '가야국'에 의지하였다. 삼십세를 전하여 '진평'에 이르렀는데, '수' '개황'십사년이다.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받쳤다. '문제'가 '진평'을 '상개부 낙랑군공 신라왕'에 봉하였다.
其官有十七等: 一曰伊罰干, 貴如相國, 次伊尺干, 次迎干, 次破彌干, 次大阿尺干, 次阿尺干, 次乙吉干, 次沙 干, 次及伏干, 次大奈摩干,/$《通典》[干] 作[于], 未知孰是. 又《梁書》云:[其官名有子賁旱支·齊旱支·謁旱支·壹告支·奇目旱支.] 與此不同.$/ 次奈摩, 次大舍, 次小舍, 次吉士, 次大烏, 次小烏, 次造位. 外有郡縣. 其文字·甲兵, 同於中國. 選人壯健者悉入軍, 烽·戌·邏俱有屯營部伍./$諸本及《隋書》[營]作[管].《通典》作[營], 是, 今據改.$/ 風俗·刑政·衣服略與<高麗>·<百濟>同. 每月旦相賀, 王設宴會, 班賚 官. 其日, 拜日月神主. 八月十五日設樂, 令官人射, 賞以馬·布./$《隋書》[每]下有[正]字, [主]字作[至]. 按《隋書》是說正月元旦相賀, 拜日月神; 至八月十五日, 又設樂競射.《北史》疑是脫訛.$/ 其有大事, 則聚官詳議定之. 服色尙 素./$《隋書》無[ ]字. 按 則不素, 疑是衍文.$/ 婦人 髮繞頸,/$《隋書》[頸]作[頭], 是. 此形似致誤.$/ 以雜綵及珠爲飾. 婚嫁禮唯酒食而已, 輕重隨貧富. 新婦之夕, 女先拜舅姑, 次卽拜大兄·夫./$《隋書》無[大兄]二字,《通志》卷一九四《新羅傳》作[次拜大兄, 次拜夫].$/ 死有棺 , 葬送起墳陵. 王及父母妻子喪, 居服一年. 田甚良沃, 水陸兼種. 其五穀·果菜·鳥獸·物産, 略與華同.
관직은 십칠품으로, 일은 이벌간으로 중국의 귀와 같고, 다음은 이척간 다음은 영간, 다음은 파미간, 대아척간, 아척간, 을길간, 사돌간, 급복간, 대나마간, 나마, 대사, 소사, 길사, 대오, 소오, 조위 순이다. 밖으로 군현이 있고, 문자와 갑병은 중국과 같다. 건장한 사람을 가리고 군사로 뽑는데, 봉, 술, 라로 함께 영, 부, 오로 진을 친다. 풍속과 형벌, 정치, 의복은 '고려', '백제'와 같다. 매달 아침마다 하례하며 왕이 연회를 배풀면서 무리에 관직을 하사한다. 그날에 태양과 달의 신에게 절한다. 팔월십오일은 풍류를 베푸는데, 관인이 활을 쏘아 상으로 말과 포를 내린다. 큰 일이 있으면, 벼슬아치들이 모여 의논하여 정한다. 옷색깔로 흰색을 숭상하고, 부인들은 머리를 땋아 목에 두르며, 비단과 구슬을 섞어 꾸민다. 결혼의 예는 술과 음식으로 하고, 빈부로써 경중을 따른다. 신부는 저녁에 가서, 여자가 먼저 시아비와 시어미에게 절하고 다음으로 대형과 지아비에게 절한다. 죽은자에게는 관이 있고, 장사지냄에 봉분을 쌓는다. 왕에서부터 부모처자의 상까지 일년간 복을 입는다. 밭은 물대기가 좋아서 물과 육지의 씨를 겸할수 있다. 오곡과 과채, 조수과 물산은 중국과 같다.
<大業>以來, 歲遣朝貢. <新羅>地多山險, 雖與<百濟>構隙, <百濟>亦不能圖之也.
'대업'때에 왔는데, 해마다 조공하였다. '신라'의 땅은 산이 많고 험하고, '백제'와 약간의 차이가 있다하더라도 '백제'도 능히 제도할 수 없었다.
'신라'는 근본이 '진한'의 종자이다. 땅은 '고려'의 동남쪽에 있고, '한나라'때의 '낙랑'땅에 거한다. '진한'의 역시 '진한'이라고도 한다. 전하는 말로 '진'나라때에 사역을 피하여 온 사람이라고 하니, '마한'이 그 동쪽 경계를 나누어 거하게 하였다. '진'나라 사람이기 때문에 고로 '진한'이라고 하였다.그 말로 물건의 이름이 중국인과 유사하니 나라의 이름을 나라 하고, 궁을 호라 하고, 적을 구라하고 주를 상이라고 상을 도라고 하니 '마한'과 같지 않다. 또한 '진한'의 왕은 항시 '마한'사람이 하는데, 대대로 전하여 '진한'은 스스로 왕위에 오를 수 없어, 밝혀 유이민이기 때문이다. 항상 '마한'의 제도를 따랐다. '진한'의 처음에 육국이 있었는데, 점점 나누어져 십이국이 되고, '신라'는 그중의 하나였다. 혹 칭하길 '위'의 장수 '관구검'이 '고려'를 쳐서 이를 깨뜨렸는데, '옥저'로 도망해서, 나중에 옛날의 나라로 돌아 왔다. 남는 자가 있어서 '신라'를 이루었다 하니, 역시 '사로'라 불리었다. 그 사람들은 '중국'과 '고려', '백제'와 섞여있는데, '옥저', '불내', '한', '예'의 땅에도 겸하여 있다. 그 왕은 본래 '백제'사람으로 바다로 도망하여 '신라'로 들어가 그나라에서 왕을 하였다. 처음 '백제'에 의지해 있었는데, '백제'가 '고려'를 정벌할 때, 혹독한 사역을 견디지 못하여, 후에 돌아와 강성하게 되었다. 그런 이유로 '백제'를 엄습하고, '가야국'에 의지하였다. 삼십세를 전하여 '진평'에 이르렀는데, '수' '개황'십사년이다.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받쳤다. '문제'가 '진평'을 '상개부 낙랑군공 신라왕'에 봉하였다.
其官有十七等: 一曰伊罰干, 貴如相國, 次伊尺干, 次迎干, 次破彌干, 次大阿尺干, 次阿尺干, 次乙吉干, 次沙 干, 次及伏干, 次大奈摩干,/$《通典》[干] 作[于], 未知孰是. 又《梁書》云:[其官名有子賁旱支·齊旱支·謁旱支·壹告支·奇目旱支.] 與此不同.$/ 次奈摩, 次大舍, 次小舍, 次吉士, 次大烏, 次小烏, 次造位. 外有郡縣. 其文字·甲兵, 同於中國. 選人壯健者悉入軍, 烽·戌·邏俱有屯營部伍./$諸本及《隋書》[營]作[管].《通典》作[營], 是, 今據改.$/ 風俗·刑政·衣服略與<高麗>·<百濟>同. 每月旦相賀, 王設宴會, 班賚 官. 其日, 拜日月神主. 八月十五日設樂, 令官人射, 賞以馬·布./$《隋書》[每]下有[正]字, [主]字作[至]. 按《隋書》是說正月元旦相賀, 拜日月神; 至八月十五日, 又設樂競射.《北史》疑是脫訛.$/ 其有大事, 則聚官詳議定之. 服色尙 素./$《隋書》無[ ]字. 按 則不素, 疑是衍文.$/ 婦人 髮繞頸,/$《隋書》[頸]作[頭], 是. 此形似致誤.$/ 以雜綵及珠爲飾. 婚嫁禮唯酒食而已, 輕重隨貧富. 新婦之夕, 女先拜舅姑, 次卽拜大兄·夫./$《隋書》無[大兄]二字,《通志》卷一九四《新羅傳》作[次拜大兄, 次拜夫].$/ 死有棺 , 葬送起墳陵. 王及父母妻子喪, 居服一年. 田甚良沃, 水陸兼種. 其五穀·果菜·鳥獸·物産, 略與華同.
관직은 십칠품으로, 일은 이벌간으로 중국의 귀와 같고, 다음은 이척간 다음은 영간, 다음은 파미간, 대아척간, 아척간, 을길간, 사돌간, 급복간, 대나마간, 나마, 대사, 소사, 길사, 대오, 소오, 조위 순이다. 밖으로 군현이 있고, 문자와 갑병은 중국과 같다. 건장한 사람을 가리고 군사로 뽑는데, 봉, 술, 라로 함께 영, 부, 오로 진을 친다. 풍속과 형벌, 정치, 의복은 '고려', '백제'와 같다. 매달 아침마다 하례하며 왕이 연회를 배풀면서 무리에 관직을 하사한다. 그날에 태양과 달의 신에게 절한다. 팔월십오일은 풍류를 베푸는데, 관인이 활을 쏘아 상으로 말과 포를 내린다. 큰 일이 있으면, 벼슬아치들이 모여 의논하여 정한다. 옷색깔로 흰색을 숭상하고, 부인들은 머리를 땋아 목에 두르며, 비단과 구슬을 섞어 꾸민다. 결혼의 예는 술과 음식으로 하고, 빈부로써 경중을 따른다. 신부는 저녁에 가서, 여자가 먼저 시아비와 시어미에게 절하고 다음으로 대형과 지아비에게 절한다. 죽은자에게는 관이 있고, 장사지냄에 봉분을 쌓는다. 왕에서부터 부모처자의 상까지 일년간 복을 입는다. 밭은 물대기가 좋아서 물과 육지의 씨를 겸할수 있다. 오곡과 과채, 조수과 물산은 중국과 같다.
<大業>以來, 歲遣朝貢. <新羅>地多山險, 雖與<百濟>構隙, <百濟>亦不能圖之也.
'대업'때에 왔는데, 해마다 조공하였다. '신라'의 땅은 산이 많고 험하고, '백제'와 약간의 차이가 있다하더라도 '백제'도 능히 제도할 수 없었다.
勿吉國 (물길국:말갈)
<勿吉國>在<高句麗>北, 一曰<靺鞨>. 邑落各自有長, 不相總一. 其人勁悍, 於東夷最强, 言語獨異. 常輕<豆莫婁>等國, 諸國亦患之. 去<洛陽>五千里. 自<和龍>北二百餘里有<善玉山>, 山北行十三日至<祁黎山>, 又北行七日至<洛 水>,/$《魏書》卷一 《勿吉傳》[洛]上有[如]字.$/ 水廣里餘, 又北行十五日至<太岳魯水>, 又東北行十八日到其國. 國有大水, 闊三里餘, 名<速末水>. 其部類凡有七種: 其一號<粟末部>,/$諸本及《隋書》卷八一·《通志》卷一九四《勿吉傳》[粟]都作[栗]. 按上文見<速末水>, [速末]卽[粟末]. <粟末靺鞨>以居於<粟末水>得名, 又見《新唐書》卷二一九《黑水靺鞨傳》. 作[栗]是形似致訛, 今據改.$/ 與<高麗>接, 勝兵數千, 多驍武, 每寇<高麗>; 其二<伯 部>, 在<粟末>北, 勝兵七千; 其三<安車骨部>, 在<伯 >東北; 其四<拂涅部>, 在<伯 >東; 其五<號室部>, 在<拂涅>東; 其六<黑水部>, 在<安車骨>西北; /$諸本脫[骨]字, 據《隋書》及上文補.$/其七<白山部>, 在<粟末>東南. 勝兵 不過三千, 而<黑水部>尤爲勁健./$諸本脫[健]字, 據《隋書》·《通志》補.$/ 自<拂涅>以東, 矢皆石鏃, 卽古<肅愼氏>也. 東夷中爲强國.
'물길국'은 '고구려'의 북쪽에 있다. 일반적으로 '말갈'이라 한다. 읍락의 각각에 장이 있어 서로 하나로 모여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강하고 사나워서 동이중에서 가장 강하였다. 언어는 혼자서 달랐다. 항상 '두막루'등의 나라를 가벼이 여기어 여러 나라들이 역시 근심하였다. '낙양'에서 오천리를 간다. '화룡'북쪽 이백여리에 '선옥산'이 있고, 산에서 북쪽으로 십삼일을 가면 '기려산'에 이른다. 또 북쪽으로 칠일은 가면 '낙괴수'에 이르는데, 물이 넓어 수리에 이른다. 또 북쪽으로 십오일을 가면 '태악노수'에 이르고, 또 동북으로 십팔일을 가면 그나라에 도착을 한다. 나라에는 큰 물이 있으니, 넓이가 삼리나 된다. 명하여 '속말수'라고 한다. 그 부족은 무릇 일곱종이나 있으니, 그 하나를 '속말부'라 하며, '고려'에 접해 있어, 뛰어난 군사가 수천으로 모두 날래고, 굳세어, 매양 '고려'를 도둑질 한다. 그 둘은 '백돌부'라 하니 '속말'의 북쪽에 있고, 병사는 칠천이다. 그 삼은 '안차골부'로 '백돌'의 동북이다. 그 사는 '불열부'로 '백돌'의 동쪽이고, 그 오는 '호실부'로 '불열'의 동쪽이며, 그 육은 '흑수부'로 '안차골'의 서북쪽이다. 그 칠은 '백산부'로 속말의 동남쪽에 있다. 병사는 합쳐 삼천이 넘지 않는데, '흑수부'는 더욱 강하였다. '불열'의 동쪽은 화살에 돌 화살촉을 쓰는데, 즉 옛날 '숙신씨'이다. 동이중의 강국이다.
所居多依山水. 渠帥曰大莫弗瞞 . 國南有<從太山>者, 華言<太皇>,/$《魏書》卷一 《勿吉傳》及《隋書》[從]作[徒]. 又《魏書》[太皇]作[大白]. 按[大白]卽[長白], [皇]字當誤.$/ 俗甚敬畏之, 人不得山上 , 行經山者, 以物盛去. 上有熊 豹狼, 皆不害人, 人亦不敢殺. 地卑濕, 築土如堤, 鑿穴以居, 開口向上, 以梯出入. 其國無牛, 有馬, 車則步推, 相與偶耕. 土多粟·麥· , 菜則有葵. 水氣鹹, 生鹽於木皮之上, 亦有鹽池. 其畜多猪, 無羊. 嚼米爲酒, 飮之亦醉. 婚嫁, 婦人服布裙, 男子衣猪皮 , 頭揷武豹尾. 俗以溺洗手面, 於諸夷最爲不潔. 初婚之夕, 男就女家, 執女乳而罷. 妬, 其妻外淫, 人有告其夫, 夫輒殺妻而後悔, 必殺告者./$諸本[罷妬]倒作[妬罷]. 按《魏書》云:[初昏之夕, 男就女家, 執女乳而罷, 便以爲定, 仍爲夫婦.]《隋書》:[其俗淫而妬, 其妻外淫, 人有告其夫, 夫輒殺妻, 殺而後悔.] 這裏上半採《魏書》, 下半採《隋書》, 而各有刪節. 作[妬罷]顯是誤倒, 今據乙.$/ 由是姦淫事終不發. 人皆善射, 以射獵爲業. 角弓長三尺, 箭長尺二寸, 常以七八月造毒藥, 傅矢以射禽獸, 中者立死. 煮毒藥氣亦能殺人. 其父母春夏死, 立埋之, 上作屋, 令不雨濕; 若秋冬死, 以其尸捕貂, 貂食其肉, 多得之.
산과 물을 의지하여 많이 거하는데, 거수를 '대막불만돌'이라 불렀다. 나라의 남쪽에는 '종태산'이 있는데, 중국말로 '태황'이란 말로 풍속에 몹시도 이를 공경하고 두려워 하여 사람들이 산위에서 오줌이나 오물을 눌수가 없어, 산을 가는 자는 이를 담을 물건을 가지고 간다. 거기에는 곰과 표범과 이리가 있으나, 모두 사람을 해치지 않고, 사람 역시 감히 죽이지 못한다. 땅 밑이 습하여, 흙을 방죽같이 쌓아서 구멍을 뚫은 후 거하는데, 구멍을 위로 내어 사다리를 타고 출입한다. 그나라에는 소가 없고, 말이 있어 수레로 옮기며, 밭을 간다. 땅에서 속과 보리, 기장이 많고, 채소와 해바라기가 있다. 물기가 짜서 나뭇가지에서 소금을 얻는데 역시 소금 연못이 있다. 돼지는 많이 가지고 있으나 양이 없다. 쌀을 씹어서 술을 빗는데, 이를 마시면, 크게 취한다. 결혼한때는 부인이 베로 치마를 해 입고, 남자는 돼지 가죽옷을 입고, 머리에 표범의 꼬리를 단다. 풍속에 물에 빠져서 손과 얼굴을 씻는데, 이(夷)중에서 가장 불결하다. 처음 결혼하는 밤에 남자가 여자집에 가서 여자의 젖을 잠음으로써 끝난다. 투기하거나 그 처가 음난하면 사람들이 이를 지아비에게 알리면, 지아비가 쉽게 아내를 살인하고 후에 후회하여 반드시 죽인 것을 알린다. 음란한 일을 끝내는 것이 옳다 여겨도, 그치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두 활을 잘 쏘아 사냥함을 일로 삼았다. 각궁의 길이는 삼척이요, 화살은 일척 이촌이며, 항시 칠팔월에 독약을 만들어서, 화살에 발라 금수를 사냥하는데, 맞으면 서서 죽는다. 독약이 독하면, 능히 사람을 죽일 수 있다. 부모가 봄과 여름에 죽으면, 세워서 이를 묻는데, 무덤 위에 집을 짓고, 비와 습기로부터 막는다. 만약 가을과 겨울에 죽으면, 그 시체를 담비에게 주어서 담비가 그 고기를 먹게 하고, 이를 얻어 겹친다.
<延興>中, 遣<乙力支>朝獻. <太和>初, 又貢馬五百匹. <乙力支>稱: 初發其國, 乘船溯<難河>西上, 至<太 河>, 沈船於水. 南出陸行, 度<洛孤水>, 從<契丹>西界達<和龍>. 自云其國先破<高句麗>十落, 密共<百濟>謀, 從水道幷力取<高麗>, 遣<乙力支>奉使大國, 謀其可否. 詔 : [三國同是藩附, 宜共和順, 勿相侵擾.] <乙力支>乃還. 從其來道, 取得本船, 汎達其國. 九年, 復遣使<侯尼支>朝. 明年, 復入貢. 其傍有<大莫盧國>·<覆鍾國>·<莫多回國>·<庫婁國>·<素和國>·<具弗伏國>·<匹黎 國>·<拔大何國>·<郁羽陵國>·<庫伏眞國>·<魯婁國>·<羽眞侯國>, 前後各遣使朝獻. <太和>十二年, <勿吉>復遣使貢 矢·方物於京師./$諸本[二]作[三],《魏書》作[二]. 按《魏書》卷七下《高祖紀》<太和>十二年八月有[<勿吉>貢 矢石 ]的記載, 今據改.$/ 十七年,/$諸本脫[十]字, 據《魏書》補.$/ 又遣使人<婆非>等五百餘人朝貢. <景明>四年, 復遣使<侯力歸>朝貢. 自此 于<正光>, 貢使相尋. 爾後中國紛擾, 頗或不至. <興和>二年六月,/$諸本[興和]作[延興],《魏書》作[興和]. <張森楷>云:[{延興}是<孝文>年號, 不得反在<正光>後, 作{興和}是.] 按本書卷五《東魏孝靜帝紀》, <興和>二年, 見<勿吉>[朝貢]的記載, 今據改.$/ 遣<石文云>等貢方物. 以至于<齊>, 朝貢不絶.
'건흥'중에 '을력지'를 보내어 조헌하였다. '태화'초에 또 말 오백필을 받쳤다. '을력지'가 말하길 처음 나라를 출발하여, 배를 타고 '난하'를 서쪽으로 거슬러 올라가 '태니하'에 이르렀습니다. 배가 물속에 가라 앉아, 남쪽으로 나와 육지로 가서, '낙고수'를 건너고, '거란'의 서쪽으로 나아가 '화룡'에 도달했습니다. 스스로 이르기를 그 나라가 먼저 '고구려'의 열 개 부락을 깨뜨리고, 비밀히 '백제'와 공모하여 수로를 따라 힘으로 '고려'를 취할 것입니다. '을력지'를 보내어 대국을 받들어, 공모의 옳고 그름을 물습니다. 조칙을 내려 삼국은 함께 변방에 있으니, 마땅히 함께 화합하여야 하니, 서로 침범하지 말하. '을력지'가 이내 왔던 길로 돌아가는데, 본래 배를 취하여 그 나라에 도착했다. 구년 다시 사신 '후니지'가 와서 조알하였다. 다음해 다시 입공하였다. 그 곁에 '대막로국', '복종국', '막다회국', '고루국', '소화국', '구불복국', '필려이국', '발대하국', '욱우릉국', '고복진국', '노루국', '우진후국'이 있어, 전후하여 각각 사신을 보내어 조헌하였다. '태화' 십이년 '물길'이 다시 사신을 보내어 서울에서 고시와 방물을 받쳤다. 십칠년 또 사신 '파비'등 오백여명으로 조공하였다. '경명'사년 다시 사신 '후력귀'가 조공하였고, 이로부터 '정광'때까지 공물을 받치며 찾아왔다. 이후로 중국이 어지러워지자 잠깐동안 오지 않았다. '흥화'이년 유월 '석문운'등을 보내어 방물을 받치고, '제'에 이르러 조공이 끊이질 않았다.
<隋><開皇>初, 相率遣使貢獻. <文帝>詔其使曰: [朕聞彼土人勇, 今來實副朕懷. 視爾等如子, 爾宜敬朕如父.] 對曰: [臣等僻處一方, 聞內國有聖人, 故來朝拜. 旣親奉聖顔, 願長爲奴僕.] 其國西北與<契丹>接, 每相劫掠. 後因其使來, <文帝>誡之, 使勿相攻擊. 使者謝罪. <文帝>因厚勞之, 令宴飮於前. 使者與其徒皆起舞, 曲折多戰鬪容. 上顧謂侍臣曰: [天地間乃有此物, 常作用兵意.] 然其國與<隋>懸隔, 唯<粟末>·<白山>爲近. <煬帝>初, 與<高麗>戰, 頻敗其衆. 渠帥<突地稽>率其部降, 拜右光祿大夫, 居之<柳城>. 與邊人來往, 悅中國風俗, 請被冠帶, 帝嘉之, 賜以錦綺而 寵之. 及<遼東>之役, <突地稽>率其徒以從, 每有戰功, 賞賜甚厚. 十三年, 從幸<江都>, 尋放還<柳城>. <李密>遣兵邀之, 僅而得免. 至<高陽>, 沒於<王須拔>. 未幾, 遁歸<羅藝>.
'수' '개황'초에 서로 사신을 보내어 공헌 하였다. '문제'가 그 사신에게 고하기를 짐이 당신네 사람들이 용맹함을 들었는데, 이제야 실로 짐이 생각하게 되었다. 당신을 자식으로 여기니, 당신들도 마땅히 짐을 아비로 공경해야 한다. 하니 대답하여 말하길, 신등은 저 한쪽 후미진 곳에 거처하며 내국에 성인이 있음을 들어서 조알하고, 절하러 왔습니다. 이미 친히 성안을 받드오니 노복으로 삼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그 나라의 서북은 '거란'과 접해있고, 매양 위협하며 노락질 합니다. 후에 그 사신이 오니 '문제'가 이를 훈계하며 공격하지 말라 하였다. 사자가 죄를 빌었다. '문제'가 그 노력에 그 앞에서 잔치하였다. 사자들이 그 무리들과 모두 일어나 춤추었으나, 사악함이 전쟁하는 얼굴이었다. 천자가 둘러보며,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천지에 이런 물건들이 있구나, 항시 병사를 일으킬 뜻만 일으키니. 그러하여 그 나라는 '수'와 떨어져 있으나, 오직 '속말'과 '백산'만이 가까웠다. '양제' 초에 '고려'와 전쟁하여 그무리들이 빈번히 무너졌다. 거사 '돌지계'가 그 부를 이끌고 항복하자 우광록대부로 삼고 '유성'에 머물렀다. 변방인들이 왕래하며 중국의 풍속을 기뻐 따르며, 관대를 청하자 제가 이를 기뻐하며, 비단을 하사하고, 이를 칭찬하였다. '요동'의 전투에 있어, '돌지계'가 그 무리를 이끌고 따라, 매양 전투에서 공이 있으니 후하게 상을 내렸다. 십삼년 '강도'까지 나아갔다가 '유성'으로 돌아왔다. '이밀'이 군사를 보내어 구하여 겨우 면함을 얻었다. '고양'에 이르러 '왕수발'이 죽고, 아직 위태로와 '나예'로 달아나 돌아갔다.
奚(해:고막해)
'물길국'은 '고구려'의 북쪽에 있다. 일반적으로 '말갈'이라 한다. 읍락의 각각에 장이 있어 서로 하나로 모여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강하고 사나워서 동이중에서 가장 강하였다. 언어는 혼자서 달랐다. 항상 '두막루'등의 나라를 가벼이 여기어 여러 나라들이 역시 근심하였다. '낙양'에서 오천리를 간다. '화룡'북쪽 이백여리에 '선옥산'이 있고, 산에서 북쪽으로 십삼일을 가면 '기려산'에 이른다. 또 북쪽으로 칠일은 가면 '낙괴수'에 이르는데, 물이 넓어 수리에 이른다. 또 북쪽으로 십오일을 가면 '태악노수'에 이르고, 또 동북으로 십팔일을 가면 그나라에 도착을 한다. 나라에는 큰 물이 있으니, 넓이가 삼리나 된다. 명하여 '속말수'라고 한다. 그 부족은 무릇 일곱종이나 있으니, 그 하나를 '속말부'라 하며, '고려'에 접해 있어, 뛰어난 군사가 수천으로 모두 날래고, 굳세어, 매양 '고려'를 도둑질 한다. 그 둘은 '백돌부'라 하니 '속말'의 북쪽에 있고, 병사는 칠천이다. 그 삼은 '안차골부'로 '백돌'의 동북이다. 그 사는 '불열부'로 '백돌'의 동쪽이고, 그 오는 '호실부'로 '불열'의 동쪽이며, 그 육은 '흑수부'로 '안차골'의 서북쪽이다. 그 칠은 '백산부'로 속말의 동남쪽에 있다. 병사는 합쳐 삼천이 넘지 않는데, '흑수부'는 더욱 강하였다. '불열'의 동쪽은 화살에 돌 화살촉을 쓰는데, 즉 옛날 '숙신씨'이다. 동이중의 강국이다.
所居多依山水. 渠帥曰大莫弗瞞 . 國南有<從太山>者, 華言<太皇>,/$《魏書》卷一 《勿吉傳》及《隋書》[從]作[徒]. 又《魏書》[太皇]作[大白]. 按[大白]卽[長白], [皇]字當誤.$/ 俗甚敬畏之, 人不得山上 , 行經山者, 以物盛去. 上有熊 豹狼, 皆不害人, 人亦不敢殺. 地卑濕, 築土如堤, 鑿穴以居, 開口向上, 以梯出入. 其國無牛, 有馬, 車則步推, 相與偶耕. 土多粟·麥· , 菜則有葵. 水氣鹹, 生鹽於木皮之上, 亦有鹽池. 其畜多猪, 無羊. 嚼米爲酒, 飮之亦醉. 婚嫁, 婦人服布裙, 男子衣猪皮 , 頭揷武豹尾. 俗以溺洗手面, 於諸夷最爲不潔. 初婚之夕, 男就女家, 執女乳而罷. 妬, 其妻外淫, 人有告其夫, 夫輒殺妻而後悔, 必殺告者./$諸本[罷妬]倒作[妬罷]. 按《魏書》云:[初昏之夕, 男就女家, 執女乳而罷, 便以爲定, 仍爲夫婦.]《隋書》:[其俗淫而妬, 其妻外淫, 人有告其夫, 夫輒殺妻, 殺而後悔.] 這裏上半採《魏書》, 下半採《隋書》, 而各有刪節. 作[妬罷]顯是誤倒, 今據乙.$/ 由是姦淫事終不發. 人皆善射, 以射獵爲業. 角弓長三尺, 箭長尺二寸, 常以七八月造毒藥, 傅矢以射禽獸, 中者立死. 煮毒藥氣亦能殺人. 其父母春夏死, 立埋之, 上作屋, 令不雨濕; 若秋冬死, 以其尸捕貂, 貂食其肉, 多得之.
산과 물을 의지하여 많이 거하는데, 거수를 '대막불만돌'이라 불렀다. 나라의 남쪽에는 '종태산'이 있는데, 중국말로 '태황'이란 말로 풍속에 몹시도 이를 공경하고 두려워 하여 사람들이 산위에서 오줌이나 오물을 눌수가 없어, 산을 가는 자는 이를 담을 물건을 가지고 간다. 거기에는 곰과 표범과 이리가 있으나, 모두 사람을 해치지 않고, 사람 역시 감히 죽이지 못한다. 땅 밑이 습하여, 흙을 방죽같이 쌓아서 구멍을 뚫은 후 거하는데, 구멍을 위로 내어 사다리를 타고 출입한다. 그나라에는 소가 없고, 말이 있어 수레로 옮기며, 밭을 간다. 땅에서 속과 보리, 기장이 많고, 채소와 해바라기가 있다. 물기가 짜서 나뭇가지에서 소금을 얻는데 역시 소금 연못이 있다. 돼지는 많이 가지고 있으나 양이 없다. 쌀을 씹어서 술을 빗는데, 이를 마시면, 크게 취한다. 결혼한때는 부인이 베로 치마를 해 입고, 남자는 돼지 가죽옷을 입고, 머리에 표범의 꼬리를 단다. 풍속에 물에 빠져서 손과 얼굴을 씻는데, 이(夷)중에서 가장 불결하다. 처음 결혼하는 밤에 남자가 여자집에 가서 여자의 젖을 잠음으로써 끝난다. 투기하거나 그 처가 음난하면 사람들이 이를 지아비에게 알리면, 지아비가 쉽게 아내를 살인하고 후에 후회하여 반드시 죽인 것을 알린다. 음란한 일을 끝내는 것이 옳다 여겨도, 그치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두 활을 잘 쏘아 사냥함을 일로 삼았다. 각궁의 길이는 삼척이요, 화살은 일척 이촌이며, 항시 칠팔월에 독약을 만들어서, 화살에 발라 금수를 사냥하는데, 맞으면 서서 죽는다. 독약이 독하면, 능히 사람을 죽일 수 있다. 부모가 봄과 여름에 죽으면, 세워서 이를 묻는데, 무덤 위에 집을 짓고, 비와 습기로부터 막는다. 만약 가을과 겨울에 죽으면, 그 시체를 담비에게 주어서 담비가 그 고기를 먹게 하고, 이를 얻어 겹친다.
<延興>中, 遣<乙力支>朝獻. <太和>初, 又貢馬五百匹. <乙力支>稱: 初發其國, 乘船溯<難河>西上, 至<太 河>, 沈船於水. 南出陸行, 度<洛孤水>, 從<契丹>西界達<和龍>. 自云其國先破<高句麗>十落, 密共<百濟>謀, 從水道幷力取<高麗>, 遣<乙力支>奉使大國, 謀其可否. 詔 : [三國同是藩附, 宜共和順, 勿相侵擾.] <乙力支>乃還. 從其來道, 取得本船, 汎達其國. 九年, 復遣使<侯尼支>朝. 明年, 復入貢. 其傍有<大莫盧國>·<覆鍾國>·<莫多回國>·<庫婁國>·<素和國>·<具弗伏國>·<匹黎 國>·<拔大何國>·<郁羽陵國>·<庫伏眞國>·<魯婁國>·<羽眞侯國>, 前後各遣使朝獻. <太和>十二年, <勿吉>復遣使貢 矢·方物於京師./$諸本[二]作[三],《魏書》作[二]. 按《魏書》卷七下《高祖紀》<太和>十二年八月有[<勿吉>貢 矢石 ]的記載, 今據改.$/ 十七年,/$諸本脫[十]字, 據《魏書》補.$/ 又遣使人<婆非>等五百餘人朝貢. <景明>四年, 復遣使<侯力歸>朝貢. 自此 于<正光>, 貢使相尋. 爾後中國紛擾, 頗或不至. <興和>二年六月,/$諸本[興和]作[延興],《魏書》作[興和]. <張森楷>云:[{延興}是<孝文>年號, 不得反在<正光>後, 作{興和}是.] 按本書卷五《東魏孝靜帝紀》, <興和>二年, 見<勿吉>[朝貢]的記載, 今據改.$/ 遣<石文云>等貢方物. 以至于<齊>, 朝貢不絶.
'건흥'중에 '을력지'를 보내어 조헌하였다. '태화'초에 또 말 오백필을 받쳤다. '을력지'가 말하길 처음 나라를 출발하여, 배를 타고 '난하'를 서쪽으로 거슬러 올라가 '태니하'에 이르렀습니다. 배가 물속에 가라 앉아, 남쪽으로 나와 육지로 가서, '낙고수'를 건너고, '거란'의 서쪽으로 나아가 '화룡'에 도달했습니다. 스스로 이르기를 그 나라가 먼저 '고구려'의 열 개 부락을 깨뜨리고, 비밀히 '백제'와 공모하여 수로를 따라 힘으로 '고려'를 취할 것입니다. '을력지'를 보내어 대국을 받들어, 공모의 옳고 그름을 물습니다. 조칙을 내려 삼국은 함께 변방에 있으니, 마땅히 함께 화합하여야 하니, 서로 침범하지 말하. '을력지'가 이내 왔던 길로 돌아가는데, 본래 배를 취하여 그 나라에 도착했다. 구년 다시 사신 '후니지'가 와서 조알하였다. 다음해 다시 입공하였다. 그 곁에 '대막로국', '복종국', '막다회국', '고루국', '소화국', '구불복국', '필려이국', '발대하국', '욱우릉국', '고복진국', '노루국', '우진후국'이 있어, 전후하여 각각 사신을 보내어 조헌하였다. '태화' 십이년 '물길'이 다시 사신을 보내어 서울에서 고시와 방물을 받쳤다. 십칠년 또 사신 '파비'등 오백여명으로 조공하였다. '경명'사년 다시 사신 '후력귀'가 조공하였고, 이로부터 '정광'때까지 공물을 받치며 찾아왔다. 이후로 중국이 어지러워지자 잠깐동안 오지 않았다. '흥화'이년 유월 '석문운'등을 보내어 방물을 받치고, '제'에 이르러 조공이 끊이질 않았다.
<隋><開皇>初, 相率遣使貢獻. <文帝>詔其使曰: [朕聞彼土人勇, 今來實副朕懷. 視爾等如子, 爾宜敬朕如父.] 對曰: [臣等僻處一方, 聞內國有聖人, 故來朝拜. 旣親奉聖顔, 願長爲奴僕.] 其國西北與<契丹>接, 每相劫掠. 後因其使來, <文帝>誡之, 使勿相攻擊. 使者謝罪. <文帝>因厚勞之, 令宴飮於前. 使者與其徒皆起舞, 曲折多戰鬪容. 上顧謂侍臣曰: [天地間乃有此物, 常作用兵意.] 然其國與<隋>懸隔, 唯<粟末>·<白山>爲近. <煬帝>初, 與<高麗>戰, 頻敗其衆. 渠帥<突地稽>率其部降, 拜右光祿大夫, 居之<柳城>. 與邊人來往, 悅中國風俗, 請被冠帶, 帝嘉之, 賜以錦綺而 寵之. 及<遼東>之役, <突地稽>率其徒以從, 每有戰功, 賞賜甚厚. 十三年, 從幸<江都>, 尋放還<柳城>. <李密>遣兵邀之, 僅而得免. 至<高陽>, 沒於<王須拔>. 未幾, 遁歸<羅藝>.
'수' '개황'초에 서로 사신을 보내어 공헌 하였다. '문제'가 그 사신에게 고하기를 짐이 당신네 사람들이 용맹함을 들었는데, 이제야 실로 짐이 생각하게 되었다. 당신을 자식으로 여기니, 당신들도 마땅히 짐을 아비로 공경해야 한다. 하니 대답하여 말하길, 신등은 저 한쪽 후미진 곳에 거처하며 내국에 성인이 있음을 들어서 조알하고, 절하러 왔습니다. 이미 친히 성안을 받드오니 노복으로 삼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그 나라의 서북은 '거란'과 접해있고, 매양 위협하며 노락질 합니다. 후에 그 사신이 오니 '문제'가 이를 훈계하며 공격하지 말라 하였다. 사자가 죄를 빌었다. '문제'가 그 노력에 그 앞에서 잔치하였다. 사자들이 그 무리들과 모두 일어나 춤추었으나, 사악함이 전쟁하는 얼굴이었다. 천자가 둘러보며,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천지에 이런 물건들이 있구나, 항시 병사를 일으킬 뜻만 일으키니. 그러하여 그 나라는 '수'와 떨어져 있으나, 오직 '속말'과 '백산'만이 가까웠다. '양제' 초에 '고려'와 전쟁하여 그무리들이 빈번히 무너졌다. 거사 '돌지계'가 그 부를 이끌고 항복하자 우광록대부로 삼고 '유성'에 머물렀다. 변방인들이 왕래하며 중국의 풍속을 기뻐 따르며, 관대를 청하자 제가 이를 기뻐하며, 비단을 하사하고, 이를 칭찬하였다. '요동'의 전투에 있어, '돌지계'가 그 무리를 이끌고 따라, 매양 전투에서 공이 있으니 후하게 상을 내렸다. 십삼년 '강도'까지 나아갔다가 '유성'으로 돌아왔다. '이밀'이 군사를 보내어 구하여 겨우 면함을 얻었다. '고양'에 이르러 '왕수발'이 죽고, 아직 위태로와 '나예'로 달아나 돌아갔다.
奚(해:고막해)
<奚>本曰<庫莫奚>, 其先東部<胡><宇文>之別種也. 初爲<慕容晃>所破, 遺落者竄匿<松><漠>之間. 俗甚不潔 , 而善射獵, 好爲寇抄. <登國>三年, <道武>親自出討, 至<弱水>南大破之,/$《魏書》卷一 《庫莫奚傳》作[弱洛水], 卷二《太祖紀》<登國>三年作[弱落水]. 此疑脫[洛]字.$/ 獲其馬·牛·羊·豕十餘萬. 帝曰: [此 狄諸種, 不識德義, 鼠竊狗盜, 何足爲患? 今中州大亂, 吾先平之, 然後張其威懷, 則無所不服矣.] 旣而車駕南遷, 十數年間, 諸種與<庫莫奚>亦皆滋盛. 及開<遼海>, 置戍<和龍>, 諸夷震懼, 各獻方物. <文成>·<獻文>之世, <庫莫奚>歲致名馬·文皮. <孝文>初, 遣使朝貢. <太和>四年, 入塞內, 辭以畏<地豆干>抄掠, 詔書切責之. 二十二年, 入寇<安州>./$諸本作[二十年],《魏書》作[二十二年]. 按下文<宣武>詔云:[至二十二年叛逆以來.] 卽指此事,《魏書》是, 今據補.$/ 時<營>·<燕>·<幽>三州兵數千人擊走之. 後復款附, 每求入塞交易. <宣武>詔曰: [<庫莫奚>去<太和>二十一年以前, 與<安>·<營>二州邊人參居, 交易往來, 無欺貳. 至二十二年叛逆以來, 遂爾遠竄. 今雖款附, 猶在塞表, 每請入塞, 與百姓交易. 若抑而不許, 乖其歸向之心; 信而不慮, 或有萬一之驚. 交市之日, 州遣士監之.]/$《魏書》[士]作[上佐]. <張森楷>云:[此誤{上}爲{士}, 又脫{佐}字.]$/ 自此已後, 歲常朝獻, 至<武定>已來不絶. 齊受魏禪, 歲時來朝.
'해'는 본래 '고막해'라 부르는데, 그는 동부 '호''우문'의 별종이다. 처음 '모용황'에게 깨지고 그 떨어진 자들이 '송''막'사이에 숨어살았다. 풍속에 심히 깨끗하지 못하고, 사냥에 능숙하고, 도둑질하고 노략질 함을 좋아하였다. '등국' 삼년 '도무'가 친히 나와 토벌하여 '약수'의 남쪽에 이르러 크게 이들을 깨었다. 그 말과 소 양 돼지 십여만을 얻었다. 제가 말하길 이 오랑캐 무리의 여러 종족들은 덕과 의를 알지 못하여 쥐나 개처럼 도둑질 하니, 어찌 근심이 아니겠는가? 이제 중국이 크게 어지러우니, 내가 먼저 이를 평정하고, 그런 연후에 그 위엄을 베풀어, 복종하지 않음이 없게 한다. 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남쪽으로 천도하여 십수년간 여러 종족들이 '고막해'족이 되어 역시 번성하였다. 이에 '요해'를 열고, '화룡'을 지키자 여러 이들이 모두 두려워 하며, 각각 방물을 받쳤다. '문성'과 '헌문'때에 '고막해'가 해마다 명마와 문피를 받쳤다. '효문'초에 사신을 보내고 고공하고, '태화'사년 변방에 들어와 '지두우'가 노략질함이 두렵다고 하소연 하자 조서를 내려 이를 책하였다. 이십이년 '안주'에 들어와 노략질하니 '영''연''유'의 삼주에서 병사 수천명으로 공격하니 달아났다. 후에 다시 정성으로 따르며, 매양 변방에서 교역함을 구하였다. '선무'가 조서를 내려 말하길 '고막해'는 '태화'이십일년 전부터 '안''영'두주의 변방인들과 섞여 살아 교역하며 왕래하니 두마음을 품지 말라. 이십이년에 이르러 반역하여 너가 멀리 달아났다. 이제 다시 정성으로 따르고 변방의 겉에 머무르며 변방에 들어오길 매양 청하니 백성고 교역하도록 하라. 만약 물리치어, 허락하지 않으면, 떨어져 나가 다시 옛날로 돌아갈 것이다. 믿고 두려워 하지 말것이며, 혹 만에 하나라도, 놀라지 말아라. 교역하는 날에는 주에서 감사를 파견할 것이다. 이 후로는 해마다 조헌을 하고, '무정'때에 이르기까지 끊이질 않았다. '제'가 '위'에게 선양받던 해에 조알하러 왔다.
其後種類漸多, 分爲五部: 一曰<辱紇主>, 二曰<莫賀弗>, 三曰<契箇>, 四曰<木昆>, 五曰<室得>. 每部俟斤一人爲其帥./$諸本誤作[每部一千人爲其帥], 據《隋書》卷八四《奚傳》改.$/ 隨逐水草, 頗同<突厥>. 有<阿會氏>, 五部中最盛, 諸部皆歸之. 每與<契丹>相攻擊, 虜獲財畜, 因遣使貢方物.
그 후 이 종족이 점차로 많아지더니, 나누어 오부가 되었다. 하나 '욕흘주', 둘은 '막하불', 셋은 '계개', 넷은 '목곤', 다섯은 '실득'이다. 부에서는 큰 한 사람을 장수로 삼았다. 물과 풀을 따라 돌아다니다, 돌궐과 함께 하게 되었다. '아회씨'가 있는데, 오부중에 가장 강하여 모든 부들이 이에게 왔다. 늘 '거란'과 서로 공격하여 포로를 잡고, 재물을 쌓아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받쳤다.
'해'는 본래 '고막해'라 부르는데, 그는 동부 '호''우문'의 별종이다. 처음 '모용황'에게 깨지고 그 떨어진 자들이 '송''막'사이에 숨어살았다. 풍속에 심히 깨끗하지 못하고, 사냥에 능숙하고, 도둑질하고 노략질 함을 좋아하였다. '등국' 삼년 '도무'가 친히 나와 토벌하여 '약수'의 남쪽에 이르러 크게 이들을 깨었다. 그 말과 소 양 돼지 십여만을 얻었다. 제가 말하길 이 오랑캐 무리의 여러 종족들은 덕과 의를 알지 못하여 쥐나 개처럼 도둑질 하니, 어찌 근심이 아니겠는가? 이제 중국이 크게 어지러우니, 내가 먼저 이를 평정하고, 그런 연후에 그 위엄을 베풀어, 복종하지 않음이 없게 한다. 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남쪽으로 천도하여 십수년간 여러 종족들이 '고막해'족이 되어 역시 번성하였다. 이에 '요해'를 열고, '화룡'을 지키자 여러 이들이 모두 두려워 하며, 각각 방물을 받쳤다. '문성'과 '헌문'때에 '고막해'가 해마다 명마와 문피를 받쳤다. '효문'초에 사신을 보내고 고공하고, '태화'사년 변방에 들어와 '지두우'가 노략질함이 두렵다고 하소연 하자 조서를 내려 이를 책하였다. 이십이년 '안주'에 들어와 노략질하니 '영''연''유'의 삼주에서 병사 수천명으로 공격하니 달아났다. 후에 다시 정성으로 따르며, 매양 변방에서 교역함을 구하였다. '선무'가 조서를 내려 말하길 '고막해'는 '태화'이십일년 전부터 '안''영'두주의 변방인들과 섞여 살아 교역하며 왕래하니 두마음을 품지 말라. 이십이년에 이르러 반역하여 너가 멀리 달아났다. 이제 다시 정성으로 따르고 변방의 겉에 머무르며 변방에 들어오길 매양 청하니 백성고 교역하도록 하라. 만약 물리치어, 허락하지 않으면, 떨어져 나가 다시 옛날로 돌아갈 것이다. 믿고 두려워 하지 말것이며, 혹 만에 하나라도, 놀라지 말아라. 교역하는 날에는 주에서 감사를 파견할 것이다. 이 후로는 해마다 조헌을 하고, '무정'때에 이르기까지 끊이질 않았다. '제'가 '위'에게 선양받던 해에 조알하러 왔다.
其後種類漸多, 分爲五部: 一曰<辱紇主>, 二曰<莫賀弗>, 三曰<契箇>, 四曰<木昆>, 五曰<室得>. 每部俟斤一人爲其帥./$諸本誤作[每部一千人爲其帥], 據《隋書》卷八四《奚傳》改.$/ 隨逐水草, 頗同<突厥>. 有<阿會氏>, 五部中最盛, 諸部皆歸之. 每與<契丹>相攻擊, 虜獲財畜, 因遣使貢方物.
그 후 이 종족이 점차로 많아지더니, 나누어 오부가 되었다. 하나 '욕흘주', 둘은 '막하불', 셋은 '계개', 넷은 '목곤', 다섯은 '실득'이다. 부에서는 큰 한 사람을 장수로 삼았다. 물과 풀을 따라 돌아다니다, 돌궐과 함께 하게 되었다. '아회씨'가 있는데, 오부중에 가장 강하여 모든 부들이 이에게 왔다. 늘 '거란'과 서로 공격하여 포로를 잡고, 재물을 쌓아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받쳤다.
契丹國(거란국)
<契丹國>在<庫莫奚>東, 與<庫莫奚>異種同類. 爲<慕容晃>所破, 俱竄於<松><漠>之間. <登國>中, <魏>大破之, 遂逃 , 與<庫莫奚>分住. 經數十年, 稍滋蔓, 有部落, 於<和龍>之北數百里爲寇盜. <眞君>以來, 歲貢名馬. <獻文>時, 使莫弗<紇何辰>來獻, 得班饗於諸國之末. 歸而相謂, 言國家之美, 心皆 慕, 於是東北 狄聞之, 莫不思服. <悉萬丹部>·<何大何部>·<伏弗郁部>·<羽陵部>·/$按《勿吉傳》有具<弗伏國>·<郁羽陵國>.《魏書》卷六《顯祖紀》<皇興>元年及二年兩見<具伏弗>·<郁羽陵>. [具伏弗]自卽[具弗伏]. 這裏疑脫[具]字, [郁部]二字誤倒. 但《通典》卷二○○契丹條也作[<伏弗郁部>·<羽陵部>].$/<日連部>·<匹潔部>·<黎部>·/$《通典》無[潔部]二字. 按[匹黎部], 疑卽《勿吉傳》之[匹黎 國].$/<吐六干部>等各以其名馬文皮獻天府. 遂求爲常, 皆得交市於<和龍>·<密雲>之間, 貢獻不絶. <太和>三年, <高句麗>竊與< >謀, 欲取<地豆干>以分之. <契丹>舊怨其侵 , 其莫賀弗<勿干>率其部落, 車三千乘·衆萬餘口, 驅徙雜畜求內附, 止於<白狼水>東. 自此歲常朝貢. 後告饑, <孝文>聽其入關市 . 及<宣武>·<孝明>時, 恒遣使貢方物. <熙平>中, <契丹>使人<初眞>等三十人還, <靈太后>以其俗嫁娶之際以靑爲上服, 人給靑兩匹, 賞其誠款之心, 餘依舊式朝貢. 及<齊>受<東魏>禪, 常不斷絶.
'거란국'은 '고막해'의 동쪽에 있다. '고막해'와는 종족은 다르나 같은 무리이다. 함께 '모용황'에게 깨져, '송', '막'의 사이에 숨어살았다. '등국' 중에 '위'가 크게 깨지자, 흩어져 달아사 '고막해'와 나누어 지게 되었다. 수십년 동안 점점 자라더니, 부락을 이루어, '화룡'의 북쪽 수백리를 약탈하였다. '진군'에게 와서 해마다 명마를 조공하였다. '헌문'때에 사신 '막불흘하진'이 왔는데, 끝에 여러나라에서 잔치상을 받고, 돌아서 서로 일컷기를 나라의 아름다움을 말하자, 마음을 모두 열고 기뻐하였다. 동북의 오랑캐무리가 이를 들으니 복봉할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실만단부', '하대하부', '복불욱부', '우릉부', '일련부', '필결부', '여부', '토육간부'등이 각각 명마와 문피를 천부에 받쳤다. 항상 구함을 청하자, '화룡'과 '밀운'의 사이에서 교시함을 얻어, 공물이 끊이질 않았다. '태화' 삼년 '고구려'와 '유유'가 몰레 일을 꾸며, '지두우'를 나누어 취하고자 하였다. '거란'이 옛날에 침범했던 것을 원망하여 '막하불물간'이 그 부락의 수레 삼천과 무리 만여구로 말을 몰고와 내지를 따르기를 구하여 '백랑수' 동쪽에서 그치었다. 이 해부터 항시 조공하였다. 후에 흉년이 듬을 알리자, '효문'이 듣고, 관에 들어와 쌀을 살수 있게 하였다. '선무'에서 '효명'때에 항시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받쳤다. '희평'중에 '거란'의 사신인 '초진'등 삼십명이 돌아오니, '영태후'가 그 풍속에 결혼할 때 청색으로 옷을 한다고 하니, 사람들에게 청색 두필씩을 공급하고, 그 정성스런 마음을 칭찬하니, 끝까지 옛날 식대로 조공하였다. '제'가 '동위'에게 선양받을때까지 끊이질 않았다.
<天保>四年九月, <契丹>犯塞, <文宣帝>親戎北討,/$諸本脫[宣]字, 據《通志》卷二 《契丹傳》補. 事見《北齊書》卷四《文宣紀》<天保>四年九月.$/ 至<平州>, 遂西趣長塹. 詔司徒<潘相樂>帥精騎五千, 自東道趣<靑山>, 復詔<安德王><韓軌>帥精騎四千東趣, 斷<契丹>走路. 帝親踰山嶺, 奮擊大破之, 虜十餘萬口·雜畜數十萬頭. <相樂>又於<靑山>大破<契丹>別部. 所虜生口, 皆分置諸州. 其後復爲<突厥>所逼, 又以萬家寄於<高麗>.
'천보'사년 구월 '거란'이 변방을 범하자, '문선제'가 친히 오랑캐를 북쪽으로 토벌하였다. '평주'에 이르러 서쪽으로 '장참'으로 향했다. 사도 '반상락'에게 장수와 기병 오천을 줘서 동쪽길로 '청산'에 이르게 하고, 다시 '안덕왕''한궤'에게는 기병 사천으로 동쪽으로 나아가, '거란'의 도망가는 길을 끊도록 하였다. 제가 친히 산과령을 넘어 이를 크게 깨뜨리니, 포로가 십여만구이고, 가축이 수십만두였다. '상락'이 또한 '청산'에서 '거란'의 다른 부를 크게 깨뜨렸다. 포로를 생포한 곳에 모두 나누어 여러 주를 두었다. 그 후에 다시 '돌궐'이 핍박하였고, 또 만가가 '고려'에 붙었다.
'거란국'은 '고막해'의 동쪽에 있다. '고막해'와는 종족은 다르나 같은 무리이다. 함께 '모용황'에게 깨져, '송', '막'의 사이에 숨어살았다. '등국' 중에 '위'가 크게 깨지자, 흩어져 달아사 '고막해'와 나누어 지게 되었다. 수십년 동안 점점 자라더니, 부락을 이루어, '화룡'의 북쪽 수백리를 약탈하였다. '진군'에게 와서 해마다 명마를 조공하였다. '헌문'때에 사신 '막불흘하진'이 왔는데, 끝에 여러나라에서 잔치상을 받고, 돌아서 서로 일컷기를 나라의 아름다움을 말하자, 마음을 모두 열고 기뻐하였다. 동북의 오랑캐무리가 이를 들으니 복봉할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실만단부', '하대하부', '복불욱부', '우릉부', '일련부', '필결부', '여부', '토육간부'등이 각각 명마와 문피를 천부에 받쳤다. 항상 구함을 청하자, '화룡'과 '밀운'의 사이에서 교시함을 얻어, 공물이 끊이질 않았다. '태화' 삼년 '고구려'와 '유유'가 몰레 일을 꾸며, '지두우'를 나누어 취하고자 하였다. '거란'이 옛날에 침범했던 것을 원망하여 '막하불물간'이 그 부락의 수레 삼천과 무리 만여구로 말을 몰고와 내지를 따르기를 구하여 '백랑수' 동쪽에서 그치었다. 이 해부터 항시 조공하였다. 후에 흉년이 듬을 알리자, '효문'이 듣고, 관에 들어와 쌀을 살수 있게 하였다. '선무'에서 '효명'때에 항시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받쳤다. '희평'중에 '거란'의 사신인 '초진'등 삼십명이 돌아오니, '영태후'가 그 풍속에 결혼할 때 청색으로 옷을 한다고 하니, 사람들에게 청색 두필씩을 공급하고, 그 정성스런 마음을 칭찬하니, 끝까지 옛날 식대로 조공하였다. '제'가 '동위'에게 선양받을때까지 끊이질 않았다.
<天保>四年九月, <契丹>犯塞, <文宣帝>親戎北討,/$諸本脫[宣]字, 據《通志》卷二 《契丹傳》補. 事見《北齊書》卷四《文宣紀》<天保>四年九月.$/ 至<平州>, 遂西趣長塹. 詔司徒<潘相樂>帥精騎五千, 自東道趣<靑山>, 復詔<安德王><韓軌>帥精騎四千東趣, 斷<契丹>走路. 帝親踰山嶺, 奮擊大破之, 虜十餘萬口·雜畜數十萬頭. <相樂>又於<靑山>大破<契丹>別部. 所虜生口, 皆分置諸州. 其後復爲<突厥>所逼, 又以萬家寄於<高麗>.
'천보'사년 구월 '거란'이 변방을 범하자, '문선제'가 친히 오랑캐를 북쪽으로 토벌하였다. '평주'에 이르러 서쪽으로 '장참'으로 향했다. 사도 '반상락'에게 장수와 기병 오천을 줘서 동쪽길로 '청산'에 이르게 하고, 다시 '안덕왕''한궤'에게는 기병 사천으로 동쪽으로 나아가, '거란'의 도망가는 길을 끊도록 하였다. 제가 친히 산과령을 넘어 이를 크게 깨뜨리니, 포로가 십여만구이고, 가축이 수십만두였다. '상락'이 또한 '청산'에서 '거란'의 다른 부를 크게 깨뜨렸다. 포로를 생포한 곳에 모두 나누어 여러 주를 두었다. 그 후에 다시 '돌궐'이 핍박하였고, 또 만가가 '고려'에 붙었다.
其俗與<靺鞨>同, 好爲寇盜. 父母死而悲哭者, 以爲不壯. 但以其屍置於山樹之上, 經三年後, 乃收其骨而焚之. 因酌酒而祝曰: [冬月時, 向陽食,/$《隋書》卷八四《契丹傳》同.《通志》下多[夏月時, 向陰食]六字.$/ 若我射獵時, 使我多得猪·鹿.] 其無禮頑 , 於諸夷最甚.
기 풍속은 '말갈'과 같고, 도둑질 하기를 좋아한다. 부모가 죽어서, 슬피 우는 자는 씩씩하지 못하다고 여기었다. 단지 그 시신을 산의 나무위에 두고 삼년이 지나면 이내 그 뼈를 거두어 이를 불태운다. 그리하여 술을 따르며, 기원하며 말하길, 겨울달에는 따뜻하고, 음식이 있는 곳으로 향해옵소소, 만약 내가 사냥을 할 때는 돼지와 사슴을 많이 얻도록 해 주십시오. 하였다. 예가 없고, 어리석고, 둔하지만 여러 이(夷) 중에서 최고로 성하였다.
<隋><開皇>四年, 率莫賀弗來謁. 五年, 悉其衆款塞, <文帝>納之, 聽居其故地. 責讓之,/$《隋書》[地]下有[六年, 其諸部相攻擊, 久不止. 又與<突厥>相侵, <高祖>使使] 二十一字.《北史》有脫文.$/ 其國遣使詣闕, 頓 謝罪. 其後, <契丹>別部<出伏>等背<高麗>, 率衆內附. <文帝>見來, 憐之./$《隋書》[內附]下有[<高祖>納之, 安置於<渴奚那 >之北. <開皇>末, 其別部四千餘家背<突厥>來降] 二十八字. 無[<文帝>見來憐之]語.《北史》當有脫文.$/ 上方與<突厥>和好, 重失遠人之心, 悉令給糧還本部, <突厥>撫納之. 固辭不去. 部落漸衆, 遂北徙, 逐水草, 當<遼西>正北二百里, 依<託紇臣水>而居, 東西亘[五百里, 南北三]百里,/$諸本脫[五百里南北三]六字, 據《隋書》補.$/ 分爲十部. 兵多者三千, 少者千餘. 逐寒暑, 隨水草畜牧. 有征伐, 則酋帥相與議之, 興兵動衆, 合如符契./$《隋書》無[如]字, 是.$/ <突厥><沙鉢 可汗>遣吐屯<潘 >統之, <契丹>殺吐屯而遁. <大業>七年, 遣使朝, 貢方物.
'수''개황' 사년 '막하불'이 무리를 거느리고, 아뢰려고 왔다. 오년 그 무리가 변방에 나타나자, '문제'가 이를 거두고 그 옛땅에 거하도록 하였다. 이를 꾸짓자(?) 그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대궐에 이르러 머릴 조아리며 사죄하였다. 그 후에 '거란'의 다른 부인 '출복'등이 '고려'를 배신하고 무리를 이끌고 내지에 의지하였다. '문제'가 와서 보고, 이를 불쌍히 여기어 '돌궐'과 사이좋게 지내라고 하니,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먼곳의 사람의 마음이라, 양식을 넉넉히 대주고, 모두 본래 부로 돌아오니 칙서를 내려 '돌궐'에게 거두도록 하였다. 오로지 떠나지 않겠다 말하였다. 부락의 무리가 점점 나아가더니 북쪽으로 넓혀가고, 물과 풀을 딸라 떠돌다가 '요서' 북쪽 이백리에 이르러 '모흘신수'에 의거하여 거하니, 동서가 오백리 남북이 삼백리에 뻗쳐 나뉘니, 십부가 되었다. 병사들이 많으면 삼천이요, 적으면 천이 조금 넘는다. 추위와 더위를 쫓고 물과 풀을 따라 방목한다. 정벌할 것이 있으면, 곧 추장과 장수가 서로 의논하여 병사를 움직이니 계약하는 것과 같다. '돌궐'의 '사발략가한'이 토둔 '반질'을 보내어 이를 통합하려 하자, '거란'이 토둔을 죽이고 달아났다. '대업'칠년 사신을 보내어 조알하며 방물을 받쳤다.
室韋國(실위국)
<室韋國>在<勿吉>北千里, 去<洛陽>六千里. [室]或爲[失], 蓋<契丹>之類, 其南者爲<契丹>, 在北者號爲<失韋>. 路出<和龍>北千餘里, 入<契丹國>, 又北行十日至< 水>, 又北行三日有<善水>, 又北行三日有<犢了山>, 其山高大, 周回三百里. 又北行三百餘里,/$《魏書》卷一 《失韋傳》[百餘里]作[日]一字. 按前後皆以日計里程, 這裏不應獨異. 疑涉上文而誤.$/ 有大水名<屈利>, 又北行三日至<刃水>, 又北行五日到其國. 有大水從北而來, 廣四里餘, 名< 水>. 國土下濕, 語與<庫莫奚>·<契丹>·<豆莫婁國>同./$諸本脫[莫]字, 據《魏書》及下文《豆莫婁國傳》補.$/ 頗有粟·麥及 . 夏則城居, 冬逐水草, 多略貂皮. 丈夫索髮. 用角弓, 其箭尤長. 女婦束髮作叉手 . 其國少竊盜, 盜一徵三; 殺人者責馬三百匹,/$諸本脫[馬]字, 據《魏書》補.$/ 男女悉衣白鹿皮 袴. 有 , 釀酒. 俗愛赤珠, 爲婦人飾, 穿 於頸, 以多爲貴. 女不得此, 乃至不嫁. 父母死, 男女衆哭三年, 尸則置於林樹之上.
'실위국'은 '물길'의 북쪽 천리에 있다. '낙양'에서 육천리를 간다. '실'은 혹 '시'라고도 하는데, 대개 '거란'의 종류로, 남쪽에 있는 자를 '거란'이라 하고, 북쪽에 있는 자를 '시위'라 부른다. 길로 '화룡'에서 북으로 천여리를 가면 '거란국'에 들어가고, 또 북으로 십일을 가면 '철수'에 이르고, 또 북으로 삼일을 가면 '선수'가 있고, 북으로 삼일을 가면 '독료산'이 있는데, 그 산은 높고 크서 주위가 삼백리이다. 또 북으로 삼백여리를 가면 '굴리'라는 큰 물이 있고, 북으로 삼일을 가면, '도수'에 이르며, 북으로 오링을 가면 그나라에 이른다. 큰 물이 있어 북쪽에서 내려 오는데, 넓이가 사리나 되고, 이름이 '내수'이다. 나라의 토양은 아래가 습하고, 말은 '고막해'와 '거란', '두막루국'과 같다. 조와 보리 기장이 있다. 여름에는 성에 거쳐하지만 겨울에는 물과 풀을 따라 다니고, 담비가죽이 많다. 어른들은 머리를 따고, 각궁을 사용하며, 화살은 길이가 길다. 여자나 부인은 머리를 묶어 상투트는 것처럼 깍지끼어 올린다. 나라에 도적이 적으며, 하나를 훔치면 세배로 값는다. 살인한 자는 말 삼백필로 값고, 남녀가 모두 흰 사슴가죽으로 바지와 저고리를 해 입는다. 누룩이 있어, 술을 빗는다. 풍속에 붉은 구슬을 좋아하여 부인들이 이를 꾸미는데 구멍을 뚫어 목에 거는데, 막을수록 귀한 것이다. 여자는 이를 얻을 수 없는데, 시집가지 않음을 이른 것이다. 부모가 죽으면 남녀무리가 삼년가 읍하고, 시체는 곧 숲속의 위에 둔다.
<武定>二年四月, 始遣使<張烏豆伐>等獻其方物. <武定>末, 貢使相尋. 及<齊>受<東魏>禪, 亦歲時朝聘.
'수''개황' 사년 '막하불'이 무리를 거느리고, 아뢰려고 왔다. 오년 그 무리가 변방에 나타나자, '문제'가 이를 거두고 그 옛땅에 거하도록 하였다. 이를 꾸짓자(?) 그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대궐에 이르러 머릴 조아리며 사죄하였다. 그 후에 '거란'의 다른 부인 '출복'등이 '고려'를 배신하고 무리를 이끌고 내지에 의지하였다. '문제'가 와서 보고, 이를 불쌍히 여기어 '돌궐'과 사이좋게 지내라고 하니,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먼곳의 사람의 마음이라, 양식을 넉넉히 대주고, 모두 본래 부로 돌아오니 칙서를 내려 '돌궐'에게 거두도록 하였다. 오로지 떠나지 않겠다 말하였다. 부락의 무리가 점점 나아가더니 북쪽으로 넓혀가고, 물과 풀을 딸라 떠돌다가 '요서' 북쪽 이백리에 이르러 '모흘신수'에 의거하여 거하니, 동서가 오백리 남북이 삼백리에 뻗쳐 나뉘니, 십부가 되었다. 병사들이 많으면 삼천이요, 적으면 천이 조금 넘는다. 추위와 더위를 쫓고 물과 풀을 따라 방목한다. 정벌할 것이 있으면, 곧 추장과 장수가 서로 의논하여 병사를 움직이니 계약하는 것과 같다. '돌궐'의 '사발략가한'이 토둔 '반질'을 보내어 이를 통합하려 하자, '거란'이 토둔을 죽이고 달아났다. '대업'칠년 사신을 보내어 조알하며 방물을 받쳤다.
室韋國(실위국)
<室韋國>在<勿吉>北千里, 去<洛陽>六千里. [室]或爲[失], 蓋<契丹>之類, 其南者爲<契丹>, 在北者號爲<失韋>. 路出<和龍>北千餘里, 入<契丹國>, 又北行十日至< 水>, 又北行三日有<善水>, 又北行三日有<犢了山>, 其山高大, 周回三百里. 又北行三百餘里,/$《魏書》卷一 《失韋傳》[百餘里]作[日]一字. 按前後皆以日計里程, 這裏不應獨異. 疑涉上文而誤.$/ 有大水名<屈利>, 又北行三日至<刃水>, 又北行五日到其國. 有大水從北而來, 廣四里餘, 名< 水>. 國土下濕, 語與<庫莫奚>·<契丹>·<豆莫婁國>同./$諸本脫[莫]字, 據《魏書》及下文《豆莫婁國傳》補.$/ 頗有粟·麥及 . 夏則城居, 冬逐水草, 多略貂皮. 丈夫索髮. 用角弓, 其箭尤長. 女婦束髮作叉手 . 其國少竊盜, 盜一徵三; 殺人者責馬三百匹,/$諸本脫[馬]字, 據《魏書》補.$/ 男女悉衣白鹿皮 袴. 有 , 釀酒. 俗愛赤珠, 爲婦人飾, 穿 於頸, 以多爲貴. 女不得此, 乃至不嫁. 父母死, 男女衆哭三年, 尸則置於林樹之上.
'실위국'은 '물길'의 북쪽 천리에 있다. '낙양'에서 육천리를 간다. '실'은 혹 '시'라고도 하는데, 대개 '거란'의 종류로, 남쪽에 있는 자를 '거란'이라 하고, 북쪽에 있는 자를 '시위'라 부른다. 길로 '화룡'에서 북으로 천여리를 가면 '거란국'에 들어가고, 또 북으로 십일을 가면 '철수'에 이르고, 또 북으로 삼일을 가면 '선수'가 있고, 북으로 삼일을 가면 '독료산'이 있는데, 그 산은 높고 크서 주위가 삼백리이다. 또 북으로 삼백여리를 가면 '굴리'라는 큰 물이 있고, 북으로 삼일을 가면, '도수'에 이르며, 북으로 오링을 가면 그나라에 이른다. 큰 물이 있어 북쪽에서 내려 오는데, 넓이가 사리나 되고, 이름이 '내수'이다. 나라의 토양은 아래가 습하고, 말은 '고막해'와 '거란', '두막루국'과 같다. 조와 보리 기장이 있다. 여름에는 성에 거쳐하지만 겨울에는 물과 풀을 따라 다니고, 담비가죽이 많다. 어른들은 머리를 따고, 각궁을 사용하며, 화살은 길이가 길다. 여자나 부인은 머리를 묶어 상투트는 것처럼 깍지끼어 올린다. 나라에 도적이 적으며, 하나를 훔치면 세배로 값는다. 살인한 자는 말 삼백필로 값고, 남녀가 모두 흰 사슴가죽으로 바지와 저고리를 해 입는다. 누룩이 있어, 술을 빗는다. 풍속에 붉은 구슬을 좋아하여 부인들이 이를 꾸미는데 구멍을 뚫어 목에 거는데, 막을수록 귀한 것이다. 여자는 이를 얻을 수 없는데, 시집가지 않음을 이른 것이다. 부모가 죽으면 남녀무리가 삼년가 읍하고, 시체는 곧 숲속의 위에 둔다.
<武定>二年四月, 始遣使<張烏豆伐>等獻其方物. <武定>末, 貢使相尋. 及<齊>受<東魏>禪, 亦歲時朝聘.
'무정' 이년 사월 처음으로 사신 '장오두벌'등이 와서 방물을 받쳤다. '무정'말에 이르러 사신이 서로 찾았고, '제'가 '동위'에게 선양 받을 때까지 역시 해마다 조공하였다.
其後分爲五部, 不相總一, 所謂<南室韋>·<北室韋>·<鉢室韋>·<深末 室韋>·<大室韋>, 無君長. 人貧弱, <突厥>以三吐屯總領之.
그 후에 나누어져 오부가 되었는데, 하나로 모이질 않았다. 소위 '남실위', '북실위', '발실위', '심말달실위', '대실위'로 같은 군장이 없었다. 사람들이 가난하고 약하여, '돌궐'이 토둔 셋으로 이를 총괄하였다.
<南室韋>在<契丹>北三千里, 土地卑濕, 至夏則移向北. <貸勃>·<欠對>二山多草木, 饒禽獸, 又多蚊 , 人皆巢居, 以避其患. 漸分爲二十五部, 每部有餘莫弗瞞 , 猶酋長也. 死則子弟代之, 嗣絶則擇賢豪而立之. 其俗, 丈夫皆被髮, 婦女盤髮, 衣服與<契丹>同. 乘牛車, 以 爲屋, 如<突厥>氈車之狀. 度水則束薪爲 , 或有以皮爲舟者. 馬則織草爲 , 結繩爲 . 匡寢則屈木爲室,/$《隋書》卷八四及《通志》卷二 《室韋傳》無[匡]字, 此當是衍文. 又諸本[屈木]倒作[木屈], 據《通志》乙.$/ 以 覆上, 移則載行. 以猪皮爲席, 編木爲藉. 婦女皆抱膝坐. 氣候多寒, 田收甚薄. 無羊, 少馬, 多猪·牛. 與<靺鞨>同俗, 婚嫁之法, 二家相許竟, 輒盜婦將去, 然後送牛馬爲聘, 更將婦歸家, 待有孕, 乃相許隨還舍. 婦人不再嫁, 以爲死人之妻, 難以共居. 部落共爲大棚, 人死則置其上. 居喪三年, 年唯四哭. 其國無鐵, 取給於<高麗>. 多貂.
其後分爲五部, 不相總一, 所謂<南室韋>·<北室韋>·<鉢室韋>·<深末 室韋>·<大室韋>, 無君長. 人貧弱, <突厥>以三吐屯總領之.
그 후에 나누어져 오부가 되었는데, 하나로 모이질 않았다. 소위 '남실위', '북실위', '발실위', '심말달실위', '대실위'로 같은 군장이 없었다. 사람들이 가난하고 약하여, '돌궐'이 토둔 셋으로 이를 총괄하였다.
<南室韋>在<契丹>北三千里, 土地卑濕, 至夏則移向北. <貸勃>·<欠對>二山多草木, 饒禽獸, 又多蚊 , 人皆巢居, 以避其患. 漸分爲二十五部, 每部有餘莫弗瞞 , 猶酋長也. 死則子弟代之, 嗣絶則擇賢豪而立之. 其俗, 丈夫皆被髮, 婦女盤髮, 衣服與<契丹>同. 乘牛車, 以 爲屋, 如<突厥>氈車之狀. 度水則束薪爲 , 或有以皮爲舟者. 馬則織草爲 , 結繩爲 . 匡寢則屈木爲室,/$《隋書》卷八四及《通志》卷二 《室韋傳》無[匡]字, 此當是衍文. 又諸本[屈木]倒作[木屈], 據《通志》乙.$/ 以 覆上, 移則載行. 以猪皮爲席, 編木爲藉. 婦女皆抱膝坐. 氣候多寒, 田收甚薄. 無羊, 少馬, 多猪·牛. 與<靺鞨>同俗, 婚嫁之法, 二家相許竟, 輒盜婦將去, 然後送牛馬爲聘, 更將婦歸家, 待有孕, 乃相許隨還舍. 婦人不再嫁, 以爲死人之妻, 難以共居. 部落共爲大棚, 人死則置其上. 居喪三年, 年唯四哭. 其國無鐵, 取給於<高麗>. 多貂.
'남실위'는 '거란'의 북쪽 삼천리에 있다. 토지는 천박하고 습하여 여름에는 북쪽으로 이동한다. '대발', '흠대' 두산에는 초목이 많아 짐승들이 넉넉하다. 또 모기와 파리가 많아, 사람들은 모두 집안에 모여, 그 고통을 피한다. 점점 나누어 지더니 이십오부가 되어, 매양 부에는 '여막불만돌'이라는 것이 있어, 추장과 같은 것이다. 죽으면 곧 자제가 대를 잇고, 대가 끊어지면 현자나 호걸을 가리어 세운다. 그 풍속에 장부는 모두 머리를 드리우고, 부인은 머리에 대를 댄다. 의 복은 '거란'과 같다.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풀을 엮어 집을 짓는데, '돌궐'의 전거의 형상과 같다. 물을 건널때는 섶나무를 엮어서 만들고, 혹 있는자는 가죽으로 배를 만든다. 말에는 풀을 엮어 안장을 만들고, 새끼줄을 꼬아 재갈을 단다. 잠자는 곳은 나무를 베어 침실을 만들고, 풀로 만든 것을 넘어뜨려 이동할 때 이를 싣고 간다. 돼지가죽을 깐다음에 나무를 엮어 자리를 만든다. 부인들은 모두 다리를 가슴에 대고 않는다. 기후는 추위가 많고, 밭은 심히 거두어들임이 척박하다. 양이 없고, 말은 적고, 돼지와 소가 많다. '말갈'과 풍속이 같고, 혼인하는 법에 두집안이 서로 허락을 하면, 갑자기 아내를 도둑질하여 떠났다가 후에 소나 말을 보내며 찾아간다. 다시 장차 부인이 집으로 돌아가서 아이를 벨때까지 기다렸다가, 이내 허락을 받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부인은 다시 재가 할수 없고, 죽은자의 처들은 함께 거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부락에서 함께 큰 누각을 만들어 사람이 죽으면 곧 그 위에 두고, 삼년상을 치룬다. 일년에 오직 네 번만 운다. 그 나라에는 쇠가 나지 않아, '고려'에서 공급하여 취한다. 담비가 많다.
<南室韋>北行十一日至<北室韋>, 分爲九部落, 繞<吐紇山>而居. 其部落渠帥號乞引莫賀 . 每部有莫何弗三人以貳之. 氣候最寒, 雪深沒馬. 冬則入山居土穴, 牛畜多凍死. 饒 鹿, 射獵爲務, 食肉衣皮, 鑿 沒水中而網取魚鼈. 地多積雪, 懼陷 穽, 騎木而行, 卽止. 皆捕貂爲業, 冠以狐貂, 衣以魚皮.
'남실위'에서 북으로 십일을 가면 '북실위'에 이른다. 나누어 아홉부락이 있다. '토흘산'을 둘러싸며 거한다. 그 부락에서는 거인 '걸인막하돌'이라 부른다. 매양 부에는 여섯명의 '막하불'이 있다. 기후는 최고로 춥고 눈은 말 높이 만큼 온다. 겨울에는 산에 들어가 토혈에서 거하고 소나 가축은 많이 얼어 죽는다. 노루와 사슴이 많아 사냥함에 힘쓰고, 고기는 먹고, 가죽은 옷을 해 입는다. 얼음을 뚫고 물속에 들어가 그물로 물고기와 자라를 잡는다. 땅에 눈이 많이 오면 함정에 빠질까 두려워 하여 나무를 타고 가다가 그친다. 모두 담비를 사로 잡는 것을 일로 삼아, 여우나 담비로 관을 쓰고, 옷은 물고기 가죽으로 한다.
又北行千里至<鉢室韋>, 依<胡布山>而住, 人衆多<北室韋>, 不知爲幾部落. 用樺皮蓋屋, 其餘同<北室韋>.
또 북쪽으로 천리를 가면 '발실위'에 이른다. '호포산'에 의지하며 살고, 사람들은 '북실위'에 많아 그 부락을 알지 못한다. 자작나무 껍질로 지붕을 잇고, 그 나머지는 모두 '북실위'와 같다.
<南室韋>北行十一日至<北室韋>, 分爲九部落, 繞<吐紇山>而居. 其部落渠帥號乞引莫賀 . 每部有莫何弗三人以貳之. 氣候最寒, 雪深沒馬. 冬則入山居土穴, 牛畜多凍死. 饒 鹿, 射獵爲務, 食肉衣皮, 鑿 沒水中而網取魚鼈. 地多積雪, 懼陷 穽, 騎木而行, 卽止. 皆捕貂爲業, 冠以狐貂, 衣以魚皮.
'남실위'에서 북으로 십일을 가면 '북실위'에 이른다. 나누어 아홉부락이 있다. '토흘산'을 둘러싸며 거한다. 그 부락에서는 거인 '걸인막하돌'이라 부른다. 매양 부에는 여섯명의 '막하불'이 있다. 기후는 최고로 춥고 눈은 말 높이 만큼 온다. 겨울에는 산에 들어가 토혈에서 거하고 소나 가축은 많이 얼어 죽는다. 노루와 사슴이 많아 사냥함에 힘쓰고, 고기는 먹고, 가죽은 옷을 해 입는다. 얼음을 뚫고 물속에 들어가 그물로 물고기와 자라를 잡는다. 땅에 눈이 많이 오면 함정에 빠질까 두려워 하여 나무를 타고 가다가 그친다. 모두 담비를 사로 잡는 것을 일로 삼아, 여우나 담비로 관을 쓰고, 옷은 물고기 가죽으로 한다.
又北行千里至<鉢室韋>, 依<胡布山>而住, 人衆多<北室韋>, 不知爲幾部落. 用樺皮蓋屋, 其餘同<北室韋>.
또 북쪽으로 천리를 가면 '발실위'에 이른다. '호포산'에 의지하며 살고, 사람들은 '북실위'에 많아 그 부락을 알지 못한다. 자작나무 껍질로 지붕을 잇고, 그 나머지는 모두 '북실위'와 같다.
從<鉢室韋>西南四日行, 至<深末 室韋>, 因水爲號也. 冬月穴居, 以避太陰之氣.
'발실위'에서 서남쪽으로 사일을 가면, '심말달실위'에 이르는데, 물이라 불리운다. 겨울에는 동굴에서 거하므로 큰 추위를 피한다.
'발실위'에서 서남쪽으로 사일을 가면, '심말달실위'에 이르는데, 물이라 불리운다. 겨울에는 동굴에서 거하므로 큰 추위를 피한다.
又西北數千里至<大室韋>, 徑路險阻, 言語不通. 尤多貂及靑鼠.
또 서북으로 수천리를 가면 '대실위'에 이른다. 길이 험하여 말이 통하지 않는다. 그 중에서 담비와 파란쥐가 많다.
<北室韋>時遣使貢獻, 餘無至者.
'북실위'가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받치고, 나머지는 이르지 않았다.
'북실위'가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받치고, 나머지는 이르지 않았다.
豆莫婁國(두막루국)
<豆莫婁國>在<勿吉>北千里, 舊<北夫餘>也. 在<室韋>之東,/$諸本脫[在]字, [韋]訛作[婁], 據《魏書》卷一 《豆莫婁國傳》改.$/ 東至於海, 方二千餘里. 其人土著, 有居室倉庫. 多山陵廣澤, 於東夷之域,/$諸本[域]訛作[城], 據《魏書》改.$/ 最爲平敞. 地宜五穀, 不生五果. 其人長大, 性强勇謹厚, 不寇抄. 其君長皆六畜名官, 邑落有豪帥. 飮食亦用俎豆./$諸本脫[俎]字, 據《魏書》補.$/ 有麻布, 衣製類<高麗>而帽大./$《魏書》[帽]作[幅], 是.$/ 其國大人, 以金銀飾之. 用刑嚴急, 殺人者死, 沒其家人爲奴婢. 俗淫, 尤惡妬者, 殺之尸於國南山上, 至腐, 女家始得輸牛馬乃與之./$《魏書》[始]作[欲], 是.$/ 或言<濊貊>之地也.
'두막루국'은 '물길' 북쪽 천여리에 있다. 옛날의 '북부여'이다. '실위'의 통쪽에 있고, 동쪽은 바다와 다아있고, 사방 이천리이다. 그 사람들은 토착하며 살고, 집에 거주하며 창고가 있다. 산과 능, 넓은 연못이 많고, 동이의 지역에서 가장 평평하다. 땅은 오곡에 마땅하고, 오과는 나오지 않는다. 그 사람들은 크고 성품이 강직하고 용맹하고, 경계할 줄 알고, 후하여, 노략질 하지 않는다. 그 군장은 모두 여섯 가축의 이름으로 하고, 읍락에는 호걸과 장수가 있다. 읍식은 역시 조두를 사용한다. 삼과 베가 있고, 옷은 '고려'와 비슷하고 모자는 크다. 그 나라의 대인은 금과 은으로 장식한다. 형벌은 혹독하고 급하여 살인자는 죽이고, 그 집안사람은 노비로 삼는다. 풍속이 음란하여 투기함을 가장 싫어하여, 죽이고 시체를 나라의 남쪽산 위에 놓고, 썩힌다. 여자집에서 이를 얻을려면, 소나 말을 주어야 한다. 혹 말하길, '예맥'의 땅이라 한다.
地豆干國(지두우국)
'두막루국'은 '물길' 북쪽 천여리에 있다. 옛날의 '북부여'이다. '실위'의 통쪽에 있고, 동쪽은 바다와 다아있고, 사방 이천리이다. 그 사람들은 토착하며 살고, 집에 거주하며 창고가 있다. 산과 능, 넓은 연못이 많고, 동이의 지역에서 가장 평평하다. 땅은 오곡에 마땅하고, 오과는 나오지 않는다. 그 사람들은 크고 성품이 강직하고 용맹하고, 경계할 줄 알고, 후하여, 노략질 하지 않는다. 그 군장은 모두 여섯 가축의 이름으로 하고, 읍락에는 호걸과 장수가 있다. 읍식은 역시 조두를 사용한다. 삼과 베가 있고, 옷은 '고려'와 비슷하고 모자는 크다. 그 나라의 대인은 금과 은으로 장식한다. 형벌은 혹독하고 급하여 살인자는 죽이고, 그 집안사람은 노비로 삼는다. 풍속이 음란하여 투기함을 가장 싫어하여, 죽이고 시체를 나라의 남쪽산 위에 놓고, 썩힌다. 여자집에서 이를 얻을려면, 소나 말을 주어야 한다. 혹 말하길, '예맥'의 땅이라 한다.
地豆干國(지두우국)
<地豆干國>/$《魏書》卷一 作[地豆于]. 按本書紀傳多作[干],《魏書》紀傳多作[于], 未知孰是, 今本書統一作[干].$/ 在<室韋>西千餘里. 多牛·羊, 出名馬, 皮爲衣服, 無五穀, 唯食肉酪. <延興>二年八月, 遣使朝貢, 至于<太和>六年, 貢使不絶. 十四年, 頻來犯塞, <孝文>詔征西大將軍<陽平王>< >擊走之. 自後時朝京師, <武定>末, 貢使不絶. 及<齊>受禪, 亦來朝貢.
'지두우국'은 '실위'의 서쪽 천여리에 있다. 소와 양이 많고, 명마가 나온다. 가죽으로 옷을 해 입고, 오곡은 없으며 오직 고기와 즙만을 먹는다. '연흥' 이년 팔월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고, '태화' 육년에 이르기까지 사신이 끊이질 않았다. 십사년 빈번히 변방을 침범하더니, '효문'이 고하여 정서대장군 '양평왕' '이'가 이를 쳤다. 후에 서울에 들어와 조알하고, '무정'말까지 사신이 끊이질 않았다. '제'가 선양받자 역시 와서 조공하였다.
烏洛侯國(오락후국)
'지두우국'은 '실위'의 서쪽 천여리에 있다. 소와 양이 많고, 명마가 나온다. 가죽으로 옷을 해 입고, 오곡은 없으며 오직 고기와 즙만을 먹는다. '연흥' 이년 팔월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고, '태화' 육년에 이르기까지 사신이 끊이질 않았다. 십사년 빈번히 변방을 침범하더니, '효문'이 고하여 정서대장군 '양평왕' '이'가 이를 쳤다. 후에 서울에 들어와 조알하고, '무정'말까지 사신이 끊이질 않았다. '제'가 선양받자 역시 와서 조공하였다.
烏洛侯國(오락후국)
<烏洛侯國>在<地豆干>北, 去<代都>四千五百餘里. 其地下濕, 多霧氣而寒. 人冬則穿地爲室, 夏則隨原阜畜牧. 多豕, 有穀·麥. 無大君長, 部落莫弗, 皆世爲之. 其俗, 繩髮, 皮服, 以珠爲飾. 人尙勇, 不爲姦竊, 故慢藏野積而無寇盜. 好射獵. 樂有 , 木槽革面而施九弦. 其國西北有<完水>, 東北流合於<難水>, 其小水, 皆注於<難>, 東入海. 又西北二十日行, 有<于巳尼>大水, 所謂<北海>也.
'오락후국'은 '지두우'의 북쪽에 있다. '대도'에서 사천오백여리를 간다. 그 땅의 아래는 습하고, 안개가 많고 춥다. 사람들은 겨울에 땅에 구멍을 뚫고 집을 짓고, 언덕에서 가축을 기른다. 돼지가 많고, 곡식과 보리가 있다. 대군장은 없고, 부락에 '막불'이 있어, 모두 대를 잇는다. 그 풍속에, 머리를 따고, 가죽으로 옷을 입고, 구슬로 꾸민다. 사람들은 용감함을 숭상하고, 간사함과 도둑이 없어, 옛부터 들에다가 곡식을 쌓아 두어도 도둑이 없다. 사냥하는 것을 좋아하고, 악기에는 공후가 있는데, 나무로 만든 말구유 같은 곳에 가득을 대어서, 아홉 개의 현을 단다. 그나라의 서북쪽에는 '완수'가 있고, 동북쪽으로 흘러, '난수'와 합쳐진다. 작은 물들은 모두 '난수'에 합쳐져서,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또한 서북으로 이십일을 가면, '우사니'라는 큰 물이 있는데, 소의 '북해'이다.
<太武><眞君>四年來朝,/$諸本脫[來]字, 據《魏書》卷一 ·《通志》卷二 《烏洛侯國傳》補.$/ 稱其國西北有<魏>先帝舊墟石室, 南北九十步, 東西四十步, 高七十尺, 室有神靈, 人多祈請. <太武>遣中書侍郞<李敞>告祭焉, 刊祝文於石室之壁而還.
'태무''진군'사년에 조알하였고, 그 나라의 서북쪽에는 '위'의 선조의 옛날 석실이 있는데, 남북이 구십보이고, 동서가 사십보며, 높이가 칠십척으로, 집에 신령이 있어, 사람들이 많이 빌었다. '태무'태에 중서시랑 '이창'을 보내어 제를 올렸는데, 축문을 석실의 벽에 새기고 돌아왔다.
流求國(유구국)
'오락후국'은 '지두우'의 북쪽에 있다. '대도'에서 사천오백여리를 간다. 그 땅의 아래는 습하고, 안개가 많고 춥다. 사람들은 겨울에 땅에 구멍을 뚫고 집을 짓고, 언덕에서 가축을 기른다. 돼지가 많고, 곡식과 보리가 있다. 대군장은 없고, 부락에 '막불'이 있어, 모두 대를 잇는다. 그 풍속에, 머리를 따고, 가죽으로 옷을 입고, 구슬로 꾸민다. 사람들은 용감함을 숭상하고, 간사함과 도둑이 없어, 옛부터 들에다가 곡식을 쌓아 두어도 도둑이 없다. 사냥하는 것을 좋아하고, 악기에는 공후가 있는데, 나무로 만든 말구유 같은 곳에 가득을 대어서, 아홉 개의 현을 단다. 그나라의 서북쪽에는 '완수'가 있고, 동북쪽으로 흘러, '난수'와 합쳐진다. 작은 물들은 모두 '난수'에 합쳐져서,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또한 서북으로 이십일을 가면, '우사니'라는 큰 물이 있는데, 소의 '북해'이다.
<太武><眞君>四年來朝,/$諸本脫[來]字, 據《魏書》卷一 ·《通志》卷二 《烏洛侯國傳》補.$/ 稱其國西北有<魏>先帝舊墟石室, 南北九十步, 東西四十步, 高七十尺, 室有神靈, 人多祈請. <太武>遣中書侍郞<李敞>告祭焉, 刊祝文於石室之壁而還.
'태무''진군'사년에 조알하였고, 그 나라의 서북쪽에는 '위'의 선조의 옛날 석실이 있는데, 남북이 구십보이고, 동서가 사십보며, 높이가 칠십척으로, 집에 신령이 있어, 사람들이 많이 빌었다. '태무'태에 중서시랑 '이창'을 보내어 제를 올렸는데, 축문을 석실의 벽에 새기고 돌아왔다.
流求國(유구국)
<流求國>居海島, 當<建安郡>東, 水行五日而至. 土多山洞. 其王姓<歡斯氏>, 名<渴剌兜>, 不知其由來有國世數也. 彼土人呼之爲可老羊, 妻曰多拔茶. 所居曰<波羅檀洞>, 塹柵三重, 環以流水, 樹棘爲藩. 王所居舍, 其大一十六間, 刻禽獸. 多鬪鏤樹, 似橘而葉密, 條纖如髮之下垂. 國有四五帥, 統諸洞, 洞有小王. 往往有村, 村有鳥了帥, 以善戰者爲之, 自相樹立, 主一村之事. 男女皆白紵繩纏髮, 從項後盤繞至額. 其男子用鳥羽爲冠, 裝以珠貝, 飾以赤毛, 形製不同. 婦人以羅紋白布爲帽, 其形方正. 織鬪鏤皮幷雜毛以爲衣, 製裁不一. 綴毛垂螺爲飾, 雜色相間, 下垂小貝, 其聲如 . 綴 施釧, 懸珠於頸. 織 爲笠, 飾以毛羽. 有刀 ·弓箭·劍 之屬. 其處少鐵, 刀皆薄小, 多以骨角輔助之. 編紵爲甲, 或用熊豹皮. 王乘木獸, 令左右輿之, 而導從不過十數人. 小王乘机, 鏤爲獸形. 國人好相攻擊, 人皆驍健善走, 難死耐創. 諸洞各爲部隊, 不相救助. 兩軍相當, 勇者三五人出前跳 , 交言相罵, 因相擊射. 如其不勝, 一軍皆走, 遣人致謝, 卽共和解. 收取鬪死者聚食之, 仍以 將向王所, 王則賜之以冠, 便爲隊帥.
'유구국'은 바다의 섬에 거하고 있는데, '건안군'의 동쪽이다. 물로 가면 오일이면 이른다. 땅은 산과 골짜기가 많다. 그 왕의 성의 '환사씨'로 이름은 '갈랄두'로 그 유래와 나라의 대는 알수가 없다. 그 사람들이 이를 부르기를 '가노양'이라 하고, 처를 '다발다'라 한다. 거처하는 곳을 '파라단동'이라 하는데, 구덩이와 책이 삼중으로 되어 있고, 빙 돌아 물을 대고, 대추나무로 덮어 두었다. 왕은 거처하는 관청은 큰 곳이 십육간이고, 옥으로 짐승을 세겨 두었다. 많은 전쟁을 나무에 새겨 두었는데, 귤나무 같은 곳에 잎과 같이 빽빽하여, 가는 가지는 머리칼이 아래로 드리우는 것과 같았다. 나라에는 사오명의 장수가 있어, 여러 동을 거느리고, 동에는 소왕이 있다. 가끔씩 촌이 있는데, 촌에는 '조료수'가 있어 전쟁을 잘 하는 자를 삼고, 스스로 나무를 심고, 촌의 일의 주인으로 삼는다. 남녀는 모두 흰색 모시줄로 머리를 묶고, 이마에서 목뒤까지 대를 댄다. 남자는 새의 깃털같은 관을 쓰고, 구슬과 조개로 꾸미고, 빨간 털로 장식하여 모양이 옷과 같지가 않았다. 부인은 듬성듬성한 흰색 베로 모자를 만드는데, 그 형태가 네모 반듯하였다. 베를 짤 때 전쟁하는 것을 가죽에 새기고, 털을 함께 섞어서 옷을 만드니, 옷을 지을 때 한번에 하지 못하였다. 털로 소라를 드리워 꿰매어 꾸미고, 색을 그 사이에 섞어, 작은 조개를 아래로 드리웠는데, 소리가 노리개와 같았다. 옥 귀거리에 팔찌를 하고, 목걸이를 하였다. 넝쿨로 동그렇게 해서 털과 깃으로 꾸몃다. 칼과 창, 활과 화살, 검과 침이 있다. 그 곳에는 철이 적어서 칼이 얇고 작아, 뼈나 뿔이 많아, 보충한다. 모시를 엮어서 갑옷을 만드는데, 혹은 곰이나 표범 가죽을 쓰기도 한다. 왕은 나무로 만든 짐승을 타는데, 좌우에 수레가 있어, 십수명이 빠지지 않도록 따라다니면서 끌고 다닌다. 소왕은 책상을 타고, 짐승 모양을 세긴다. 나라사람들이 서로 공격하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은 모두 날래고, 튼튼해서 달리기를 잘하여, 잘 죽지 않고, 괴로움을 잘 견딘다. 여러 동에 각각 부대가 있어도 서로 구하지 않는다. 양군이 서로 대적하면, 용맹한자 삼오명이 시끄러이 떠들면서 앞으로 나아가서 서로 욕하며 말을 주고 받고, 서로 활을 쏜다. 이와 같이 하여 승리하지 않으면, 일군이 모두 달려와 나온 사람들에게 사례하고 곧 함께 화해한다. 전투에서 죽은자를 거두어 이를 모여서 먹는데, 해골은 왕이 있는 곳에 향해 두고, 왕은 곧 관을 하사하여 큰 장수로 삼는다.
無賦 , 有事則均稅. 用刑亦無常准, 皆臨事科決. 犯罪皆斷於鳥了帥, 不伏則上請於王, 王令臣下共議定之. 獄無枷鎖, 唯用繩縛. 決死刑以鐵錐大如筋, 長尺餘, 鑽頂殺之. 輕罪用杖. 俗無文字, 望月虧盈, 以紀時節, 草木榮枯, 以爲年歲. 人深目長鼻, 類於胡, 亦有小慧. 無君臣上下之節, 拜伏之禮. 父子同牀而寢. 男子拔去 鬚, 身上有毛處皆除去. 婦人以墨 手爲蟲蛇之文. 嫁娶以酒·珠貝爲聘, 或男女相悅, 便相匹偶. 婦人産乳, 必食子衣, 産後以火自灸, 令汗出, 五日便平復. 以木槽中暴海水爲鹽, 木汁爲酢, 米麵爲酒, 其味甚薄. 食皆用手. 遇得異味, 先進尊者. 凡有宴會, 執酒者必待呼名而後飮, 上王酒者, 亦呼王名後銜盃共飮, 頗同<突厥>. 歌呼 蹄, 一人唱, 衆皆和, 音頗哀怨. 扶女子上膊, 搖手而舞. 其死者氣將絶, 至庭前, 親賓哭泣相弔. 浴其屍, 以布帛縛纏之, 以葦席, 土而殯, 上不起墳. 子爲父者, 數月不食肉. 其南境風俗少異, 人有死者, 邑里共食之. 有熊·豺·狼, 尤多猪·鷄, 無羊·牛·驢·馬. 厥田良沃, 先以火燒, 而引水灌, 持一 , 以石爲刃, 長尺餘, 闊數寸, 而墾之. 宜稻·粱·禾·黍·麻·豆·赤豆·胡黑豆等. 木有楓· ·樟·松· ·楠· ·梓. 竹·藤·果·藥, 同於<江>表. 風土氣候, 與<嶺>南相類./$諸本[相]訛作[山], 據《隋書》卷八一·《通典》卷一八六·《通志》一九四《流求傳》改.$/ 俗事山海之神, 祭以肴酒. 戰鬪殺人, 便將所殺人祭其神. 或依茂樹起小屋, 或懸 於樹上, 以箭射之, 或累石繫幡, 以爲神主. 王之所居, 壁下多聚 以爲佳. 人間門戶上, 必安獸頭骨角.
부역이 없고, 일이 있으면, 고르게 세를 부과한다. 형벌에는 역시 일정한 규칙이 없고, 모두 일의 과정에 임하여 결정한다. 범죄는 모두 '조료수'가 근절하는데, 복종하지 않으면 왕에게 고한다. 왕은 신하들과 의논하여 정한다. 옥에는 형틀과 쇠사슬이 없고, 오직 줄로 묶어 쓴다. 사형이 결정나면 큰 힘줄같은 쇠 송곳으로 길이가 일척 정도로 정수를 뚫어 죽인다. 가벼운 죄는 몽둥이로 때린다. 풍속에 문자가 없어 달이 차고 기우는 것으로 때를 잡고, 초목에서 꽃이 피고 지는 것으로 해를 잡는다. 사람들은 눈이 깊고, 코가 길며, 호의 종류로 또한 작은 지혜가 있다. 군신과 상하의 절도가 없고, 엎드려 절하는 것이 예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침상에서 잠을 자고. 남자들은 콧수염을 자르고 몸에 있는 모든 털을 제거한다. 여자들은 벌래나 뱀 무늬로 손에 문신을 한다. 결혼은 술과 구슬 돈을 가지고 찾아가서 혹 남녀가 서로 좋아하면 짝으로 삼는다. 부인이 젖을 낼때는 반드시 아들의 옷을 먹고, 아이를 낳은 후에는 불로 뜸을 뜨고 땀을 낸면 오일이면 평상시로 되돌아 온다. 나무구유에 바닷물을 담아 소금을 만들고 나무즙으로 식초를 만들며 쌀을 씹어 술을 만드는데, 맛은 심히 없다. 식사는 모두 손을 사용하고, 우연히 이상한 맛을 발견하면 먼저 높은 사람한테 보낸다. 무릇 연회가 있는데, 주자가 지키어 반드시 이름을 부를 때 까지 기다렸다가 후에 마신다. 상왕이 주자로 역시 왕의 이름을 부른 후에 함게 마시는데, 자못 '돌궐'과 한가지이다. 노래하고 밟기는 한사람이 창하고 무리가 모두 화답하는데, 음이 마못 애절하다. 여자를 어깨 위로 올리고 손을 흔들며 춤을 춘다. 죽을자의 기운이 장차 끊어지려 하면 가마를 뜰 앞에 두고 친한 손님이 곡하며 조상한다. 그 시신을 목욕시킨 후에 베와 비단으로 이를 감싸고, 갈대로 싼 자리로 말아 , 흙가까이에서 염하는데, 봉분이 없다. 아들이 아비가 죽으면 수개월동안 고기를 먹지 않는다. 그 남쪽지역의 풍속은 조금 다른데, 사람이 죽으면 읍과 리에서 함께 이를 먹는다. 곰과 승냥이와 이리가 있으며, 특히 돼지와 닭이 많다. 양과 소, 나귀와 말은 없다. 밭은 좋고, 물대기가 좋아 먼저 불사른후에 물을 끌어들여 관개한다. 가래가 하나 있는데, 돌로 날을 삼아 길이가 일척여이고 넓이가 수촌으로 이를 가지고 개간한다. 벼, 기장, 삼, 콩, 등이 마땅하고 나무에는 단풍, 노송, 녹, 솔, 느릅, 가래나무가 있다. 대나무와 등나무, 과일과 약은 '강'과 같다. 풍토기후는 '령'의 남쪽과 비슷하다. 풍속에 산과 바다의 신에게 술과 안주로 제사지낸다.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거나 다시 장사 사람을 죽이려면 그 신에게 제사하거나 혹은 숲이 우거진 곳에 작은 집을 짓거나, 나무위에 해골을 매달아 화살로 이를 쏜다. 또 혹은 돌을 쌓아 기를 달고 신주로 삼는다. 왕이 거하는 곳의 벽아래에 해골을 많이 모아두는 것을 좋아한다. 백성들의 문이나 출입구 위에는 반드시 동물머리뼈나 뿔을 두는 것을 좋아한다.
<隋><大業>元年, 海師<何蠻>等, 每春秋二時, 天淸風靜, 東望依稀, 似有煙霧之氣, 亦不知幾千里. 三年, <煬帝>令羽騎尉<朱寬>入海求訪異俗,/$諸本脫[三年]二字, 據《隋書》·《通典》補. 事見本書卷十二《隋煬帝紀》<大業>三年三月.$/ <何蠻>言之, 遂與<蠻>俱往. 同到<流求國>, 言不通, 掠一人而反. 明年, 復令<寬>慰撫之, 不從. <寬>取其布甲而歸. 時<倭國>使來朝見之, 曰: [此<夷邪夕國>人所用.]/$《隋書》·《通典》·《通志》[夕] 作[久]. 疑[夕]誤.$/ 帝遣武賁郞將<陳稜>·朝請大夫<張鎭州>率兵自<義安>浮海至<高華嶼>, 又東行二日至< 嶼>, 又一日, 便至<流求>. <流求>不從, <稜>擊走之. 進至其都, 焚其宮室, 虜其男女數千人, 載軍實而還. 自爾遂絶.
'수''대업'원년 해사 '하만'등이 매양 봄 가을 두철에 동쪽으로 희미한 것을 바라 보았는데, 연기나 안개같은 기운이 있음과 같아, 역시 그 천리의 조짐을 알지 못하였다. 삼년, '양제'가 우기위 '주관'을 바다로 보내어 다른 풍속을 찾아 보도록 명하자 '하만'이 이를 말하길 '만'과 함께 가도록 하였다. 함께 '유구국'에 이르렀는데 말이 통하지 않자 노략질 하던 한 사람과 돌아왔다. 다음해에 다시 '관'에게 위로하며 가라고 명하였는데, 따르지 않았다. '관'이 포로만든 갑옷을 취하여 돌아갔다. 이때에 '왜국'의 사신이 와서 조견하며 말하길, '이사석국'사람을 쓰십시오 하였다. 제가 무분랑장 '진릉'과 조청대부 '장진주'를 병사를 이끌고 보내어 '의안'에서 배를 띄어 '고화서'에 이르렀다. 또 동쪽으로 이틀을 가서 '구벽서'에 이르고, 하룻만에 다시 '유구'에 이르렀다. '유구'가 따르지 않자 '릉'이이를 공격하였다. 그 도읍에 나아가 이르러 그 궁실을 불사르고, 그 남녀 수천명을 잡아, 노획물로 싣고 돌아 왔다. 그들이 이에 끊어졌다.
'유구국'은 바다의 섬에 거하고 있는데, '건안군'의 동쪽이다. 물로 가면 오일이면 이른다. 땅은 산과 골짜기가 많다. 그 왕의 성의 '환사씨'로 이름은 '갈랄두'로 그 유래와 나라의 대는 알수가 없다. 그 사람들이 이를 부르기를 '가노양'이라 하고, 처를 '다발다'라 한다. 거처하는 곳을 '파라단동'이라 하는데, 구덩이와 책이 삼중으로 되어 있고, 빙 돌아 물을 대고, 대추나무로 덮어 두었다. 왕은 거처하는 관청은 큰 곳이 십육간이고, 옥으로 짐승을 세겨 두었다. 많은 전쟁을 나무에 새겨 두었는데, 귤나무 같은 곳에 잎과 같이 빽빽하여, 가는 가지는 머리칼이 아래로 드리우는 것과 같았다. 나라에는 사오명의 장수가 있어, 여러 동을 거느리고, 동에는 소왕이 있다. 가끔씩 촌이 있는데, 촌에는 '조료수'가 있어 전쟁을 잘 하는 자를 삼고, 스스로 나무를 심고, 촌의 일의 주인으로 삼는다. 남녀는 모두 흰색 모시줄로 머리를 묶고, 이마에서 목뒤까지 대를 댄다. 남자는 새의 깃털같은 관을 쓰고, 구슬과 조개로 꾸미고, 빨간 털로 장식하여 모양이 옷과 같지가 않았다. 부인은 듬성듬성한 흰색 베로 모자를 만드는데, 그 형태가 네모 반듯하였다. 베를 짤 때 전쟁하는 것을 가죽에 새기고, 털을 함께 섞어서 옷을 만드니, 옷을 지을 때 한번에 하지 못하였다. 털로 소라를 드리워 꿰매어 꾸미고, 색을 그 사이에 섞어, 작은 조개를 아래로 드리웠는데, 소리가 노리개와 같았다. 옥 귀거리에 팔찌를 하고, 목걸이를 하였다. 넝쿨로 동그렇게 해서 털과 깃으로 꾸몃다. 칼과 창, 활과 화살, 검과 침이 있다. 그 곳에는 철이 적어서 칼이 얇고 작아, 뼈나 뿔이 많아, 보충한다. 모시를 엮어서 갑옷을 만드는데, 혹은 곰이나 표범 가죽을 쓰기도 한다. 왕은 나무로 만든 짐승을 타는데, 좌우에 수레가 있어, 십수명이 빠지지 않도록 따라다니면서 끌고 다닌다. 소왕은 책상을 타고, 짐승 모양을 세긴다. 나라사람들이 서로 공격하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은 모두 날래고, 튼튼해서 달리기를 잘하여, 잘 죽지 않고, 괴로움을 잘 견딘다. 여러 동에 각각 부대가 있어도 서로 구하지 않는다. 양군이 서로 대적하면, 용맹한자 삼오명이 시끄러이 떠들면서 앞으로 나아가서 서로 욕하며 말을 주고 받고, 서로 활을 쏜다. 이와 같이 하여 승리하지 않으면, 일군이 모두 달려와 나온 사람들에게 사례하고 곧 함께 화해한다. 전투에서 죽은자를 거두어 이를 모여서 먹는데, 해골은 왕이 있는 곳에 향해 두고, 왕은 곧 관을 하사하여 큰 장수로 삼는다.
無賦 , 有事則均稅. 用刑亦無常准, 皆臨事科決. 犯罪皆斷於鳥了帥, 不伏則上請於王, 王令臣下共議定之. 獄無枷鎖, 唯用繩縛. 決死刑以鐵錐大如筋, 長尺餘, 鑽頂殺之. 輕罪用杖. 俗無文字, 望月虧盈, 以紀時節, 草木榮枯, 以爲年歲. 人深目長鼻, 類於胡, 亦有小慧. 無君臣上下之節, 拜伏之禮. 父子同牀而寢. 男子拔去 鬚, 身上有毛處皆除去. 婦人以墨 手爲蟲蛇之文. 嫁娶以酒·珠貝爲聘, 或男女相悅, 便相匹偶. 婦人産乳, 必食子衣, 産後以火自灸, 令汗出, 五日便平復. 以木槽中暴海水爲鹽, 木汁爲酢, 米麵爲酒, 其味甚薄. 食皆用手. 遇得異味, 先進尊者. 凡有宴會, 執酒者必待呼名而後飮, 上王酒者, 亦呼王名後銜盃共飮, 頗同<突厥>. 歌呼 蹄, 一人唱, 衆皆和, 音頗哀怨. 扶女子上膊, 搖手而舞. 其死者氣將絶, 至庭前, 親賓哭泣相弔. 浴其屍, 以布帛縛纏之, 以葦席, 土而殯, 上不起墳. 子爲父者, 數月不食肉. 其南境風俗少異, 人有死者, 邑里共食之. 有熊·豺·狼, 尤多猪·鷄, 無羊·牛·驢·馬. 厥田良沃, 先以火燒, 而引水灌, 持一 , 以石爲刃, 長尺餘, 闊數寸, 而墾之. 宜稻·粱·禾·黍·麻·豆·赤豆·胡黑豆等. 木有楓· ·樟·松· ·楠· ·梓. 竹·藤·果·藥, 同於<江>表. 風土氣候, 與<嶺>南相類./$諸本[相]訛作[山], 據《隋書》卷八一·《通典》卷一八六·《通志》一九四《流求傳》改.$/ 俗事山海之神, 祭以肴酒. 戰鬪殺人, 便將所殺人祭其神. 或依茂樹起小屋, 或懸 於樹上, 以箭射之, 或累石繫幡, 以爲神主. 王之所居, 壁下多聚 以爲佳. 人間門戶上, 必安獸頭骨角.
부역이 없고, 일이 있으면, 고르게 세를 부과한다. 형벌에는 역시 일정한 규칙이 없고, 모두 일의 과정에 임하여 결정한다. 범죄는 모두 '조료수'가 근절하는데, 복종하지 않으면 왕에게 고한다. 왕은 신하들과 의논하여 정한다. 옥에는 형틀과 쇠사슬이 없고, 오직 줄로 묶어 쓴다. 사형이 결정나면 큰 힘줄같은 쇠 송곳으로 길이가 일척 정도로 정수를 뚫어 죽인다. 가벼운 죄는 몽둥이로 때린다. 풍속에 문자가 없어 달이 차고 기우는 것으로 때를 잡고, 초목에서 꽃이 피고 지는 것으로 해를 잡는다. 사람들은 눈이 깊고, 코가 길며, 호의 종류로 또한 작은 지혜가 있다. 군신과 상하의 절도가 없고, 엎드려 절하는 것이 예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침상에서 잠을 자고. 남자들은 콧수염을 자르고 몸에 있는 모든 털을 제거한다. 여자들은 벌래나 뱀 무늬로 손에 문신을 한다. 결혼은 술과 구슬 돈을 가지고 찾아가서 혹 남녀가 서로 좋아하면 짝으로 삼는다. 부인이 젖을 낼때는 반드시 아들의 옷을 먹고, 아이를 낳은 후에는 불로 뜸을 뜨고 땀을 낸면 오일이면 평상시로 되돌아 온다. 나무구유에 바닷물을 담아 소금을 만들고 나무즙으로 식초를 만들며 쌀을 씹어 술을 만드는데, 맛은 심히 없다. 식사는 모두 손을 사용하고, 우연히 이상한 맛을 발견하면 먼저 높은 사람한테 보낸다. 무릇 연회가 있는데, 주자가 지키어 반드시 이름을 부를 때 까지 기다렸다가 후에 마신다. 상왕이 주자로 역시 왕의 이름을 부른 후에 함게 마시는데, 자못 '돌궐'과 한가지이다. 노래하고 밟기는 한사람이 창하고 무리가 모두 화답하는데, 음이 마못 애절하다. 여자를 어깨 위로 올리고 손을 흔들며 춤을 춘다. 죽을자의 기운이 장차 끊어지려 하면 가마를 뜰 앞에 두고 친한 손님이 곡하며 조상한다. 그 시신을 목욕시킨 후에 베와 비단으로 이를 감싸고, 갈대로 싼 자리로 말아 , 흙가까이에서 염하는데, 봉분이 없다. 아들이 아비가 죽으면 수개월동안 고기를 먹지 않는다. 그 남쪽지역의 풍속은 조금 다른데, 사람이 죽으면 읍과 리에서 함께 이를 먹는다. 곰과 승냥이와 이리가 있으며, 특히 돼지와 닭이 많다. 양과 소, 나귀와 말은 없다. 밭은 좋고, 물대기가 좋아 먼저 불사른후에 물을 끌어들여 관개한다. 가래가 하나 있는데, 돌로 날을 삼아 길이가 일척여이고 넓이가 수촌으로 이를 가지고 개간한다. 벼, 기장, 삼, 콩, 등이 마땅하고 나무에는 단풍, 노송, 녹, 솔, 느릅, 가래나무가 있다. 대나무와 등나무, 과일과 약은 '강'과 같다. 풍토기후는 '령'의 남쪽과 비슷하다. 풍속에 산과 바다의 신에게 술과 안주로 제사지낸다.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거나 다시 장사 사람을 죽이려면 그 신에게 제사하거나 혹은 숲이 우거진 곳에 작은 집을 짓거나, 나무위에 해골을 매달아 화살로 이를 쏜다. 또 혹은 돌을 쌓아 기를 달고 신주로 삼는다. 왕이 거하는 곳의 벽아래에 해골을 많이 모아두는 것을 좋아한다. 백성들의 문이나 출입구 위에는 반드시 동물머리뼈나 뿔을 두는 것을 좋아한다.
<隋><大業>元年, 海師<何蠻>等, 每春秋二時, 天淸風靜, 東望依稀, 似有煙霧之氣, 亦不知幾千里. 三年, <煬帝>令羽騎尉<朱寬>入海求訪異俗,/$諸本脫[三年]二字, 據《隋書》·《通典》補. 事見本書卷十二《隋煬帝紀》<大業>三年三月.$/ <何蠻>言之, 遂與<蠻>俱往. 同到<流求國>, 言不通, 掠一人而反. 明年, 復令<寬>慰撫之, 不從. <寬>取其布甲而歸. 時<倭國>使來朝見之, 曰: [此<夷邪夕國>人所用.]/$《隋書》·《通典》·《通志》[夕] 作[久]. 疑[夕]誤.$/ 帝遣武賁郞將<陳稜>·朝請大夫<張鎭州>率兵自<義安>浮海至<高華嶼>, 又東行二日至< 嶼>, 又一日, 便至<流求>. <流求>不從, <稜>擊走之. 進至其都, 焚其宮室, 虜其男女數千人, 載軍實而還. 自爾遂絶.
'수''대업'원년 해사 '하만'등이 매양 봄 가을 두철에 동쪽으로 희미한 것을 바라 보았는데, 연기나 안개같은 기운이 있음과 같아, 역시 그 천리의 조짐을 알지 못하였다. 삼년, '양제'가 우기위 '주관'을 바다로 보내어 다른 풍속을 찾아 보도록 명하자 '하만'이 이를 말하길 '만'과 함께 가도록 하였다. 함께 '유구국'에 이르렀는데 말이 통하지 않자 노략질 하던 한 사람과 돌아왔다. 다음해에 다시 '관'에게 위로하며 가라고 명하였는데, 따르지 않았다. '관'이 포로만든 갑옷을 취하여 돌아갔다. 이때에 '왜국'의 사신이 와서 조견하며 말하길, '이사석국'사람을 쓰십시오 하였다. 제가 무분랑장 '진릉'과 조청대부 '장진주'를 병사를 이끌고 보내어 '의안'에서 배를 띄어 '고화서'에 이르렀다. 또 동쪽으로 이틀을 가서 '구벽서'에 이르고, 하룻만에 다시 '유구'에 이르렀다. '유구'가 따르지 않자 '릉'이이를 공격하였다. 그 도읍에 나아가 이르러 그 궁실을 불사르고, 그 남녀 수천명을 잡아, 노획물로 싣고 돌아 왔다. 그들이 이에 끊어졌다.
倭國(왜국)
<倭國>在<百濟>·<新羅>東南, 水陸三千里, 於大海中依山島而居. <魏>時, 譯通中國三十餘國, 皆稱子./$《隋書》卷八一·《通志》卷一九四《倭傳》作[皆自稱王].$/ 夷人不知里數, 但計以日. 其國境, 東西五月行, 南北三月行, 各至於海. 其地勢, 東高西下. 居於<邪摩堆>, 則《魏志》所謂<邪馬臺>者也. 又云: 去<樂浪郡>境及<帶方郡> 一萬二千里, 在<會稽>東, 與< 耳>相近. 俗皆文身, 自云<太伯>之後. 計從<帶方>至<倭國>, 循海水行, 歷<朝鮮國>, 乍南乍東, 七千餘里, 始度一海. 又南千餘里, 度一海, 闊千餘里, 名<瀚海>, 至<一支國>. 又度一海千餘里, 名<末盧國>. 又東南陸行五百里, 至<伊都國>. 又東南百里, 至<奴國>. 又東行百里, 至<不彌國>. 又南水行二十日, 至<投馬國>. 又南水行十日, 陸行一月, 至<邪馬臺國>, 卽<倭王>所都.
'왜국'은 '백제'와 '신라'의 동남쪽에 있다. 물과 육지길로 삼천리이며, 큰 바다중에서 섬과 산에 의지하여 산다. '위'나라때에 중국과 삼십여 나라가 통하여, 모두 아들이라 칭하였다. 이 이인들은 수리를 알지 못하여, 다만 태양으로 계산할 뿐이다.그 나라의 지경은 동서로 오개월을 가고, 남북으로 삼개월을 가며, 각각 바다에 이르른다. 그 땅의 형세는 동쪽이 높고, 서쪽은 낮다. '사마퇴'에 거하는데, '위지'에 이르기를 소위 '사마대'라 한다. 또 이르기를 '낙랑군'이나 '대방군'에서 일만 이천리이고, '회계'의 동쪽에 있으며, '담이'와 가깝다. 풍속은 문신을 하는데, 스스로 '태백'의 후예라 한다. '대방'에서 '왜국'에 이르는 길은 바닷길을 따라서 '조선국'을 지나 남쪽으로 잠깐, 동쪽으로 잠깐 가서 칠천여리이면, 바다를 건너기 시작한다. 또 남쪽으로 천여리에 바다를 건너는데, 이 천여리의 넓은 바다를 일명 '한해'라 부른다. '일지국'에 이르게 된다. 또 바다를 건너 천여리에 '말노국'이 있다. 또 동남으로 육지를 따라 오백리이면 '이도국'에 이른다. 또 동남 백리에 '노국'에 이르고, 동쪽으로 백리를 가면, '불미국'에 이른다. 남쪽으로 물로 이십일이면, '투마국'에 이르고, 더 남쪽으로 십일을 가고, 육지로 한달을 가면 '사마대국'에 이르지 곧 '왜왕'의 도읍이다.
<漢><光武>時, 遣使入朝, 自稱大夫. <安帝>時, 又遣朝貢, 謂之<倭奴國>. <靈帝><光和>中, 其國亂, 遞相攻伐, 歷年無主. 有女子名<卑彌呼>, 能以鬼道惑衆, 國人共立爲王. 無夫, 有二男子, 給王飮食, 通傳言語. 其王有宮室·樓觀·城柵, 皆持兵守衛, 爲法甚嚴. <魏><景初>三年, <公孫文懿>誅後, <卑彌呼>始遣使朝貢./$百衲·北·汲·殿四本[三]作[五], 南本及《梁書》作[三]. 按《三國志》卷三 《倭傳》云:[<景初>二年六月, <倭>女王遣大夫<難升米>等詣郡[帶方郡], 求詣天子朝獻.] 又據《三國志》卷三《明帝紀》, <公孫淵>被殺, 在<景初>二年八月. 若<倭>使是淵破後始來, 則《三國志》《倭傳》之[二年]當是[三年]之誤. 今從南本及《梁書》.$/ <魏主>假金印紫綬. <正始>中, <卑彌呼>死, 更立男王. 國中不服, 更相誅殺, 復立<卑彌呼>宗女<臺與>爲王. 其後復立男王, 受中國爵命. <江>左歷<晉>·<宋>·<齊>·<梁>, 朝聘不絶.
'한''광무'때에 사신을 보내어 입조하고 스스로 대부라 칭하였다. '안제'때에 또 조공을 받치고 '왜노국'이라 하였다. '영제 광화'중에 그 나라에 난이 있어 서로 공격을 일삼았는데, 해가 지나도록 주인이 없었다. 여자로 이름이 '비미호'가 있었는데, 능히 귀신같은 도로 대중을 미혹케 하여, 나라사람들이 함께 왕으로 세웠다. 지아비는 없고, 두명의 남자가 있어, 왕에게 음식을 나르고, 말을 전하였다. 그 왕은 왕실과 누관, 성책이 있어 모두 병사들이 지키도록 하고, 법이 매우 엄하였다. '위 경초' 삼년 '공손무의'를 주살한 후에 '비미호'가 조공을 받쳤다. '위주'가 금인과 자수를 내렸다. '정시'중에 '비미호'가 죽자 다시 남자가 왕에 섰다. 나라에서 복종하지 않더니 다시 서로를 죽이자 '비미호'의 딸 '대여'를 왕위로 삼았다. 그 후 다시 남자 왕이 서고, 중국에서 작위를 받았다. '강'의 좌측에 '진, 송, 제, 양'이 서고 조공이 끊이질 않았다.
<倭國>在<百濟>·<新羅>東南, 水陸三千里, 於大海中依山島而居. <魏>時, 譯通中國三十餘國, 皆稱子./$《隋書》卷八一·《通志》卷一九四《倭傳》作[皆自稱王].$/ 夷人不知里數, 但計以日. 其國境, 東西五月行, 南北三月行, 各至於海. 其地勢, 東高西下. 居於<邪摩堆>, 則《魏志》所謂<邪馬臺>者也. 又云: 去<樂浪郡>境及<帶方郡> 一萬二千里, 在<會稽>東, 與< 耳>相近. 俗皆文身, 自云<太伯>之後. 計從<帶方>至<倭國>, 循海水行, 歷<朝鮮國>, 乍南乍東, 七千餘里, 始度一海. 又南千餘里, 度一海, 闊千餘里, 名<瀚海>, 至<一支國>. 又度一海千餘里, 名<末盧國>. 又東南陸行五百里, 至<伊都國>. 又東南百里, 至<奴國>. 又東行百里, 至<不彌國>. 又南水行二十日, 至<投馬國>. 又南水行十日, 陸行一月, 至<邪馬臺國>, 卽<倭王>所都.
'왜국'은 '백제'와 '신라'의 동남쪽에 있다. 물과 육지길로 삼천리이며, 큰 바다중에서 섬과 산에 의지하여 산다. '위'나라때에 중국과 삼십여 나라가 통하여, 모두 아들이라 칭하였다. 이 이인들은 수리를 알지 못하여, 다만 태양으로 계산할 뿐이다.그 나라의 지경은 동서로 오개월을 가고, 남북으로 삼개월을 가며, 각각 바다에 이르른다. 그 땅의 형세는 동쪽이 높고, 서쪽은 낮다. '사마퇴'에 거하는데, '위지'에 이르기를 소위 '사마대'라 한다. 또 이르기를 '낙랑군'이나 '대방군'에서 일만 이천리이고, '회계'의 동쪽에 있으며, '담이'와 가깝다. 풍속은 문신을 하는데, 스스로 '태백'의 후예라 한다. '대방'에서 '왜국'에 이르는 길은 바닷길을 따라서 '조선국'을 지나 남쪽으로 잠깐, 동쪽으로 잠깐 가서 칠천여리이면, 바다를 건너기 시작한다. 또 남쪽으로 천여리에 바다를 건너는데, 이 천여리의 넓은 바다를 일명 '한해'라 부른다. '일지국'에 이르게 된다. 또 바다를 건너 천여리에 '말노국'이 있다. 또 동남으로 육지를 따라 오백리이면 '이도국'에 이른다. 또 동남 백리에 '노국'에 이르고, 동쪽으로 백리를 가면, '불미국'에 이른다. 남쪽으로 물로 이십일이면, '투마국'에 이르고, 더 남쪽으로 십일을 가고, 육지로 한달을 가면 '사마대국'에 이르지 곧 '왜왕'의 도읍이다.
<漢><光武>時, 遣使入朝, 自稱大夫. <安帝>時, 又遣朝貢, 謂之<倭奴國>. <靈帝><光和>中, 其國亂, 遞相攻伐, 歷年無主. 有女子名<卑彌呼>, 能以鬼道惑衆, 國人共立爲王. 無夫, 有二男子, 給王飮食, 通傳言語. 其王有宮室·樓觀·城柵, 皆持兵守衛, 爲法甚嚴. <魏><景初>三年, <公孫文懿>誅後, <卑彌呼>始遣使朝貢./$百衲·北·汲·殿四本[三]作[五], 南本及《梁書》作[三]. 按《三國志》卷三 《倭傳》云:[<景初>二年六月, <倭>女王遣大夫<難升米>等詣郡[帶方郡], 求詣天子朝獻.] 又據《三國志》卷三《明帝紀》, <公孫淵>被殺, 在<景初>二年八月. 若<倭>使是淵破後始來, 則《三國志》《倭傳》之[二年]當是[三年]之誤. 今從南本及《梁書》.$/ <魏主>假金印紫綬. <正始>中, <卑彌呼>死, 更立男王. 國中不服, 更相誅殺, 復立<卑彌呼>宗女<臺與>爲王. 其後復立男王, 受中國爵命. <江>左歷<晉>·<宋>·<齊>·<梁>, 朝聘不絶.
'한''광무'때에 사신을 보내어 입조하고 스스로 대부라 칭하였다. '안제'때에 또 조공을 받치고 '왜노국'이라 하였다. '영제 광화'중에 그 나라에 난이 있어 서로 공격을 일삼았는데, 해가 지나도록 주인이 없었다. 여자로 이름이 '비미호'가 있었는데, 능히 귀신같은 도로 대중을 미혹케 하여, 나라사람들이 함께 왕으로 세웠다. 지아비는 없고, 두명의 남자가 있어, 왕에게 음식을 나르고, 말을 전하였다. 그 왕은 왕실과 누관, 성책이 있어 모두 병사들이 지키도록 하고, 법이 매우 엄하였다. '위 경초' 삼년 '공손무의'를 주살한 후에 '비미호'가 조공을 받쳤다. '위주'가 금인과 자수를 내렸다. '정시'중에 '비미호'가 죽자 다시 남자가 왕에 섰다. 나라에서 복종하지 않더니 다시 서로를 죽이자 '비미호'의 딸 '대여'를 왕위로 삼았다. 그 후 다시 남자 왕이 서고, 중국에서 작위를 받았다. '강'의 좌측에 '진, 송, 제, 양'이 서고 조공이 끊이질 않았다.
及<陳>平, 至<開皇>二十年, <倭王>姓<阿每>, 字<多利思比孤>, 號阿輩鷄彌, 遣使詣闕. 上令所司訪其風俗, 使者言<倭王>以天爲兄, 以日爲弟, 天明時出聽政,/$《隋書》[天]下有[未]字. 按下云[日出便停理務], 則有[未]字是.$/ 跏趺坐, 日出便停理務, 云委我弟. <文帝>曰: [此大無義理.] 於是訓令改之. 王妻號鷄彌,/$諸本[號]作[姓].《隋書》·《通志》作[號]. 按上言王[號阿輩 彌],《通典》解釋云:[華言天兒也.] 可知這裏也是王妻之號. 今據改.$/ 後宮有女六七百人. 名太子爲利歌彌多弗利. 無城郭. 內官有十二等: 一曰大德, 次小德, 次大仁, 次小仁, 次大義, 次小義, 次大禮, 次小禮, 次大智, 次小智, 次大信, 次小信, 員無定數. 有軍尼一百二十人, 猶中國牧宰. 八十戶置一伊尼翼, 如今里長也. 十伊尼翼屬一軍尼. 其服飾, 男子衣裙 , 其袖微小; 履如 形, 漆其上, 繫之脚. 人庶多跣足, 不得用金銀爲飾. 故時, 衣橫幅, 結束相連而無縫, 頭亦無冠, 但垂髮於兩耳上. 至隋, 其王始制冠, 以錦綵爲之, 以金銀鏤花爲飾. 婦人束髮於後, 亦衣裙 , 裳皆有 ./$諸本[ ]訛作[ ], 據《隋書》改.$/ 竹聚以爲梳. 編草爲薦, 雜皮爲表, 緣以文皮. 有弓·矢·刀· ·弩·斧, 漆皮爲甲, 骨爲矢鏑. 雖有兵, 無征戰.
'진'이 평정하고, '개황'이십년에 이르러, 성이 '아매'이고 이름이 '다리사비고'인 '아배학미'라 불리우는 '왜왕'이 사신을 보내어 대궐에 이르렀다. 임금이 벼슬을 내리고 그 풍속을 물으니, 사신이 말하길, '왜왕'은 하늘을 형으로 삼고, 태양을 아우로 삼음으로써 하늘이 밝을 때에 태어나 정사를 보고 있습니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태양이 나타나면 정사를 돌보니, 이르러 나의 아우라 하였다. '문제'가 말하길 이는 크게 의리가 없다. 하고 이를 고치도록 훈계하였다. 왕의 아내를 '학미'라 부르는데, 후궁에는 여자가 육칠백명이나 되었다. 태자의 이름은 '이가미다불리'라 한다. 성곽은 없고 내관은 십이등급이 있는데, 첫째를 '대덕', 다음을 '小德', '대인', '소인' '대의', '소의', '대례', '소례', '대지', '소지', '대신', '小信'이라 하니, 수효는 정한 바가 없었다. '군니'가 일백이십명이 있는데, 중국의 '목재'와 같은 것이다. 팔십호에 하나의 '이니익'을 두니, 곧 '이장'같은 것이다. 열 개의 '이니익'이 하나의 '군니'에 속해있다. 복식에 있어 남자들은 치마저고리 같은 것을 입는데, 소매가 좁으면서 작다. 신발을 싣는데, 그 위에 옻칠을 하고, 정강이에 매단다. 보통사람들은 맨발로 다니고, 금과 은으로 꾸밀수가 없다. 옛부터 옷은 가로가 긴 천으로 서로 이어서 매듭지며 꿰매지 않는다. 머리에는 또한 관이 없고, 단지 머리카락을 귀 위에서 양쪽으로 드리운다. '수'때에 이르러 그 왕이 처음으로 비단으로 관을 만들고 금은으로 꽃을 새기어 꾸몄다. 부인은 머리를 뒤로 묶고, 역시 치마저고리를 입는데, 치마에 모두 선이 있었다. 고운 대나무를 취하여 빗을 만들고 풀을 엮어 거적을 만들며, 잡스런 가죽으로 표를 만들고, 문피로써 선을 둘렀다. 활과 화살, 칼과 창, 노와 도끼가 있고, 옻나무 가죽으로 갑옷을 만들며 뼈로써 화살촉을 만들었다. 병사들은 있지만, 전쟁하지 않았다.
其王朝會, 必陳設儀仗, 奏其國樂./$諸本脫[奏]字, 據《隋書》補.$/ 戶可十萬. 俗, 殺人·强盜及姦, 皆死; 盜者計贓酬物, 無財者, 沒身爲奴; 自餘輕重, 或流或杖. 每訊寃獄, 不承引者, 以木壓膝; 或張强弓, 以弦鋸其項. 或置小石於沸湯中, 令所競者探之, 云理曲者卽手爛; 或置蛇瓮中, 令取之, 云曲者卽 手. 人頗恬靜, 罕爭訟, 少盜賊. 樂有五弦·琴·笛. 男女皆 臂, 點面, 文身. 沒水捕魚. 無文字, 唯刻木結繩. 敬佛法, 於<百濟>求得佛經, 始有文字. 知卜筮, 尤信巫覡. 每至正月一日, 必射戱飮酒, 其餘節, 略與華同. 好 博·握 · 蒲之戱. 氣候溫暖, 草木冬靑. 土地膏 , 水多陸少. 以小環掛 項, 令入水捕魚, 日得百餘頭. 俗無盤俎, 藉以 葉, 食用手 之. 性質直, 有雅風. 女多男少, 婚嫁不取同姓, 男女相悅者卽爲婚. 婦入夫家, 必先跨火, 乃與夫相見. 婦人不淫妬. 死者 以棺槨, 親賓就屍歌舞, 妻子兄弟以白布制服. 貴人三年殯, 庶人卜日而 . 及葬, 置屍船上, 陸地牽之, 或以小輿. 有<阿蘇山>, 其石無故火起接天者, 俗以爲異, 因行祭禱. 有如意寶珠, 其色靑, 大如鷄卵, 夜則有光, 云魚眼睛也. <新羅>·<百濟>皆以<倭>爲大國, 多珍物, 仰之, 恒通使往來.
왕이 조회할때는 반드시 병사들은 늘여 놓구 그 나라의 즐거움만 아뢰었다. 호수는 가희 십만이다. 풍속에 살인하거나 강도, 간사함은 모두 죽였다. 도둑질한자는 훔친물건을 헤아리어 물건으로 값게 하고, 재물이 없는 자는 노비로 삼았다. 남는 재물의 양의 많고 적음에 따라 쫓아내거나 혹은 곤장을 맞게 하였다. 공경함이 없는 자는 나무로 무릅을 압박하거나 혹은 강한 활을 넓혀서 목에다 매달거나, 작은 돌을 달구어 그 가운데에 두는데, 영을 따른자는 이를 찾을 수 있고, 사악한 자는 곧 손을 덴다고 한다. 혹은 뱀이 들어 있는 항아리에 두는데, 영을 따른 자는 이를 취하고, 사악한 자는 손을 물린다고 한다. 백성들은 편안하고, 고요하여 다툼과 송사가 적고, 도적이 적다. 악기에는 오현과 거문고, 피리가 있다. 남녀는 모두 팔과 얼굴에 점을 찍는 문신을 한다. 물에 들어가 물고기를 잡는다. 문자는 없어, 나무에 줄을 맺어 새긴다. 불법을 숭상하여 '백제'에서 불경을 구하니 문자의 시작이다. 점치는 것을 알아 무당과 박수를 더욱 믿는다. 매양 정월 일일에는 반드시, 궁술과 연극 술을 마시고 나머지 것들은 중국과 같다. 기박, 악삭, 저포의 놀이를 좋아한다. 기후는 따뜻하고 습하여 풀과 나무는 겨울에도 푸르다. 토지는 비옥하며, 물이 많고, 땅이 적다. 작은 고리같은 것을 목에 걸고 물에 들어가 고기를 잡는데, 하루에 오백마리정도나 잡는다. 풍속에 대와 그릇이 없어 떡갈나무 잎으로 대고, 손을 사용하여 음식을 먹는다. 성질이 곧고, 우아함이 있다. 여자가 많고 남자가 적으며, 결혼은 같은 성끼리는 못하게 한다. 남녀가 서로 좋아하면 곧 결혼시킨다. 부인은 남편의 집에 들어가 반드시 먼저 불을 넘게 하는데 이에 남편이 지켜본다. 부인은 음란하거나 시샘하지 않는다. 죽은 자는 관과 곽에 넣고 친한 손님이 시신을 취하며 노래하고 춤춘다. 처와 아들, 형과 아우는 흰 베옷을 입는다. 귀한 사람은 삼년을 치루고, 보통사람은 점친날에 묻는다. 장사지낼때는 시체를 배 위에 두고, 육지에서 이를 보내거나 혹은 작은 수레로써 한다. '아소산'이 있는데, 돌이 없고 옛날 불이 일어나 하늘까지 닿았다 하여 풍속에서 이를 이상히 여기어 제사지내고 있다. 진귀한 구슬이 나오는데, 그 색이 청색이고 크니는 학의 알만하고, 밤에도 곧 빛이 있으니, 이르기를 물고기의 눈이라라 하였다. '신라',와 '백제'를 모두 '왜'가 대국으로 삼는데, 진귀한 물건이 많아 이를 믿고 따르며, 항시 사신이 왕래하여 통한다.
<大業>三年, 其王<多利思比孤>遣朝貢. 使者曰: [聞海西菩薩天子重興佛法, 故遣朝拜, 兼沙門數十人來學佛法.] 國書曰: [日出處天子致書日沒處天子, 無恙.]云云. 帝覽不悅, 謂鴻 卿曰: [蠻夷書有無禮者, 勿復以聞.] 明年, 上遣文林郞<裴世淸>使<倭國>, 度<百濟>, 行至<竹島>, 南望<耽羅國>, 經<都斯麻國>, 逈在大海中. 又東至<一支國>, 又至<竹斯國>. 又東至<秦王國>, 其人同於<華夏>, 以爲<夷洲>, 疑不能明也. 又經十餘國, 達於海岸. 自<竹斯國>以東, 皆附庸於<倭>. <倭王>遣小德<何輩臺>從數百人, 設儀仗, 鳴鼓角來迎. 後十日, 又遣大禮<哥多毗>從二百餘騎, 郊勞. 旣至彼都, 其王與<世淸>. 來貢方物./$按《隋書》云:[其王與淸相見, 大悅曰:{我聞海西有<大隋>, 禮義之國, 故遣朝貢. 我夷人僻在海隅, 不聞禮義, 是以稽留境內, 不卽相見. 今故淸道飾館, 以待大使, 冀聞大國惟新之化.} <淸>答曰:{皇帝德 二儀, 澤流四海, 以王慕化, 故遣行人來此宣諭.} 旣而引<淸>就館. 其後淸遣人謂其王曰:{朝命旣達, 請卽戒塗.} 於是設宴享以遣<淸>. 復令使者隨<淸>來貢方物.]這裏[世淸]下當有脫文.$/ 此後遂絶.
'대업'삼년, 그 왕 '다리사비고'가 조공을 받쳤다. 사신이 말하길 바다 서쪽의 보살인 천자께서 불법을 일으키니 고로 조배합니다. 아울러 승려 수십명을 보내어 불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했다. 국서에 이르기를 태양이 나오는 곳의 천자가 태양이 지는 곳의 천자에게 서를 보낸다. 걱정이 없으니.... 운운하니 제가 보고 기뻐하지 않자. 홍려경이 이르러 말하길 만이의 서에는 예가 없는 것이 있다. 다시는 가르침을 받지 말라. 하였다. 다음해 문림랑 '배세청'을 '왜국'의 사신으로 보냈는데 '백제'를 건너서 '죽도'에 이르러, 남쪽으로 '탐라국'을 향하고, '도사마국'에 이르러 멀리 큰 바다의 가운데에 있었다. 또 동으로 '일지국'에 이르고, '죽사국'에 이르렀다. 또 동으로 '진왕국'에 이르렀는데, 사람들은 '중국인'이니, '이주'로 삼자 능히 밝지 않아 의심하였다. 또 십여국을 지나 바닷가에 이르렀다. 스스로 '죽사국'의 동쪽으로 모두 '왜'를 따르고 있었다. '왜왕'이 소덕 '아배대'와 수백인을 보내어 의장을 베풀고 북과 각을 불며 맞이 하였다. 십일 후 또 대례 '가다비'와 이백여 기병을 보내어 성밖에서 힘쓰니, 이미 그 도읍에 이르러 왕이 '세청'을 맞았다. 와서 방물을 받쳤다. 이후로는 이르지 않았다.
'진'이 평정하고, '개황'이십년에 이르러, 성이 '아매'이고 이름이 '다리사비고'인 '아배학미'라 불리우는 '왜왕'이 사신을 보내어 대궐에 이르렀다. 임금이 벼슬을 내리고 그 풍속을 물으니, 사신이 말하길, '왜왕'은 하늘을 형으로 삼고, 태양을 아우로 삼음으로써 하늘이 밝을 때에 태어나 정사를 보고 있습니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태양이 나타나면 정사를 돌보니, 이르러 나의 아우라 하였다. '문제'가 말하길 이는 크게 의리가 없다. 하고 이를 고치도록 훈계하였다. 왕의 아내를 '학미'라 부르는데, 후궁에는 여자가 육칠백명이나 되었다. 태자의 이름은 '이가미다불리'라 한다. 성곽은 없고 내관은 십이등급이 있는데, 첫째를 '대덕', 다음을 '小德', '대인', '소인' '대의', '소의', '대례', '소례', '대지', '소지', '대신', '小信'이라 하니, 수효는 정한 바가 없었다. '군니'가 일백이십명이 있는데, 중국의 '목재'와 같은 것이다. 팔십호에 하나의 '이니익'을 두니, 곧 '이장'같은 것이다. 열 개의 '이니익'이 하나의 '군니'에 속해있다. 복식에 있어 남자들은 치마저고리 같은 것을 입는데, 소매가 좁으면서 작다. 신발을 싣는데, 그 위에 옻칠을 하고, 정강이에 매단다. 보통사람들은 맨발로 다니고, 금과 은으로 꾸밀수가 없다. 옛부터 옷은 가로가 긴 천으로 서로 이어서 매듭지며 꿰매지 않는다. 머리에는 또한 관이 없고, 단지 머리카락을 귀 위에서 양쪽으로 드리운다. '수'때에 이르러 그 왕이 처음으로 비단으로 관을 만들고 금은으로 꽃을 새기어 꾸몄다. 부인은 머리를 뒤로 묶고, 역시 치마저고리를 입는데, 치마에 모두 선이 있었다. 고운 대나무를 취하여 빗을 만들고 풀을 엮어 거적을 만들며, 잡스런 가죽으로 표를 만들고, 문피로써 선을 둘렀다. 활과 화살, 칼과 창, 노와 도끼가 있고, 옻나무 가죽으로 갑옷을 만들며 뼈로써 화살촉을 만들었다. 병사들은 있지만, 전쟁하지 않았다.
其王朝會, 必陳設儀仗, 奏其國樂./$諸本脫[奏]字, 據《隋書》補.$/ 戶可十萬. 俗, 殺人·强盜及姦, 皆死; 盜者計贓酬物, 無財者, 沒身爲奴; 自餘輕重, 或流或杖. 每訊寃獄, 不承引者, 以木壓膝; 或張强弓, 以弦鋸其項. 或置小石於沸湯中, 令所競者探之, 云理曲者卽手爛; 或置蛇瓮中, 令取之, 云曲者卽 手. 人頗恬靜, 罕爭訟, 少盜賊. 樂有五弦·琴·笛. 男女皆 臂, 點面, 文身. 沒水捕魚. 無文字, 唯刻木結繩. 敬佛法, 於<百濟>求得佛經, 始有文字. 知卜筮, 尤信巫覡. 每至正月一日, 必射戱飮酒, 其餘節, 略與華同. 好 博·握 · 蒲之戱. 氣候溫暖, 草木冬靑. 土地膏 , 水多陸少. 以小環掛 項, 令入水捕魚, 日得百餘頭. 俗無盤俎, 藉以 葉, 食用手 之. 性質直, 有雅風. 女多男少, 婚嫁不取同姓, 男女相悅者卽爲婚. 婦入夫家, 必先跨火, 乃與夫相見. 婦人不淫妬. 死者 以棺槨, 親賓就屍歌舞, 妻子兄弟以白布制服. 貴人三年殯, 庶人卜日而 . 及葬, 置屍船上, 陸地牽之, 或以小輿. 有<阿蘇山>, 其石無故火起接天者, 俗以爲異, 因行祭禱. 有如意寶珠, 其色靑, 大如鷄卵, 夜則有光, 云魚眼睛也. <新羅>·<百濟>皆以<倭>爲大國, 多珍物, 仰之, 恒通使往來.
왕이 조회할때는 반드시 병사들은 늘여 놓구 그 나라의 즐거움만 아뢰었다. 호수는 가희 십만이다. 풍속에 살인하거나 강도, 간사함은 모두 죽였다. 도둑질한자는 훔친물건을 헤아리어 물건으로 값게 하고, 재물이 없는 자는 노비로 삼았다. 남는 재물의 양의 많고 적음에 따라 쫓아내거나 혹은 곤장을 맞게 하였다. 공경함이 없는 자는 나무로 무릅을 압박하거나 혹은 강한 활을 넓혀서 목에다 매달거나, 작은 돌을 달구어 그 가운데에 두는데, 영을 따른자는 이를 찾을 수 있고, 사악한 자는 곧 손을 덴다고 한다. 혹은 뱀이 들어 있는 항아리에 두는데, 영을 따른 자는 이를 취하고, 사악한 자는 손을 물린다고 한다. 백성들은 편안하고, 고요하여 다툼과 송사가 적고, 도적이 적다. 악기에는 오현과 거문고, 피리가 있다. 남녀는 모두 팔과 얼굴에 점을 찍는 문신을 한다. 물에 들어가 물고기를 잡는다. 문자는 없어, 나무에 줄을 맺어 새긴다. 불법을 숭상하여 '백제'에서 불경을 구하니 문자의 시작이다. 점치는 것을 알아 무당과 박수를 더욱 믿는다. 매양 정월 일일에는 반드시, 궁술과 연극 술을 마시고 나머지 것들은 중국과 같다. 기박, 악삭, 저포의 놀이를 좋아한다. 기후는 따뜻하고 습하여 풀과 나무는 겨울에도 푸르다. 토지는 비옥하며, 물이 많고, 땅이 적다. 작은 고리같은 것을 목에 걸고 물에 들어가 고기를 잡는데, 하루에 오백마리정도나 잡는다. 풍속에 대와 그릇이 없어 떡갈나무 잎으로 대고, 손을 사용하여 음식을 먹는다. 성질이 곧고, 우아함이 있다. 여자가 많고 남자가 적으며, 결혼은 같은 성끼리는 못하게 한다. 남녀가 서로 좋아하면 곧 결혼시킨다. 부인은 남편의 집에 들어가 반드시 먼저 불을 넘게 하는데 이에 남편이 지켜본다. 부인은 음란하거나 시샘하지 않는다. 죽은 자는 관과 곽에 넣고 친한 손님이 시신을 취하며 노래하고 춤춘다. 처와 아들, 형과 아우는 흰 베옷을 입는다. 귀한 사람은 삼년을 치루고, 보통사람은 점친날에 묻는다. 장사지낼때는 시체를 배 위에 두고, 육지에서 이를 보내거나 혹은 작은 수레로써 한다. '아소산'이 있는데, 돌이 없고 옛날 불이 일어나 하늘까지 닿았다 하여 풍속에서 이를 이상히 여기어 제사지내고 있다. 진귀한 구슬이 나오는데, 그 색이 청색이고 크니는 학의 알만하고, 밤에도 곧 빛이 있으니, 이르기를 물고기의 눈이라라 하였다. '신라',와 '백제'를 모두 '왜'가 대국으로 삼는데, 진귀한 물건이 많아 이를 믿고 따르며, 항시 사신이 왕래하여 통한다.
<大業>三年, 其王<多利思比孤>遣朝貢. 使者曰: [聞海西菩薩天子重興佛法, 故遣朝拜, 兼沙門數十人來學佛法.] 國書曰: [日出處天子致書日沒處天子, 無恙.]云云. 帝覽不悅, 謂鴻 卿曰: [蠻夷書有無禮者, 勿復以聞.] 明年, 上遣文林郞<裴世淸>使<倭國>, 度<百濟>, 行至<竹島>, 南望<耽羅國>, 經<都斯麻國>, 逈在大海中. 又東至<一支國>, 又至<竹斯國>. 又東至<秦王國>, 其人同於<華夏>, 以爲<夷洲>, 疑不能明也. 又經十餘國, 達於海岸. 自<竹斯國>以東, 皆附庸於<倭>. <倭王>遣小德<何輩臺>從數百人, 設儀仗, 鳴鼓角來迎. 後十日, 又遣大禮<哥多毗>從二百餘騎, 郊勞. 旣至彼都, 其王與<世淸>. 來貢方物./$按《隋書》云:[其王與淸相見, 大悅曰:{我聞海西有<大隋>, 禮義之國, 故遣朝貢. 我夷人僻在海隅, 不聞禮義, 是以稽留境內, 不卽相見. 今故淸道飾館, 以待大使, 冀聞大國惟新之化.} <淸>答曰:{皇帝德 二儀, 澤流四海, 以王慕化, 故遣行人來此宣諭.} 旣而引<淸>就館. 其後淸遣人謂其王曰:{朝命旣達, 請卽戒塗.} 於是設宴享以遣<淸>. 復令使者隨<淸>來貢方物.]這裏[世淸]下當有脫文.$/ 此後遂絶.
'대업'삼년, 그 왕 '다리사비고'가 조공을 받쳤다. 사신이 말하길 바다 서쪽의 보살인 천자께서 불법을 일으키니 고로 조배합니다. 아울러 승려 수십명을 보내어 불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했다. 국서에 이르기를 태양이 나오는 곳의 천자가 태양이 지는 곳의 천자에게 서를 보낸다. 걱정이 없으니.... 운운하니 제가 보고 기뻐하지 않자. 홍려경이 이르러 말하길 만이의 서에는 예가 없는 것이 있다. 다시는 가르침을 받지 말라. 하였다. 다음해 문림랑 '배세청'을 '왜국'의 사신으로 보냈는데 '백제'를 건너서 '죽도'에 이르러, 남쪽으로 '탐라국'을 향하고, '도사마국'에 이르러 멀리 큰 바다의 가운데에 있었다. 또 동으로 '일지국'에 이르고, '죽사국'에 이르렀다. 또 동으로 '진왕국'에 이르렀는데, 사람들은 '중국인'이니, '이주'로 삼자 능히 밝지 않아 의심하였다. 또 십여국을 지나 바닷가에 이르렀다. 스스로 '죽사국'의 동쪽으로 모두 '왜'를 따르고 있었다. '왜왕'이 소덕 '아배대'와 수백인을 보내어 의장을 베풀고 북과 각을 불며 맞이 하였다. 십일 후 또 대례 '가다비'와 이백여 기병을 보내어 성밖에서 힘쓰니, 이미 그 도읍에 이르러 왕이 '세청'을 맞았다. 와서 방물을 받쳤다. 이후로는 이르지 않았다.